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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쁘신 하나님 / 창 22: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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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쁘신 하나님> 창22:13-18
새문안교회 2003. 2. 2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을 크게 하실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지상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창12:2-3).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복을 받은 아브라함이었지만 그의 삶은 결코 행복한 일들로만 가득찬 삶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생면부지의 땅으로 이주를 해야 했습니다(창12:1, 4). 이주하여 살고있던 땅에 기근이 들어 이를 피해 애굽으로 옮겨가 거하려다가 애굽 왕에게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긴 적도 있었습니다(창12:15). 그런 일이 한 번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창20:1-2에 보면 아브라함이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그랄이라는 곳에 거류할 때에도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겼던 적이 있습니다. 또 사로잡혀간 조카와 그의 가솔들을 살리기 위해 불과 삼백십팔 명의 가병들을 거느리고 네 나라 왕들의 연합군과 싸우는 목숨을 건 전투를 해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창14:14-16).

그의 나이 80대 중반을 넘기면서는 십 수년을 두 여인과 그 각각에게서 난 두 이복 아들 사이의 갈등 때문에 고뇌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그 때까지 그 자신이 아들을 출산하지 못하자 하갈이라는 자신의 애굽 여종을 첩으로 받아들이도록 아브라함을 압박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갈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자신의 여주인이었던 사라를 멸시하기 시작하자 사라는 분통해하며 하갈을 학대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견딜 수 없어 하갈이 도망치는 일이 있었습니다(창16:1-6).

아브라함은 나이 86세에 하갈로부터 아들 하나를 얻고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지어주었습니다(창16:15-16). 그리고 14년 후 그의 나이 100세에 달했을 때에 아내 사라에게서 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창21:5). 그런데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신의 어린 아들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을 내보내 자신의 종의 아들이 자기의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게 하라고 조르게 되었습니다(창21:9-10). 옛 중근동의 법전들에 따르면 노예로서 주인의 아내가 된 여인이 낳은 아들은 자유인 아내가 낳은 아들과 동등하게 유산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유산을 못 받는다면 그 대신 자유를 얻게 되어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크게 근심하게 되었습니다(창21:11). 비록 첩의 아들이긴 했으나 86세에 얻은 그 아들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은 사랑했었고 한 때 그의 기업을 이을 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노년에 얻은 첫 아들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을 그와 함께 계속 데리고 있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데리고 있자니 아내 사라의 등살을 견딜 수 없고, 내보내자니 그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마음이 아파 힘들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21:12) 하셨기에 할 수 없이 그들을 나가게 하긴 했으나 그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아팠을 것입니다(창21:14).

그러나 아브라함의 시련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나 일단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에게 자유를 주어 내보냄으로써 골치 아픈 가정사가 일단락 지어지고 이제는 더 이상 가정의 풍파 없이 백 살 나이에 얻은 적자 이삭과 함께 평안하고 행복한 세월을 보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던 때에 아브라함은 그의 전 생애를 통 털어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창22:1-2). 번제가 무엇입니까? 제물을 잡아 불에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그는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서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은 후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칼로 그 아들을 잡으려 했습니다(창22:3-10). 그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창22:11-12) 말하며 중단시키지 않았던들 그는 비극적인 순종의 행위를 감행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숨막히는 사건이 극적으로 행복한 해결을 보게 되는 마지막 장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숫양 한 마리를 그 뿔이 수풀에 걸려 꼼짝 못하게 하심으로써 이삭을 대신할 제물을 예비하셨고 아브라함은 그것으로 번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일을 마쳤습니다(13). 그러자 아브라함은 다시 하늘로부터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재확인을 들은 것입니다(15-18).

백 살의 나이에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했던 이 사건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조차도 순종하려했던 아브라함의 행동은 그의 모든 순종적 행위의 결정판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순종의 행위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브라함의 신실함 때문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때가 그의 나이 칠십오 세 때였습니다(창12:4). 그리고 창25:7을 보면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처음 말씀을 듣고 그의 말씀을 따라 산 삶이 꼭 100년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만나 그 언약 앞에서 산 이 100년 동안 참으로 신실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신실하셨던 이는 하나님 자신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이야기 속에서 정말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미쁘신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갔다가 애굽 왕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려 바로로 하여금 즉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주게 하셨습니다(창12:17-20).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또 아내 사라를 빼앗겼을 적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날 밤으로 꿈에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시어 그가 사라를 손도 안 대고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게 하셨습니다(창20:3-7).

아브라함이 사로잡혀간 조카와 그의 가솔들을 살리기 위해 불과 삼백십팔 명의 가병들을 거느리고 네 나라 왕들의 연합군과 목숨을 건 전투를 해야 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대적들을 아브라함의 손에 붙여주시어 승리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창14:20).

죄악으로 뒤덮인 소돔을 멸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의인 50명이 있을 때에는 소돔과 고모라 온 지역을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자 그 탄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50명의 의인에서 45명으로, 45명에서 40명으로, 40명에서 30명으로, 30명에서 20명으로, 20명에서 10명으로 낮추어 간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 들어주셨습니다. 처음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에 그에게 하신 약속 즉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 하신 약속을 완벽하게 지키신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이 백 살을 넘긴 아브라함이 사라와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 사이의 갈등과 불화 때문에 속을 태우던 끝에 가슴 아프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켜주실 것이고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약속하심으로써 그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미쁘심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이 전해주는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리라 약속하셨고 나이 백 살에 드디어 허락하신 그 귀한 언약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하고는 정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잔인해 보이고 실행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을 과연 아브라함이 순종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신 후 이삭을 잡으려는 아브라함의 칼 든 손을 결국 멈추게 하시고 예비하셨던 숫양 한 마리로 번제를 드리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삭을 바치라 하셨던 하나님의 명령이 잔인해 보이고 실행불가능해 보이면 보일수록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희생제물로 실제로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사랑의 언약에 대한 성실하심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더욱 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잔인하기 그지없고 사람에게는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행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마지막 순간에 면제시켜주셨던, 인간이 감당하기에 가장 잔혹한 시련을 당신의 아들과 당신 자신에게는 실제로 부과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많은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옳은 답은 이삭이 아브라함의 우상이 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일 것이라고 봅니다.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그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지 않게 하시려고 그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사실 이삭 자신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삭은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로 말미암아 큰 백성을 이루시겠고 많은 사람이 복 받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저 아들 하나 갖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12:2-3에서 보는 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첫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 것이었습니다. 아들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습니다. 창13:16에서 보는 대로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아들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창15:5에서 보는 대로 세 번째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신 것이었습니다. 창17:2-6에서 보는 대로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하셨습니다. 아들을 주시리라는 언급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창17:15)고 명하시면서 비로소 나옵니다. 창17:16-19를 봅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즉 "우리 나이가 이렇게 많고 아들도 없는데 어떻게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라고 그 언약의 실현방법을 묻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그 방법으로서 답을 주신 것이 "너희 자신의 아들을 줌으로써"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궁극적 언약을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아들이 목적 그 자체로 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노년에 얻은 아들에 빠져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리고 그의 명령을 순종하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르치려고 하신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제사를 받으실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이삭은 하나님께 바쳐질 제물적 존재에 불과함을 분명히 함으로써 아브라함의 믿음에 있어서 가치순위의 혼동을 금하신 것입니다.

이러하기에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위해 아주 크고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단에 집착하느라 본질과 근본목적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을 위한 수단으로 주어졌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자녀들이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건강이나 기타 달란트도 하나님의 나라 일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바쳐질 수단들인데, 그 사실을 잊고 그 수단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사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자녀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잊고 지내는 사람은 없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바쳐져야 할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건강이나 기타 달란트 그 자체가 우리의 우상이 되어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관심하신 듯 여겨질 때에도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오래 동안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을 때에도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과 반대되는 일을 행하시는 것 같이 생각될 때에도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미쁘신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시련의 연속같이 느껴질 때에도 미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들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고 아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형태의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줄 아는 믿음을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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