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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중단없는 순례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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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없는 순례공동체
이필재 목사 (갈보리교회)


여러분과 저와 같이 이렇게 지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주어지는 우리 기독교 안에서 쓰여지는 아름다운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순례자"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좀 다르게 표현을 하면 나그네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백성된 모습을 보면 모두가 다 길을 떠나는 나그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희 목회자들이 신학교에서 종교학이라고 하는 시간을 공부하게 되는데 히브리 민족의 야훼 종교가 역사화된 시기는 아브라함 때부터라고 그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이 일을 같이 하자고 하나님이 최초로 부르신 사람이 아브라함이라고 그때부터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손을 잡고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소원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가장 먼저 주시는 의무적 사명이라는 것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나그네로 만드는 것이 아브라함을 향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지시인 것이 나타납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사는 거의 같은 맥락에서 조명해 볼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12 지파의 조상이라는 영적 축복의 자리에 앉았는데, 집을 떠나 나그네가 되어서 돌베개 잠을 잤다는 문화가 생겼고, 요셉은 소년 시절에서 110세가 되도록 자기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애굽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가장 먼저 선택을 받은 특권의 히브리 민족은 끝없는 나그네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것만 보아도 바벨로니아에서 70년, 애굽에서 430년, 또 근래 역사에도 1,500년 이상을 유리 방황하는 나그네 민족이 되었고, 지금도 전 세계 그렇게 많은 종족 가운데 히브리 민족은 본국에서 사는 숫자 보다 외국에 나가 사는 숫자가 훨씬 더 많은 그런 민족입니다. 순수 아브라함 혈통의 이스라엘 민족은 현재 420만이고, 이스라엘로 귀화한 사람이 80만에서 500만이 살고 있는데 해외에 나가서 살고 있는 히브리 민족은 그 숫자보다 훨씬 많은 수에 달하는 그런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신명기 26장에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인이라" 신약 사도 시대에 와서도 똑같은 순례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핍박으로 인해서 예수를 믿는 믿음의 공동체는 하루아침에 나그네가 되어서 베드로전서 1장에 잘 반영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자기 서신의 첫머리를 장식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나그네로 만드시는가? 나그네로 살아야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당시 남쪽의 애굽 문명과 동쪽으로 연결된 끝없는 대륙과 지중해 해상을 유럽으로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상업의 중심지라서 세계인들이 오고가는 그런 요지가 되었습니다. 창세기에도 나옵니다. 애굽의 장사꾼 하나가 가나안 지역을 왔다 갔다 하다가 요셉을 은 20에 사서 팔려고 인신매매 상업자로 그렇게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 한사람을 불빛으로 삼아서 이렇게 수없이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가나안 복판에 그를 심어 놓으심으로 그가 비추는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오고 가는 세계 모든 사람들이 보고 구원을 받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잘 기억하는 대로 20세기는 미국 사람들이 가장 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미국인을 온 세계에 흩어놓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교하는데 큰 도움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가장 큰 믿음의 정열이 한국 교회에,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지금 한국 교인들을 온 세계에 흩어 놓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제가 살았던 로스앤젤레스에는 다인종 문화를 이루기 때문에 가끔 로스앤젤레스 타임지가 다인종의 특징에 대해서 심심치 아니하게 기사화 합니다. "한국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가끔 발표를 합니다. 이렇게 발표를 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부지런한 민족이다. 그래서 경제 성장이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어느 민족보다도 강하다. 그들은 돈 한푼 없이 미국에 와도 몇 년이 지나면 다 문화 생활을 하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을 사고, 그들은 부지런히 일해서 경제 성장이 빠르다. 두번째,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교육열을 가지고 있다. 이 분야는 유태인보다도 훨씬 앞서간다.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자녀를 대학에 보내지 아니하는 한국인은 없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매우 교육열이 강한 것을 평가가 되었고, 세번째, 교회를 많이 세운다. 한국인 있는 곳에 교회가 세워진다. 한국인 10가정만 모여도 그 곳에 반드시 교회가 세워지는 신앙의 정열을 가지고 있는 그런 민족이다. 그 다음에 네번째, 미국이 이민와서 살고 있는 모든 종족 가운데 미국 땅에 가장 넓게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된 민족이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부르심을 받아서 평생을 끝없는 나그네 길을 걸었던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자신의 나그네 길 사역에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소중한 관계의 빌립보 교우들에게 권면하는 하나님 백성됨의 삶의 철학을 제시하는 그런 대목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갈보리 순례 공동체가 가야할 2003년의 본 교회 목표로 정해 봅니다.

오늘은 새해 첫 주일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이때가 되면 일년 동안의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정신적으로 새롭게 해보려는 그런 노력을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훌륭한 신앙적 삶의 방향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오늘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신앙적으로 미완성의 존재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제 생각에는 우리 기독교 2,000년 역사에 주님을 위해서 가장 훌륭하게 살았던 사람이 누구냐 했는데, 저더러 선택하라면 바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를 통해서 세계 선교의 기초를 놓으신 것입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뜨거운 열정의 가슴을 열어서 세계를 품고 복음의 소리를 외쳤으며 그 과정에서 겪는 끝없는 고통의 시간들을 면류관으로 해석하면서 그 일을 견디었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에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 이상의 우리가 가지고 문학으로서 더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특권 의식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갖는 왕족 혈통의 사회적 존경도 내버렸다고 그랬습니다. 중간 할례자가 아닌 8일만에 할례 받는 정통 신앙의 권위도 그는 버렸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생이라는 당대 최고의 학문의 배경도 배설물로 취급했고, 국가 최고의 권력기구인 산헤드린 공의회원 72명 중 하나라는 엘리띠한 출세의 영광도 쓰레기통에 던졌습니다. 그는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아마도 주님이 제일 좋아하셨던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라고 나는 믿어집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오늘 말씀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나는 보니 온전히 이룬 것이 없습니다. 또, 얻은 것도 아직 없습니다." 이 말은 '주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의 능력이 아직도 babe에 속합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신앙 양심 선언에는 로마서 7장 18절에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나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살았던 2,000년 전의 사회 문화는 오늘날과 같이 쉽게 죄의 문화에 접촉할 수 있는 그런 문화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이렇게 너무나도 만연된 죄의 문화권 안에서 사는 우리들의 신앙 고백은 무엇이 될까? "내가 그래도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십년 신앙생활 열심히 했고 교회 직분도 괄목할 만하게 열심히 했고, 봉사의 경력이 이만하면 내가 온전히 이룬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말하지 아니하고 그 반대로 말하는 자기의 신앙의 미완성을 고백하는 바울은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 그 다음에 그는 하나의 목표를 정하는데 그것을 푯대라고 하는 말로 정했습니다. 즉, 미완성의 존재라 완성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 푯대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가 바뀌어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영원한 미완성의 영적 Baby, 그러나 목표는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완성된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저는 2003년에 새롭게 성취하고 싶어하는 개인적 목표를 각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때 실패감을 느낄 때는 이루지 못한 꿈 때문에 좌절하는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성공과 실패라고 하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인간들은 끝없는 환희와 고민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내가 얻고자 했던 목표가 무엇이었는가에 따라서 기쁨과 슬픔이 교차됩니다. 결국 목표를 잘못 세우면 해마다 실패합니다. 반대로 목표를 잘 세우면 평생 성공합니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바울은 이렇게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그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잊어버림의 뜻이란 것은 I.Q가 낮은 바보와 같이 망각해 버리라 그런 뜻은 아니라고 봅니다. 뒤에 있었던 일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자유 함을 누리는 새로운 창조적 역사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도 새해 첫주일에 우리 모두가 가져야 될 신앙의 목표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뒤에 있었던 일에 구애받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는데, 하나는 내가 잘했던 일에 대해서 구애받지 말아야 됩니다. 잘했던 과거가 오늘에 내 신앙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반응도 우리 신앙 경험상 충분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너무 잘한 과거가 오히려 내 신앙의 걸림돌이 되어서 공명심이나 명예심에 지나치게 집착을 주므로 나의 신앙 양심의 신선함을 오히려 해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창조 역사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잘못한 과거에도 구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뒤에 것을 잊을 수 있는 능력! 바울도 죄가 많다는 양심선언을 했는데, 우리는 더 많습니다. 그러면 그것 때문에 죽어버릴 것인가? 잘못한 과거는 많지만 앞에 있는 푯대가 분명함으로 그것을 잡으려는 희망이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미완성의 존재이지만 바라볼 수 있는 완성의 존재가 저렇게 분명하게 어둠을 밝히는 불빛으로 내 앞에 있으므로 그것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나는 좇아가노라"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중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실상 바울을 우리가 우리의 삶의 과정으로 평가를 해볼 때, 그는 돈도 못 벌었습니다. 그는 가정도 못 가졌습니다. 항상 누더기 옷을 걸치고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다녔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매맞고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인생의 감격에 벅찬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가 그렇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그것이 그의 목표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표 설정이 잘못되면 평생을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 인생 목표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해마다 성공자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은 다 갖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갖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이 행복인줄 알아야 합니다. 갈보리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난 18년 목표를 향해 달려오셨습니다. 훌륭하게 성취했다고 봅니다. 그러면 이제는 "그만 하자" 입니까? 이 순례 공동체는 계속 가야 합니다. 가되 쫓아가야 합니다. 어디로? 완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를 때까지! 여러분의 영혼의 지도자 박 목사님은 연령적으로 보아서 이제는 쉴 때라고 생각이 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사회 관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새로운 길을 중단 없이 달려가기 위해서 오늘이 지나면 내일, 새 역사 창조의 길을 가시지 않습니까? 12절 말씀에 바울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혔기 때문에 그 잡힘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끊임없이 달려가는 그것이 하나님 백성됨의 identity다! 바울은 그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1968년 10월 20일 맥시코 올림픽 경기때 가장 많은 사람에게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선수 하나가 탄생했습니다. 그는 올림픽 스타디움에 그렇게 가득하게 모인 전 관중의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전 세계의 신문들은 그 선수를 올림픽 정신을 가장 빛낸 선수라고 찬양했습니다. 누구냐? 마라톤 경기에 출전한 탄자니아의 아크와리 선수였습니다. 마라톤에 몇등했느냐? 꼴지했습니다. 그는 도중에 넘어졌습니다. 무릎이 깨어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피가 너무 많이 흘러 통증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 경기에서는 로마와 동경에서 마라톤에 두 번이나 금메달을 받은 에디오피아 아베베 선수도 10 mile 지점에서 부상 당해서 기권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크와리 선수는 그렇게 피투성이가 된 몸을 가지고 26 mile 385 야드를 뛰고 경기장에 들어왔습니다. 골인 지점까지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그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있고 그의 눈은 초점을 잃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지점까지 무사히 끝내고 그는 쓰려졌습니다. 온 세계 스포츠 기자들이 그에게 달려들어서 질문했습니다. "어차피 꼴찌라는 것일 알았을 텐데 왜 끝까지 이렇게 피를 흘리며 들어왔느냐?" 사실 올림픽 경기에서 마라톤 경기는 맨 마지막에 하고 폐막식을 합니다. 그 선수 때문에 폐막식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조국은 나를 믿고 7,000 mile 나를 이곳에 보냈습니다. 나는 조국에 금메달을 가지고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나의 조국의 불명예는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겁니다"

우리는 지금 마라톤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길을 뛰고 있습니다. 마지막 지점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금빛같이 빛나는 큰일은 내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치고 피흘린 이 몸을 가지고 그래도 마지막 지점까지 뛰었습니다. 그 대답을 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우리는 첫주일을 시작하면서 내가 가보지 아니한 길을 또 일년동안 가야되는데 어떠한 마음의 자세로 이 길을 달릴 것인가? 바로 이 올림픽 선수와 같은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우리가 이 순례의 길을 떠나자고 마음 먹을 때 그것이 새해 첫주일의 그리스도인의 훌륭한 신앙 고백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이 아침에 마음 결정을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2003년이라고 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함께 손을 잡고 찬송을 부르며 이 길을 같이 가십시다.

사랑의 원조이신 예수여! 나는 당신 앞에 언제나 작아지게 하옵소서. 죄수복을 입은 죄인같이 살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사명이 바래지 아니하는 푸른 색깔이 되게 하소서. 오직 하나의 노래를 부르며 마지막 지점에 이르게 하소서. 나의 순례의 여정에서 찢기고 피흘린 험란한 이 내 모습이 신랑되신 주님을 만나는 나의 웨딩드레스가 되게 하옵소서. 버리고 또 버려서 텅빈 이 내 마음이 주님께 드리는 나의 마지막 선물이 되게 하소서. 세상에서 너무 많이 누린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지 않게 하소서. 내 생애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그 순간이 내 인생의 가장 기쁜 날이 되게 하소서. 주님은 말하실 것입니다. "작은 일을 크게한 자여! 이제 내 나라의 안식을 네게 주노라 나를 위해서 네가 세상에서 흘린 눈물 만큼 여기 있노라. 나를 위해서 네가 버린 세상의 모든 것들이 여기 다 있노라." 그렇게 주님이 말씀해 주실 것을 우리가 가슴에 품고 새 역사 창조를 위해서 가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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