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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동행한 사람 / 히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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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이 동행한 사람
본문 : 히브리서 11:5-6
설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어떤 결혼식장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결혼식 시작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 신랑 가족석은 아직도 썰렁합니다. 하객들이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결혼식에는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합니다. 시간이 되어 결혼식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신랑의 가족들은 보이지 않고 신랑 측에는 친구 몇 명만 앉아 있습니다. 신랑 입장 후 신부가 입장했습니다. 결국 신랑 가족들과 친지들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주례 선생님의 주례사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신랑이 신부를 향해 주례사를 수화로 통역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주례 선생님이 주례를 잠깐 멈추고 하객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반자를 보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신랑의 가족들이 참석하지 않은 이유와 신랑이 신부에게 수화로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객들은 모두 일어서서 신랑과 신부의 앞날을 축복하며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는 신랑 가족들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장애를 가진 사람과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또 그 어려운 일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자녀가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신랑 가족들의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과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같은 길을 가되 비슷한 속도로 눈높이를 맞춰 걸어야만 동행할 수 있습니다. 거짓된 사랑이 아닌 진실한 사랑, 끊임없는 교제와 나눔이 바탕이 된 신뢰가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별한 인내와 섬김을 겸비하고 있다하더라도 장애를 가진 사람과 사는 일은 어렵습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신부에게 수화로 말해주던 신랑은 단순히 신부에게 의사를 전달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신부를 향한 속 깊은 배려와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하객들에게 감동이 되어 환호하며 박수친 것입니다.

이 이야기와 함께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려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했기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올라간 사람, 에녹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계속 제 마음에 떠오르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을까 아니면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셨을까?’

저의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봤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애쓰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 위해 노력한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편한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여 주님과 멀어지는 방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당신과 동행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끄신 분은 하나님 이셨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며 성경을 다시 읽어보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셨습니다. 비슷한 문장이지요? 단지 주어가 바뀌었을 뿐이지만 의미상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셨다는 관점은, 당신과 동행하도록 에녹을 도우셨던 도움의 손길을 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만 있으면 마음의 원하는 대로 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 본성입니다. 다 알지도 못하고 온전히 행하지도 못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자,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우리를 주님은 왜 포기하지 않으시고 당신 곁에 두시려 하실까요? 만약 주님의 노력과 인도하심이 없었더라면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인생의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영적 장애인은 아닙니까?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지 않습니까? 간직해야할 것은 간직하지 못하고 간직하지 말아야할 생각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우리를 붙들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만드신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영적 장애인과 같은 우리들을 당신과 동행하도록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도해가실까요? 어떻게 에녹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만드셨습니까?

첫째, 세상으로 향하는 에녹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므로 하나님 곁에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뜻이 같지 않으면 동행할 수 없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아모스 3장 3절에서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떻게 동행하겠으며”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그 뜻에 순종해야만 동행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유다서 14절~15절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을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에서 당시 사람들이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행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녹을 예언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란 앞에 될 일을 알아서 미리 이야기 해주는 사람도 예언자이지만, 더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삶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잘못된 삶의 방향을 바른길로 안내합니다. 에녹이 예언자였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점은, 하나님께서 에녹이 곁길로 가려고 할 때마다 당신의 뜻을 계속해서 알리시며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33장 3절 말씀을 보면 출애굽 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계획과 뜻대로 인도해 가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 함께 올라가지 아니 하려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도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그들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오늘 내 뜻대로 내 길을 갈 때 하나님은 동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3장,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변화되겠다는 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 앞에 그들은 절망하여 고향땅 엠마오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의 얼굴빛은 슬픔의 빛이었고, 그들 대화의 주제는 죽음이었고, 그들의 인생은 중심부에서부터 주변부로 점점 밀려나는 걸음이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중심부에서 멀어지는 슬픔, 절망에 가득 찬 사람들과 동행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동행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와 죽으심의 의미, 구약의 예언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가르쳐주십니다. 그 때에야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들 대화의 주제는 부활로 바뀌었습니다. 얼굴빛은 희망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희망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다시 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실 때만이 우리는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주님 뜻을 계속해서 알려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우리를 주장하게 됩니다.

또한 주님이 당신의 뜻과 계획을 계속해서 알리시며 우리와 동행하시고자 하는 이유는,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은 길을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광야 길을 걸어갈 때도 주님과 동행했기에 가야 할 곳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 주님과 동행하지 않았을 때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있었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길은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누군가 우리 삶을 인도해 주지 않으면 늘 슬픔과 어려움만 있을 것입니다. 에녹은 자기 길을 가기 원했지만, 주님께서 찾아 가셔서 매순간 당신의 뜻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 중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고통과 아픔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님의 뜻을 알려 주시기 위한 신호는 아닐까요? 내 삶 속에 풀리지 않고 있는 문제,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문제 가운데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해야합니다. 이면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훗날에 올 위장된 하나님의 축복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멸망의 길을 가는 나를 쳐서 때로는 고통스럽고 아프게도 하시지만, 동행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그 분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음을 고백합시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주께로부터 멀어지지 않기를 권면하십니다. 당신의 뜻에 동참하여 동행하기를 원하셔서 영적 장애인인 우리를 끝까지 참으시는 주님 앞에 귀를 여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에녹에게 알려 주심으로 당신과 동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창세기 5장 21절~23절 “에녹은 65세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나은 후에 3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나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 하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책 중에 뉴우베리(Newberry)라고 하는 신학자의 신학 해석이 나옵니다.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므두셀라’는 ‘창을 던지는 자’란 뜻입니다. 옛날 고대 부족끼리 서로 싸울 때면, 그 마을에서 창을 가장 잘 던지는 사람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행해 창을 던져 물리쳤다 합니다. 그래서 창을 던지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면 그 마을은 곧 함락되고 불에 타 없어졌기에 므두셀라라는 이름에는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는 의미가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므두셀라를 낳고 난 이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메세지를 아들의 출생을 통해 듣고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켰습니다. 심판의 소식을 들은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습니다. 죽음 후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은 부담스러운 소식일수 밖에 없었기에, 사랑하는 자녀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영원한 형벌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주님 안에서 자녀를 길렀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이 므두셀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오래 살지 않았는데 므두셀라만 유독 오래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므두셀라가 죽던 해에 노아의 홍수가 시작됩니다. 므두셀라의 나이가 많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오래 참으심으로 유보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사람들이 진실로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렇게 마음대로 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신앙 속에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어도 흥청망청 쓰지 못합니다. 젊음이 있다고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다 가합니다. 그러나 유익되지 못한 것은 절제합니다. 우리 인생 속에 심판이 있음을 믿습니까?

요즘 새로 지은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에 다 몰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을 관리실에서 다 보고 있습니다. 카메라가 없으면 사실 머리도 긁고 코도 후비고 하겠지만 남이 보고 있기 때문에 경건한 척 서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 내 행동과 말을 조심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6~37절 말씀을 새 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심판 날에 말한 온갖 쓸데없는 말을 해명해야할 것이다. 너는 네가 한 말로 무죄 선고를 받기도 하고 유죄 선고를 받기도 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주님께서 오셔서 심판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왼편에는 염소와 같은 신자 오른편에는 양과 같은 신자를 세우고 왼편을 향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벗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오지 않았다. 너희들은 이 땅에 있을 때에 너희들 마음대로 살았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사람에게는 영생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영벌에 처해지는 심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이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집을 팔고 차도 팔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팔고 헌금하면 구원을 얻을까요?” 물었더니 아이들이 “아니요” “그렇다면 모든 일을 그만두고 교회에 와서 청소하고 유리창 닦고 하면 구원 받을까요?” 했더니 “아니요”라고 대답합니다. 결국 해주고 싶은 말을 하기위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질문하니 “한 아이가 선생님이 먼저 죽어야 되요.”하더랍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먼저 죽습니다. 시간은 시간 안에 살던 우리를 심판합니다. 살면서 술 많이 마시고 과로하고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고통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잘못 사용한데 대한 결과를 책임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 가지고 있는 ‘심판성’ 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심판이 있다면 하나님 보좌 앞입니다.

오늘 내가 믿고 있는 복음 속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곁을 쉽게 떠나지 못합니다. 돌이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바꾸어 나갑니다. 특별하게 주신 부요함과 건강함이 있다면 마음대로 흥청망청 쓰지 못합니다. 나만 위해 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것은 나중에 특별하게 찾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에녹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그를 격려하셨습니다.

5절 말씀 후반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라고 나옵니다. 원래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라는 단어가 70인 역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번역됐다고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격려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증거로 받는다면 그보다 더 큰 격려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에녹아 네가 나를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내가 알고 있다. 나 역시 너를 기억하고 네게 응답하겠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격려하시되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며 도우십니다. 요셉이 어떻게 그 어려운 일들을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요? 요셉은 부모와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요셉은 그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고,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노예, 죄수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인정받고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노예였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하는 증거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며 넘어지지 않습니다. 감옥에서도 노예의 신분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전락했지만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고난 가운데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나를 알고 계시고 나를 보고 계시고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신 하나님께서 인도 하신다는 사실에 그의 인생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희망이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교회를 개척하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교회 내부를 들여다보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개척을 하면서 보니 모함도 있고 오해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괴로워서 우시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렇게 괴로운 예수를 왜 믿을까?’ 본인이 개척하셨다는 이유로 교회를 떠나지도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옛날 부흥회 다니는 것이 유행처럼 있을 때, 부흥회가 끝나면 강사님 방에 몰려가서  기도 받는 것이 의례히 다음 순서였습니다. 함께한 집사님들이 기도를 받고 나서 어머님 차례가 되었습니다. 손을 얹고 기도하려는데 가만히 있다가 강사 목사님이 “딸아, 교회의 시험과 어려움을 내가 알고 있다. 낙심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하시더랍니다. 그 때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하셨습니다. 함께 있었던 집사님들도 그 곳에서 회개하셨다 합니다. 그 다음부터 어머니께서는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어도 담대해지셨습니다. 주님과 더 가까워지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격려 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격려하지 않으셨더라면 인생의 고비를 잘 넘어올 수 있었을까요? 또한 지금 넘지 못할 고비 앞에 고전하는 분이 있습니까? 주님은 그런 여러분을 격려하고 주님 곁으로 가까이 이끄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너는 내 것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고아와 과부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겠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권면이 가득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 있어 최대 격려는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먼저 고난과 고초를 겪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를 능히 도우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받은 고통 육체의 질병 마음의 아픔과 외로움, 고독을 주님이 먼저 겪으셨습니다. 이것을 먼저 겪으신 주님이 내가 너를 도우리라는 약속을 하시며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신 사랑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 때문에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0장 27절 말씀을 보면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스라엘이 가장 어려울 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주님과 동행하도록 이끄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떠나는 것은 곧 방황이고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고난을 통해서, 때로는 격려하시면서 한편으로는 심판이 있을 것을 분명히 일깨워 주심으로 우리 삶을 주께로 가까이 하게 하십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신부에게 수화로 의사와 생각을 전하는 신랑의 모습 속에서 듣지 못하는 우리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동행하시며 인도해 가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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