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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때가 찼다 / 욘 3:1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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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찼다 / 2003년 1월 26일
박종화 목사 9경동교회)


구약의 말씀: 요나서 3:1 ~ 6

주께서 또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요나는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읍이다. 요나는 그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 이 소문이 니느웨의 왕에게 전해지니, 그도 임금의 의자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임금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다.


서신서의 말씀: 고린도전서 7:29 ~ 3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십시오. 이 세상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1:14 ~ 20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그 모든 대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으로 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잡혀 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므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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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세가 좀 뒤숭숭한 것 같습니다. 언론 보도를 보면, 우리 사회에서도 불안한 나머지 금 사재기 열풍이 분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나 불안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금을 사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금이 가진 변치 않는 가치 때문에, 생활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금을 사서 보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간은 금이다” 하는 격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금은 옛날부터 소중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이 가진 물질들 중에서 금은 인간 역사의 초기부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로 나왔을 때, 그들은 몹시도 불안했습니다. 가나안에 언제 들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황량한 광야에서 내일은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을지 그것도 불안했습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언제 그늘을 만날 수 있을지, 물은 떨어지지 않을지 언제나 불안했습니다. 밤은 너무 추워서 걱정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생존의 불안,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때가 언제인가에 대한 불안을 심각하게 겪었을 것입니다.

이런 불안 속에서는 확실한 것을 찾게 되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게 할 수는 없을까, 신앙의 근간인 하나님을 손으로 만져볼 수는 없을까, 그분과 직접 마주보고 대화할 수는 없을까 하는 유혹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인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이스라엘은 원했습니다. 불안 가운데에서 그런 하나님을 모시고 싶은 것이나, 금을 사재기하는 것이나 그 심정은 똑 같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변치 않고 인생을 담보할 수 있는 가치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에서 최고의 가치가 있는 금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금송아지를 우상숭배라고 잘라 말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의 갈망을 이해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갈구했던 안전과 소망을 보장할 신을 눈앞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인간의 창작품, 그것을 극대화한 것이 금송아지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은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무한대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에게서 하나님을 보았고, 금송아지를 보면서 내일의 생명의 보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끝내 금송아지를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상숭배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혼이 났습니다.

사실 우리고 괴롭고 힘들면 무언가를 잡고 싶어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하는 심정처럼. 우리 인간 모두가, 사회집단과 국가까지도 위기에 처하면 무언가 명확한 희망의 상징을 확보하고 싶어합니다. 금송아지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것 속에 갇혀 지낼 수 없습니다. 금송아지라 이름하는 인간 최고의 가치일지라도, 최고의 체제일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을 가둬둘 수 없습니다. 금송아지는 파괴되었습니다. 금송아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금송아지로 제한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입니다.

시간은 금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시간도 금이라면 하나님의 시간은 뭡니까? 금보다도 더욱더 귀중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찼다.” 성서는 이 “때”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주 특별한 헬라어 단어 하나를 썼습니다. “때”가 찼다. “카이로스”라 이름하는 시간이 찼다, 이렇게 썼습니다. 이 말은 본래 헬라어 중에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 아침에 일어나고 일하고 퇴근하고 잠자고, 계획을 세우고 하는, 일반적인 시간, 계산될 수 있는 시간, 크로노스라 이름하는 시간과 달리,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시간, 하나님만이 주장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찼다. 하나님이 관여할 시간이 다 됐다. 이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오기 전에 회개를 해야 한다. 회개하고 복음을, 하나님 나라를 복음으로 받아들이면 구원과 복을 얻게 된다. 오늘 말씀이 이겁니다. 예수의 복음은 네 가지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때가 찼다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하나님이 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야 하나님이 오십니다. 인간이 아무리 신속하게 하나님의 대답을 원한들, 오늘 당장 건강을 주십시오 한들, 지금 출세하게 해주십시오 한들, 떼돈이 바로 벌리게 해주십시오 기도한들, 하나님은 묵묵부답일 수 있습니다. 당신의 때가 차야 응답해주십니다. 여러분 명심하셔야 합니다. 복은, 대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원하는 시간표에 따라서 하나님이 응답해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면,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시간에 따라서 인간의 시간 속에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기도 가운데에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뜻대로 하늘의 것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시간이지 인간의 시간은 아닙니다. 우리 시간에 안 맞는다고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모르는 인간의 절망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요즘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은 신속하게 응답하시는 분이기를 원합니다. 물건을 주문하면 신속 배달, 은행 대출을 신청하면 신속 대출, 그래야 마음에 차는 시대입니다. 인터넷 고속통신, 조금이라도 느리면 우린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빨리 빨리 응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도 인스턴트 식품 같이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든 인스턴트 속에, 인스턴트 시간 속에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묶으려는 것은 인간의 헛된 욕망일 뿐,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지금 가까이 왔으니 하나님의 때에 그대들의 시간을 맞추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세상의 시간은 완전히 사라지거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세상 나라는 완전히 물거품이 되거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세상의 백성은 완전히 소멸해버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오실 때 우리가 다 없어진다면 여러분 뭐 하러 건강을 유지하십니까? 무엇 하러 노력하시고, 뭐 하러 기도하십니까? 왜 옷은 입습니까? 기도는 왜 하십니까?

우리한테 잘못된 관념이 하나 있습니다. 하늘이 임하면 세상이 없어진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 생각은 잘못입니다. 하늘이 오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이 세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모양은 같아도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인격체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것이 하늘이 오신다는 뜻입니다. 하늘이 임할 때 우리 인간은 망하고 우리가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말은, 우리가 귀신이 된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때와 세상의 때를 함께 묶으셨습니다. 말을 바꾸면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 있으면, 하늘나라와 세상나라가, 우리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이 합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 가운데 임하게 하시고, 이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하게 하십니다. 우리 인간을 새로운 인격체로, 새로운 혼을 담은 새 인간으로 변화시킵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사회도 그렇게 변화시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받은 우리 육신도, 이 세계도, 이 가정도 다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 나라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우리 가정이, 이 세상이 바꿔지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렇게 되기 위해 조건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담을 수 없으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6․25 전쟁 때 저는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여섯 살 때였습니다. 전쟁이 났을 때 시골에 있었는데, 배고프고 먹을 것이 필요하면 같은 동네에 있는 외갓집에 갔습니다. 가면, 외할머니와 이모들이 맛있는 것을 주셨는데, 그때 제 생각에 외갓집은 부잣집이었습니다. 뒤뜰에 가면 장독대가 있는데, 메주 띄운 거, 간장, 고추장, 김치 항아리가 즐비하게 있었습니다. 늘 그 뚜껑을 열어서 먹을 것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근데 그 집 마당에 평상이 죽 놓여 있었는데, 그 평상에 그리고 마루에 온통 총 멘 이상한 사람들이 드러누워서 욕을 하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인민군이었습니다.

제 어린 심정에, 아 이 나쁜 사람들, 왜 우리 외갓집에 와서 마당을 점령하고 평상에 앉아서 이러나, 빨리 나가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서는, 우리 외갓집에서 이 사람들 나가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지금 보면, 요즘의 전문 용어로 “님비”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일은 다 나한테 주시고 나쁜 일은 남한테 주라는 겁니다. 묘지가 모자라서 화장터가 필요한데, 다른 동네에 화장터 세우는 건 OK, 우리 동네에는 못 세웁니다. 우리는 평화가 필요합니다만, 딴 나라에서는 전쟁이 나도 관심 없습니다. 홍수가 나도 좋지만, 우리 집 뒷마당은 안 됩니다. 그런 것이 여러분 아시는 대로 소위 집단이기주의, 님비 현상 아닙니까? not in my back yard. 내 집 뒤뜰에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 영어의 단어 첫 글자들을 따서 님비(NIMBY) 그러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유대의 백성들아,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하겠으니,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야 하겠으니, 당신들 뒤뜰 좀 내놓으시오. 그랬더니 유대인들의 답이 이렇습니다. 회개는 이방인한테 가서 말씀하십시오. 우리 뒤뜰에서 회개를 말씀하시면, 제가 뒤집어져야 하니까 안 됩니다. 회개는 다른 사람한테 말씀하시고, 저한테는 복만 말씀해 주십시오. 님비!

그런데 요즘은 지방자치 시대가 되면서 외부의 지원이나, 중앙정부의 협조를 바라면서 지방자치 단체끼리 열심히 투자유치 경쟁을 벌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하나 있는데요, 님비에 빗댄 말로 “핌비”(PYMBY)입니다. 핌비란, “내 집 뒤뜰” in my back yard는 똑같고, “아니”라는 not 대신에 제발이라는 말 please를 넣은 것입니다. please in my back yard, 제발 우리 뒤뜰에다 투자하십시오.

저는 이 핌비와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회개하라고 하시면, 제 집 뜰에 기꺼이 하나님 모시고 회개하겠습니다 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평화의 복음도 제 집 뜰에, 그걸 이루기 위한 회개도 제 집 뜰에! 예수님과 유대인의 갈등은 여기서 왔습니다. 유대인들이 회개의 말씀은 이방에, 복의 복음만 우리한테 달라는데, 예수께서는 그래서는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는다고, 하나님 나라가 안 온다면 내가 여러분들 안에 함께 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분 안에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같이 있어야 되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를 유대 백성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겁니다. 님비 현상입니다.
오늘 우리 나라에 이런 현상 없습니까? 회개하라는 말씀 앞에서 태도를 바꾸십시다. 님비에서 핌비로! 여러분 무슨 뜻인지 자기가 각자 실존을 생각하시면서, 각자의 가정과 우리의 민족을 생각하시면서 한번 스스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원합니다. 거듭나기를 정말로 원합니다. 그러나 님비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저는 새로운 인격을 가진, 새로운 가치를 가진 사람으로 바뀝니다. 이 나라가 분단 속에 있지만, 하나님의 시간이 오면 이 나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져 새로운 평화의 신천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 됩니다. 딴 데 가보십시오.” 그것 가지고는, 님비 가지고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유대백성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나의 기적 얘기입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들으신 선지자 요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명령합니다. “요나야. 너희 유대 백성들이 그렇게도 싫어하고 질시하여 망하기를 바라는 부자 동네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외쳐라. 그리고 회개하면 엄청난 복을 받는다고 일러주어라.” 요나는 고민합니다. 하나님, 복은 우리에게만 주시고, 그들에게는 저주를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왜 회개하면 복을 주신다는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라는 겁니까? 저는 못하겠습니다. 소위 님비 현상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요나를 고래 뱃속에 던져 넣으셨습니다. 3일 동안 고래 뱃속에 있다가 다시 살아 나와서 하나님의 두 번째 명령을 듣습니다. 그 명령이 오늘 요나서 3장 1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 명령에 따라서 요나는 니느웨 성으로 가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40일만 지나면 니느웨 성은 망한다. 만약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는 큰 복을 주실 것이다. 그랬더니 온 나라 사람들이 나와서 회개했고, 이 소식을 들은 니느웨의 임금도 삼베옷을 입고 회개하였고, 그래서 니느웨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게 요나서 이야기입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한 선지자 모두가 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이 잘 되기를 빈 선지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에스라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철저하게 회개하고 구원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국수주의에 가깝도록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입니다. 이러다 보니, 이스라엘 백성은 복은 우리에게, 저주는 이방 백성에게라는 생각에 지배되었습니다. 이 이기주의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요나라 이름하는 작은 선지자를 보내는 겁니다.

요나서의 메시지는 이런 것입니다. 회개는 이스라엘 백성도 해야되지만, 이방 백성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은 이스라엘에게만 아니라, 회개하는 누구에게나 임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유대사람 입장에서 보면 사고의 철저한 변화입니다. 이스라엘만이 하나님 백성이라 생각하는 국수주의, 편협주의에서 벗어나 세계를 향해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요나를 통해서 읽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가까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여러분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구원을 약속합니다. 어느 백성이든지, 어느 사회든지, 어느 민족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출신 성분을 가리지 말고 다 오라고 하십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을 베풀어주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시간,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지금 무르익고 있습니다.

저는 6․25 전쟁 때 미국을 비롯한 우방 국가들이 와서 우리를 도와준 것,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지금 이유야 어떻든 간에 중동 땅 이라크에서 곧 전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우리 땅에는 전쟁 안 되고, 아랍 땅에는 전쟁 나든 말든! 그것이 예수님의 정신입니까? 이남 땅에만 피해가 없으면, 북한 땅은 폭격해도 좋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요나처럼 가서 선포하여야 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복을 그분의 평화를 누리라고! 요나가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복은 우리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 함께 받아야 할 복입니다. 세상 모두가 평안해야 우리가 평안하지, 우리 혼자만 평화로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면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복 받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으로 가시면서, 당신의 몸을 남겨놓고 가셨습니다. 그 몸이 여기 장충동에 세워져 있습니다. 경동교회에 오신 여러분, 이곳에 오시면 하늘 시간과 세상 시간이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새로운 인간, 새로운 교회, 새로운 세계가 됩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평화가 지배하는 세상, 감사의 찬송이 울려 퍼지는 그런 세상이, 오늘 우리의 회개를 기점으로 해서 이 세상에 펼쳐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경동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다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복과 평화를 전하는 주님의 작은 교회가 여러분 가슴속에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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