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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관심을 따르라 / 롬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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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의 관심을 따르라
본문 : 로마서 14 : 1-8 
설교 : 황광민 목사


어떤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손들엇!" 강도는 집주인에게 손을 들라고 하면서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왼손만 들었습니다. 강도는 오른손도 들라고 소리쳤습니다. 주인은 찌푸리면서 말했습니다."오른팔은 신경통 때문에 들 수 없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신경통이요? 사실은 나도 신경통이 있는데... 얼마나 아프십니까?"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신경통 이야기로 화제의 꽃을 피웠습니다. 강도는 자기가 강도인 것도 잊어버리고 주인도 상대방이 강도인 것도 잊어버리고 신경통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 헨리(O. Henry)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아픔을 나눌 때 강도와 주인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서로 나눌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함께 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아픔도 함께 하면 큰 위로가 됩니다. "고통은 함께 나누면 절반이 되고 기쁨은 함께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함께 나누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동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을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뜻이 다소 변질되었습니다.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고통을 함께 느끼고 더불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백성들을 동정하셨습니다. 죄인들과 창녀들, 목자 없는 양떼들을 보시며 동정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아파하셨고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만 회복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말은 없을 것입니다.

'공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상담학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이 말을 전도에 응용하였습니다. 전도할 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우선 공감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 믿는 사람 사기꾼들만 많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을 잘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다고 인정해 주라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해야 소용이 없지요, 우선은 그 말을 인정해주고 "그래도 예수 믿어야 구원받습니다."라고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좋은 것은 뜻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뜻이 같은 사람들은 쉽게 하나가 됩니다. 노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은 노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운동 좋아하는 사람들은 운동 좋아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립니다. 관심이 같으면 곧 친구가 됩니다. 부부도 관심이 같으면 잘 지냅니다. 뜻이 같은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과 관심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관심사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달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관심을 따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관심은 포용입니다.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아멘. 하나님은 서로 비판하지 말고 포용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백성들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비판하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용납하셨습니다. 찬송가에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부족하니까, 걱정되니까 있는 그대로 용납해 달라는 기도의 찬송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주께로 돌아오는 자는 조금도 비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초대교회 교인들도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에는 고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짐승을 잡을 때 우상의 제단에 바치고 잡았습니다. 시중에 나도는 고기가 거의 우상의 제물인 셈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사먹을 수도 없고 안 사먹을 수도 없는 것이 성도들의 고민이었습니다. 또 개중에는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 짐승의 고기가 싸구려로 유통되었다고 합니다. 일반인들은 그런 것을 사먹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것입니다. 이런 문제로 성도들 사이에 비판이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먹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이 없다는 믿음으로 고기는 고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주신 식물이라고 생각하고 먹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우상의 제물이기 때문에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없다는 믿음에서 였습니다.

그런데 두 그룹 사이에는 갈등이 생겼습니다. 두 그룹이 모두 믿음으로 시작하였으나 생각은 달랐습니다. 먹을 수 있다는 사람은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약하다고 비판했습니다. 또한 먹지 않는 사람들은 먹는 사람들을 향해 불신앙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두 그룹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논쟁은 끝없는 비난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서로 용납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떻게 용납합니까? 용납의 기준은 하나님의 용납입니다. 하나님은 믿기만 하면 자녀로 용납하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까지 용납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믿기만 하면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용납하십니다. 바울은 이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널리 포용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널리 포용해야 합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비판하지 말고 널리 포용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관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아멘. 최종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판단을 주께 맡기고 하나님의 관심대로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일이 주제넘은 행동인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세우는 일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끌어내리는 일에 애쓰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세우시고자 하나 우리가 끌어내리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받는데 걸림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특히 무엇이나 먹을 수 있다는 믿음 좋은 사람들이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들의 믿음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여 상처를 입히면 이는 큰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고 하셨습니다(마태18:6).

술, 담배를 잘하면서 믿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음식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이나 간섭하시는 째째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들은 대단한 하나님을 믿고 우리는 째째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 옛날 우상의 제물이 된 고기를 먹으면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던 사람들과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믿음 좋다는 생각으로 믿음 연약한 자들에게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술, 담배 하는 것을 보면 믿음 약한 사람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우려고 애쓰시는 사람들을 쓰러뜨리게 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부지불식간에 소자를 실족시켜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일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세우는 일에 힘쓰십시다. 말 한마디를 조심하십시다.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모릅니다. 나의 말 한마디가 구원의 길을 막을 수 있습니다. 나의 행동 하나가 천국 문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우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허물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조심하십시다. 오직 세우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관심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7-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런즉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아멘.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에 주일에 관한 논쟁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일은 특별한 날이므로 다른 날과 달리 특별하게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주일날과 다른 날도 똑같이 중요하므로 모든 날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기를 먹어야 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의 논쟁과 같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제3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주일은 거룩한 날이므로 다른 날과 달리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옳습니다. 또 다른 날들도 주일과 같이 거룩한 날이므로 모든 날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도 옳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중심이요 기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기본만 되어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어떤 동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동네에 유명한 소몰이 영감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영감님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소문이 나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그 영감님은 성격이 괴팍하여 소를 몰 때면 동네가 시끄럽도록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욕을 퍼붓고 채찍을 휘두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동네 사람들이 모두 신기해하였습니다.

다음 날이었습니다. 영감님이 소를 몰려고 나와보니 동네 사람이 모두 나왔습니다. 소몰이 영감이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영감님은 눈치챘습니다. 영감님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품위 있게 소를 몰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전의 포악한 모습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소들에게 점잖게,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자, 일어나거라, 이제 가자." 그러나 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큰 소리로 욕을 퍼붓고 회초리를 휘두르며 다루던 소들인지라 부드러운 말을 듣고 일어날 리가 없었습니다. 영감님은 긴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했는데 다시 소리를 지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다시 한번 불러보았습니다. "자, 가자, 일어나거라" 그러나 소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영감님은 다급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사정을 살펴주십시오." 그때 영감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중에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회초리를 휘둘러 "탁"소리를 내고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소들이 기겁을 하고 일어섰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동네 사람들은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참았던 영감님이 승리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복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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