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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화목합니다 / 마 5: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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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우리는 화목합니다
본 문 : 마 5:21-26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TV에서 방송된 연속사극 가운데 <여인천하>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 때는 이조 중종 때였습니다. 이 시대의 개혁가였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를 위시한 신진사류들은 도학정치를 부르짖으면서, 연산군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나라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 실행방법이 너무 급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훈구파 세력의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훈구파는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의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중종의 후궁 가운데 한 사람을 시켜서, 대궐 후원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네 글자를 한자로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네 글자가 드러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곧 이어서 주와 초의 두 글자가 합친 성을 가진 사람, 곧 조(趙)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을 널리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후궁을 시켜서 글자 모양이 나타난 잎을 중종에게 바치게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의 급진적인 개혁 및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결국 신진사류의 대표적 인물 몇 사람에게 사약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사약을 받고 죽고 말았습니다.
물론 훈구파 사람들은 조광조의 몸에 전연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조광조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꼭 죽여야만 살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사람을 죽인 일이 없기 때문에 살인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계명을 잘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외적이고 형식적인 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참뜻이 무엇이고, 근본 취지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일깨워주셨습니다. 우리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위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옆으로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두 가지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 말씀 전체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명의 배후에도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귀한 생명을 다른 사람의 손에서 보호해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을 가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피해를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좀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그가 기억하고서 그 계명을 지키게 되면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손에서 우리의 귀한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해 주신 계명이 바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떤 식으로 지켜야 되겠습니까? 사랑의 정신에 따라 지켜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직접 죽이느냐, 마느냐는 차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그만큼 사랑해 주고 또 아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다 보면 자연적으로 우리는 화목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근본 취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주고 또 사랑을 받는 형제 자매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성령께서 평안의 매는 줄로 이미 하나되게 하신 것을 더욱더 힘써 지킬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는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21절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지키고 있는 유전이 잘못되었음을 우리에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둘째, 22절입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셋째, 23-26절입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근본 취지는 형제 화목에 있음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이 세 대지를 우리가 차례대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유전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본문의 끝 부분에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긍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이렇게 들어왔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러한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이 잘못 들어왔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옛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성경을 기록한 모세나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가르치심과 모세나 선지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을 대조시키지는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위에 있는 17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치심은 언제나 성경 말씀과 일치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기록되어진 성경 말씀을 인용하실 때 언제나 이런 표현을 쓰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모세는 ∼이라고 말하였거니와," 또는 "이사야가 너희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등입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실 때는 성경 말씀을 기록한 사람의 이름을 반드시 언급하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성경 말씀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옛 사람"은 율법을 기록한 모세나, 선지서를 기록한 선지자들은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지키고 있는 유전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옛 사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유전을 전해준 조상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일부는 율법에 기록하고 나머지는 구두로 여호수아에게 전했다. 여호수아는 구두로 모세에게 전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장로들에게 전했다. 장로들은 선지자들에게 전하고 또 선지자들은 회당에서 가르치는 자들에게 전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유전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동일하게 권위 있는 말씀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유전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유전이 무엇입니까? 21절 말씀을 보십시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6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출애굽기 20장이나 신명기 5장을 보면 6계명이 나옵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 뒤에 다른 말씀이 덧붙여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유전에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 뒤에 임의대로 무슨 말씀을 덧붙였습니까?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이 말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그들은 임의대로 이 말을 덧붙임으로서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잘못을 범했습니다.

첫째, 그들은 "누구든지 살인하면"이라는 이 말을 덧붙임으로 인해서 살인을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국한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사람을 죽인 적이 없기 때문에 살인죄와는 전혀 무관하게 생각했습니다. 과연 사람을 직접 죽이지만 않으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까? 다윗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일을 감추기 위해서 우리아를 전쟁터 최일선에 보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우리아의 몸에는 전혀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살인죄를 면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삼하12:9의 말씀입니다.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다윗이 살인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자기들 손으로 못박은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살인죄를 면할 수가 있습니까? 행7:52에 보면 하나님은 스데반의 입을 통해서 바로 그들이 살인한 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유전에 따라서 살인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와 결과에만 치중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자기들의 유전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살인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약화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선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원문에 의하면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각 성마다 장로들 7명으로 구성된 재판소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지방법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살인하지 말아야 합니까?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순종할 뿐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유전에 따라서 살인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 아니하기 위한 것처럼 약화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면 죄가 없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풋볼 흑인스타 O. J. 심슨은 그의 백인 전처와 전처의 정부를 죽였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는 그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돈이 워낙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재산을 다 털어서 좋은 변호사들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살인사건을 마치 흑백간의 인종차별 문제인 것처럼 끌고 갔습니다. 결국 그는 법정에서 배심원들에 의해서 무죄평결을 받았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가 법정에서 무죄 판결이 났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도 죄가 없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유전에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참뜻을 흐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둘째로, "살인치 말라"는 계명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22절 말씀을 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유전을 중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을 가르칠 때 "옛 사람에게 말한 바," 또는 "랍비 ○○○는 우리에게 이르기를" 등의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십니다. 우리가 요1:1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모세에게도 말씀을 주셨고 또 선지자들에게도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계명의 참된 뜻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권세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끝났을 때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던 백성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마7:28-29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아무튼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로 오늘 본문 마5:22에서 살인의 예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첫째,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체를 이미 살인한 것으로 보셨습니다. 그러니까 결과만 중시한 것이 아니고 마음의 동기까지도 예수님은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인이 사람의 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살인한 것입니다.
어떤 저명한 의과대학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사람의 분노와 그 사람의 수명과의 관계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분노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독약과 같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다."
그는 자기의 연구 논문을 의사협회에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자기의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새까만 젊은 후배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의 논문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했습니다. 의과대학 교수는 너무 분했습니다. 그는 그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심장에 발작을 일으켜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의과대학 교수는 사람의 분노가 목숨을 빼앗아 간다는 사실을 자기 스스로 생생하게 입증한 것입니다. 분노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일3:15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형제를 미워하는 자체가 이미 살인하는 것입니다. 노하지 마십시다. 그러면 자기 자신도 죽이는 결과가 되고, 다른 사람도 죽이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대로 심판은 법정에서의 재판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노하는 것 자체를 살인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둘째,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입니다. 여기서 라가라는 말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아주 쉽게 사용하던 하나의 욕설이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등신"이나 "바보"였습니다. 우리말의 바보는 밥보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밥이나 축내는 쓸모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말로서 형제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 자체도 이미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루는 어떤 젊은 랍비가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위대한 스승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길 가던 어떤 어린 아이 하나가 그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아이를 보니까 너무 추하고 지저분해 보였습니다. 젊은 랍비는 밥맛이라도 떨어진다는 듯이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너, 라가야."
그 젊은 랍비는 그 아이를 "라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 젊은 랍비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너 왜 그렇게 추하게 생겼느냐? 너희 집 사람들도 다 그렇게 추하냐?"
그때 그 어린 아이는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글쎄요. 저도 제가 왜 이렇게 추하게 생겼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시고 싶으시면 저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 가서 왜 저를 이렇게 추하게 만드셨는지 물어봐 주세요."

말로 상대방의 인격을 짓밟고 무시하는 것은 그를 만드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공회는 오늘날의 대법원과 같은 것입니다. 최고의 권력 기관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도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사도들도 공회에서 심문을 받고, 공회 앞에서 채찍을 맞았습니다. 또 스데반 집사를 죽였던 것도 역시 공회였습니다.
셋째,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서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은 저주하는 것입니다. 정죄하는 것입니다. 시14:1의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향해서 "미련한 놈," 또는 "어리석은 놈"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너에게는 하나님이 없으니까 죽어서 지옥이나 가라." 이러한 저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 대해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지옥 불에 자기가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하는 비판으로 인해서 오히려 자기가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살인의 예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형제에게 노하는 것은 살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둘째,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것도 역시 살인입니다. 공회에 잡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셋째, 형제를 대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면서 저주하고 정죄하는 것도 역시 살인입니다. 그런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뜻하고자 하시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어떤 죄가 더 크고, 어떤 죄가 더 큰 벌을 받을 것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깨뜨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은 살인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 마음 속에는 미움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또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원수처럼 생각하면서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창기들을 죄인시하면서 얼마나 무시했습니까? 또 그들은 다른 사람을 쉽게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고서 돌로 쳐죽이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신 예수님마저도 그들은 정죄했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살인하지 않은 자라고, 계명을 잘 지키는 자라고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의 외식적인 의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우리도 다 살인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는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애통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것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 그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살인치 말라"는 계명의 근본 취지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이 서로 서로 화목하게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예를 들어서 이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예는 23-24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여기 한 쪽 켠에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 다른 쪽 편에는 형제와 화목한 일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우선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까? 형제와 화목하는 일을 먼저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형제와 화목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그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아우 아벨과 화목하지 못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자기가 드렸던 예물이 화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형제와 화목되지 않는 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물을 드리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전문가들이었습니다. 마23:23에 기록된 대로 그들은 조상의 유전에 따라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은 박하의 잎을 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잎을 낱낱이 다 세었습니다. 회향과 근채의 씨앗을 채취했습니다. 그리고는 씨앗의 수를 일일이 다 세었습니다. 그들은 그 가운데서 십의 일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렇듯 그들은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일에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무엇이라고 질책하셨습니까?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들은 인(仁), 곧 형제 화목을 버렸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더 중요한 것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둘째 예는 25-26절입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여기서 호리라는 말은 호와 리가 합한 말입니다. 본시 자나 저울에 가장 작은 눈금이 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위에 있는 눈금이 리입니다. 원문에는 고드란테스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로마시대에 사용하던 화폐의 가장 작은 단위가 고드란테스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마지막 동전 한 닢"입니다. 마지막 동전 한 닢까지도 갚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일은 뒤로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이 있으면 즉시 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약4:14의 말씀입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불행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늘 자기들이 의롭다고 생각하니까 회개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그대로 가지고 영원한 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 서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형제에게 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을 품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늘 깨우쳐주시고 회개하게 하시니까, 해가 지도록 우리는 분을 품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입에 파수꾼을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우리보다 낫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발을 씻기시면서 우리를 섬겨 주셨듯이, 우리도 서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비록 형제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면서 살아갑니다. 누가 우리를 핍박해도 우리는 그들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축복합니다. 우리는 결코 악에게 지지 않고, 언제나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로 화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늘 화목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루는 어떤 스승이 자기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얘들아, 태초에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느니라. 하나님은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낮과 밤을 쉽게 구분할 수 있겠느냐?"
한 제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제 생각에는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쉽게 구분이 될 때는 낮이고, 그렇지 못할 때는 밤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스승은 빙그레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가 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등불이 없어도 쉽게 돌아다닐 수 있을 때는 낮이고, 등불을 켜야만 돌아다닐 수 있다면 그때는 밤일 것 같습니다."
스승은 그 말을 듣고서도 그저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스승님, 그러면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제야 스승은 입을 열어서 귀한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다 옳은 대답을 했지만 나는 거기에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네. 지금 내 곁에 누구이든지 간에, 그 사람은 분명히 친구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지금 낮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고, 그 사람이 나의 친구인지 원수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밤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일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낮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밤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빛의 자녀들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낮의 삶을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늘 빛 가운데로 행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서 위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한 삶을 살아가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바라기는 나와 너와의 화목이 우리만의 화목이 아니고, 장막터를 넓히듯이 우리의 화목이 계속해서 번져 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세대간에도 화목이 되고, 동서간에도 화목이 되고, 남과 북도 화목하고, 북한과 미국도 화목하고, 미국과 이라크도 화목하고, 전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더 화목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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