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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회자를 위한 기도 / 히 13:18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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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히브리서13:18-19 
제목 : 목회자를 위한 기도
설교 :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을 출발하기 위해서 이 자리를 찾으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지난주일 우리는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리더십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워가기 위해서 새로운 목표만 아니라 새로운 질서가 꼭 필요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이 그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들이 존경 받을 만한 것은 성도들을 위해서 깨어서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영적 형편에 대해서 자신이 계산할 자인 것처럼 책임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인도하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순종하십시오.

본문은 사역자를 향한 또 하나의 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에는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할 의무를 말한 다음 18절, 19절에서는 지도자들을 위한 기도의 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깨어서 수고하는 사역자들을 여러분이 기도의 자리에서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사도는 왜 요청하고 있을까요? 몇 가지 상식적인 이유를 먼저 살펴봅시다. 무엇 때문에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까? 사역자가 성도들을 위해서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들으면 누구나 수긍이 가는 이야기인데 왜 성도들이 사역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까?

그것은 지도자 역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무지하고 연약하고 실수하는 사람들이기에 갑절의 영감을, 성령을 주시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어떤 때는 일부 그룹의 사람들은 이쪽으로 가야 된다 그러고 일부 그룹의 사람들은 저쪽으로 가야 된다고 그러는데 나는 어떤 쪽이 가야 될 길인지 모르니까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제가 좀 더 똑똑하면 확실한 방향을 잡으면 되는데 의견 일치를 못 봐서 이리가자 저리가자 그러는데 저는 어느 쪽으로 가야 좋을지를 모르니까 얼마나 자신이 무지한 것인지 한탄스러운지 모릅니다. 꼭 같은 사람들이요 연약한 사람들이며 실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중보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연약하고 실수 있는 사람들을 여러분 가운데 지도자로 세웠을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갑절이나 주셔야 그 직무를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응답으로 갑절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고는 이 직무를 제대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사역자들은 어떤 성도들보다 치열한 사탄의 공격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은 공격의 최첨단에 서 있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에 활로 쏠 때나 지금 총으로 쏠 때든지 여러분 전장에서는 리더를 쓰러뜨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나머지를 와해시키는 것은 쉽기 때문입니다. 지도적 위치의 첫 번째 자리에 있는 목회자가 영적 침체에 빠져들면 그 영향이 온 교회에 미치기에 사탄은 언제나 다른 누구보다 그를 공격하기 좋아합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의 도움 없이는 사역자들도 쉽게 실망하거나 낙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임무이자 특권이기도 합니다. 매일 은혜의 보좌로부터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도록 우리 사역자들을 위해 꼭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들의 영혼이 원기를 회복할 때 그 유익은 바로 기도드린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도움으로 우리 사역자의 영혼이 은혜 가운데 있게 되면 기도한 공동체 전체에 유익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처럼 기도의 유익은 공동체 전부의 삶의 터전 위에 내리게 될 것입니다.

사역자들이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여자, 돈, 명예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특히 게으름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일에 끌려가는 대신에 일을 능동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를 쓴 사도가 형제들의 기도의 요청을 했다면 우리 같은 보통 사역자들은 기도의 지원이 얼마나 더 절실하게 필요하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의 기도의 지원이 계속되면 우리 같은 사역자들도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일꾼들이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기도 해 왔기 때문에 오늘 여기까지 울산교회가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여러분이 저희들을 위해서 기도해 오기 때문에 교회가 안정 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힘을 합해서 기도하게 되면 교회는 안정된 기반 위에서 더 힘 있는 성장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누가 썼느냐하는 것은 아직까지 이천년이 넘도록 논란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마는 저는 개인적으로 저자가 사도 바울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와 같은 기도의 요청을 보면 그런 확신이 강하게 듭니다.

바울 말고는 신약의 어떤 사도도 이와 같은 기도의 요청을 하는 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적어도 여섯 번 이상, 여기까지 포함하면 일곱 번 이상 교회를 향해서기도의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역자를 위한 기도의 의무는 소홀히 되기 쉬운 부분에 속합니다. 목회자들의 사역을 성경은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4장 15절은 목회자의 사역을 아버지의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동시에 데살로니가 전서 2 장 7절은 유모의 사역,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돌봄의 사역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목회자의 사역을 인도자, 상담자, 양육자의 사역에 비교하기도 합니다. 그 직무로 인해서 사랑 안에서 매우 귀히 여기라고 성경은 사역자에 대한 일반 성도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를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하나의 방법은 바로 믿음과 사랑의 팔을 들어 은혜의 보좌에 간절히 도고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더욱 자주간절히 사역자들을 위해서 빌 때 사역자들을 통한 더욱 풍성한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속에는 이 편지를 쓴 사도의 확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고 한 것을 보면 그런 기도가 있어야 만이 사역을 제대로 감당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그는 가지고 있습니다. 사역자로서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능력과 축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는 확신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공급해 주신다는 확신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모든 능력과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믿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더욱 열심히 기도해주십시오. 우리가 누리는 영적 유익은 다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기도만이 이 축복을 얻는 수단입니다. 성도들의 기도야 말로 성도들 자신에게 미칠 영적인 유익을 얻어내는 방편임을 알기에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울산 교회 성도 여러분, 사역자들로서 우리들은 여러분의 기도의 도움으로만 지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역자 자신의 경견과 열심에 맡기지 아니하시고 여러분의 기도의 지원을 통해 모든 영적 축복과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기도해 왔기 때문에 저희와 같은 부족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서 이만큼 나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어떤 성도가 고백하듯이 “목사님 저는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혹 잊어버릴 수 있지마는 목사님을 위해서는 기도하는 것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누가 그랬는지 이름은 기억하지는 못 합니다 마는 저는 생각할 때 그런 성도들의 기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이 귀한 사역을 수종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서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깨어 기도하도록 사역자들에게 요청하듯이 여러분도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로 도우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서로 의존하도록 아무도 교만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서로 돕지 아니하면 아무도 홀로는설 수 없도록 하나님이 설계하셨습니다.

지도자를 위한 기도의 지원에 대한 전형적인 사례는 모세의 경우입니다. 백성들의 기도의 지원이 얼마나 능력이 있었는지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종자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들 들어서 올릴 때는 이스라엘이 싸움에서 우세했고 내려가면 그들이 약해졌습니다.

그 기록을 출애굽기 17장 11절부터 읽어 봅시다.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출발은 잘했지만 아름다운 결실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성도들의 기도의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지원요청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모든 성도들 역시 ‘우리 목사님은 혼자 능히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실패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역자는 성도들에게 의존하고, 성도들은 사역자의 도움을 받아서 나갈 수 있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사역자는 여러분의 기도의 지원을 받을 때에 제대로 설교할 수 있도록 그래서 여러분을 섬기실수 있도록 하셨고 여러분은 사역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영적으로 강건해 질수 있도록 하나님이 의도 하셨습니다. 양쪽이 서로 도와야 만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어느 한쪽도 다른 쪽 없이는 설수 없도록 교만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목사나 강도사나 전도사나 장로나 집사나 권사나 할 것 없이 기도의 지원 없이는 아무도 그 직무를 제대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확신했기에 기회 있을 때마다 간절히 기도 요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도움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이 영적인 은혜를 성도들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사도 보다 훨씬 많은 사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리고 간절히 곳곳에 기도 요청을 하고 있읍니다. 아니 그의 많은 성취와 탁월한 은혜의 사역이 기도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바른 순서일수도 있습니다.

지금껏 우리는 사역자를 위해서 왜 기도해야 하는 지 상식적인 이유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인 이유 말고도 본문은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둘째로 본문이 말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살펴봅시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왜 사역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역자가 가진 선한 양심은 그로 하여금 주저 없이 형제들의 기도 요청을 하게 합니다.

자신이 선한 양심이 있는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자기는 양심적이라고 말들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여러분들이 선한 양심을 정말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여러분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나는 누구를 향해서도 선하게 행하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향해서도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 축복된 상태에 나가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선한 양심을 가진 것입니다. 누구를 대해서 무슨 일에도 다 좋아 지기를 바라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사람을 대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선한 양심을 가진 것입니다.‘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라’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예요.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를 바라볼 때도 돕고 싶고 그가 잘되기를 바라고 그가 잘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함께 하고 싶은 심정이 있으면 여러분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자기 안에 맡은 일을 신실하게 해가고 싶은 거룩한 욕망이 있음을 볼 때 선한 양심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누구를 행해서도, 그리고 무슨 일에 대해서도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양심적으로 생각해 불 때에 여러분은 모두의 선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저는 나이가 들면서 갖는 유익과 축복이 이전보다 사람들을 훨씬 더 관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면서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축복하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이 나이와 함께 얻게 된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작년 말에 손녀 돌잔치를 했으니까 저도 이제 할아버지 반열에 들어섰지 않았습니까? 할아버지가 할 일은 복을 빌고 기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젊었을 때는 모든 교인들에게 마지막 축도를 하시는 분들을 보면 늘 연세가 드신 분들이더라고요. 그래서 축도 군번 되면 인생 끝난다고 서글픈 이해를 했습니다만 이제는 왜 연세가 드신 분들에게 축도를 맡기는지 긍정적인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노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랑선교회 회원 여러분, 나이는 젊었을 때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합니다. 나이와 함께 우리는 이전에 관심을 갖지 못하던 일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이전에 해낼 수 없었던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지혜를 얻게 합니다.

결코 삶의 일선에서 밀려나고 있다고 섭섭한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연세가 들어갈 수록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는 수단중의 하나가 섭섭하게 하는 마음, 섭섭마귀라고 그러죠 누가. 사실 섭섭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자식들이 하는 것도 섭섭하고, 교회에서 젊은 사람들만 일하는 것도 섭섭하고. 그 마귀의 유혹을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다른 어떤 사람이 할 수 없는 귀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계층보다도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여러분의 몫으로 남아있습니다.젊은이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이 여러분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나이가 오십대가 넘어가면 젊은 사람들 볼 때 마다 그렇게 예쁘다 그러더라고요. 저희 집사람이 갓 결혼한 부부들 보고 예쁘다고 그러면 제가 그러지 마라고 그럽니다. 그건 당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표내는 거라고. 나이가 많아지면 아이들이 귀여워서 어쩔줄을 모릅니다. 인물이 예쁘던지, 코가 있던지 없던지 상관이 없어요. 그냥 대책없이 좋아지면 곧 나이가 든겁니다. 그러나 그때에 그런 우리의 자연적인 심성을 가지고 사람들을 축복하고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면 나이 드는 것을 우리는 결코 서글프게 여길 이유가 없습니다.

사심 없는 선한 마음, 그것은 중보기도의 토양입니다. 누구를 향해서도, 무엇을 두고도 잘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특권을 행사합시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도 여러분의 마음을 살펴보시고 모든 일에 선을 행하려 하는 선한 양심을 확인하십시오. 선한 양심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우리의 기도의 저력입니다.

지금 히브리서의 저자가 기도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위대한 설교자가 되어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욕심에 끌려서가 아닙니다. 일마다 뜻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소원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기 때문에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했던 것처럼 ‘햇빛을 받는 곳마다 주예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도록’하는 거룩한 소원이 있다는 것 확인하기 때문에 나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선한 양심 가운데 사역하고 있다고 굳이 밝혀야 하는지 그 배경은 무엇일까요? 그냥 기도해 달라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을 굳이 “왜냐하면 내가 모든 일을 선하게 하므로 선한 양심이 있는 것을 나는 확신 한다”고 자기변명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만약 저자가 바울이라면 그 이유를 쉽게 추축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바울에 대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남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달리 탁월한 열심을 가지고 사역을 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 결혼하는 것조차도 포기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이 주는 모든 유익을 누리기를 거부하고 남보다 더 열심히 사역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역자들이 바울 옆에 있으면 편치 않았을지 모릅니다. 바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자기는 훌륭한 사역자, 열심히 일하는 사역자인 줄 알았는데 바울이 일하는 것 보니까 자기는 적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처럼 비교가 되었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는지 모릅니다.

열심 있는 사람은 비난의 표적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사람들이 말들을 만들어서 비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일에 열심이다’ 그렇게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동족 유대인의 배척을 받았으며, 그 결과 나쁜 소문들이 그에게는 늘 따라다녔습니다.

바울의 사역의 결과로 성도들이 든든히 주안에서 서 가고 있었지만‘바울은 아주 조심해야 될 사람’이라는 엉뚱한 소문을 흘리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성도들은 바울에게서 들었던 이 자유의 복음이 과연 진짜 복음인지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가슴을 열듯이 내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 있는 확신을 가지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기도로 지원해 다오’-내 양심 속에 선한 마음이 있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기도의후원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 때문이다. 내가 목회자로서 성공하여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가 아님을 나는 알고 있다.

지금껏 한 일마다 오직 유일한 소원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편만하게 펼쳐지는 것이고 모든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한 것임을 내 양심은 알고 있다. 누가 무슨 말로 험담하고 비난하더라도 내 양심을 두고 밝히노니 모든 일에 선하게 하려함으로 나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자기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아주 간교합니다. 지도자와 평신도 사이에 불화를, 목회자와 일반 성도 사이에 의심을 심어 서로 협력하지 못하도록, 기도로 지원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양쪽을 분리시킨 다음에 하나씩 넘어뜨리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성도들의 기도의 지원을 끊어버리게 되면 목회자는 힘이 없습니다. 목회자는 혼자 설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기도의 지원을 중단하고 목회자를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보기 시작하면 여러분, 설교를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지 못하면 성도들은 기운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럴수록 더 쉽게 지도자를 향해서 비방하는 이런 사탄의 올무에 빠져들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쪽 넘어뜨리고 저쪽 넘어뜨리고 그렇게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쪽이 함께 의지하고 있을 때, 협력하고 있을 때, 기도하고 있을 때 쉽게 넘어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번 들었을 때는 ‘설마 그럴까?’ 하지만 거듭 들으면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고 그것은 급기야 기도로 지원하는 일까지 힘이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안 해보셨어요? 이런 상황 때문에 “우리를 위해 기도해 다오”라는 부탁과 함께, 얼핏 들으면 알기 힘든 “선을 행하려한다”느니 “선한 양심을 가졌다”느니 하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주 이런 상황 속에 처 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런 오해 저런 의심 받았다는 것 생각하면 우리에게 괜히 위로가 됩니다. 그 위대한 사도-모든 말과 행동에 있어서 빼어난 일꾼이 이런 저럼 구설수와 비방을 받았다는 기록을 보면 어쩌다가 우리가 받는 오해들도 견딜 만 해 지기 때문입니다.

착한사람이다 좋은 사도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생각할 때 그는 믿을만한 사람이 못돼, 조심 해야 돼 이런 말들이 그에게는 언제나 따라 다녔습니다. 여러분 이 악한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칭송하면 여러분은 위험한 자리에 있습니다. 뭐든지 다 좋다, 적당하게 문제 없이 , 여러분 그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적당하게 문제없이 살아 갈려고 하면 왜 그리스도인 되셨습니까? 명절에 친척들 만나도 아무 문제 없이 지낼수 있지 않았습니까? 옛날은?우리가 그리스도인 된 것은 바로 살기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그 본래의 의도대로 살기위해서 싸우다 보면 때로는 너희 가운데 칼을 던지러 왔다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처럼 너희 가운데 불이 붙었으면 좋겠다는 주님 말씀처럼 때로는 어쩔 수 없는 불화도 있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여기 울산 시내에 있는 모든 사역자들이 모든 목사들이 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뜨겁게 하나 되어 있다고 하면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역자인 것을 빙자해서 자신의 유익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 혹 있다고 하면 저는 그들과 함께 하나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 하나님의 교회를 알뜰히 돌보고 열심을 다해서 목회자는 사람들은 사랑하고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교인들 하나씩 둘씩 다 없애버리고 건물만 쥐고 있는 이런 사람들, 어떻게 제가 동료 목회자로 인정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들로 부터는 비난 받을 것을 각오하고 삽니다.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 .(고후6:3-10)”

자기를 살필 때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역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담대함을 가지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향하여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내가 하나님 앞에 양심적으로 부끄러움이 없으면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1-22).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담대하여 기도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는 것을 행함이라. 스스로 살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원수의 비방 앞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여러분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온갖 비난을 다 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이 아시지요?’라고 고백할 수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굳건히 설수 있습니다.

바울은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는 목회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 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 밝힙니다.

어떤 때는 사탄이 우리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힐 때도 있습니다. 집중 공격을 할 때는 아무 이유도 없이 모든 일들에 대해서 스스로 불만을 갖게 되고 불평을 하게 됩니다. 마음의 기쁨이 금시 사라지게 되고 순식간에 회오리바람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회복하기가 한결 쉬워지는 것입니다.

일마다 완벽하게 해 내고 싶은 소원은 사도로 하여금 그들의 기도를 요청하게 했습니다. 선을 행하려 하므로-내가 모든 일을 좀 더 잘 하려고 하므로 선한 양심을 가진 열심 있는 사역자들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특히 여러분의 구역장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여러분의 교구를 담당하시는 교구장들을 위해서 여러분 기도의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당회가 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울산에 건설해 가는데 매진해 갈수 있도록 여러분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지난 몇 년 동안에 우리의 실체를 다 봐 오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지원 없으면 어느 때든지 순식간에 어처구니 없이 쓰러질 수 밖에 없는 자들이 바로 저희와 같은 지도자들인 것 꼭 기억해 주십시오.

세 번째로 우리는 사도의 특별한 기도요청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이 서신을 쓴 사도의 특별한 기도 요청이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편지를 보내는 사도는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 하고 아는 사이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들 중에 사역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빨리 돌아가서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상황임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를 받는 성도들의 형편을 생각해 볼 때 그는 하루 속히 돌아가서 바로 붙들어 주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의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마음이 답답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히브리서를 받는 성도들이 어떤 성도들입니까? 그들은 믿음의 용사들 이었습니다.
엄청난 핍박 가운데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 때문에 세상에서 부끄러움 받는 것을 기꺼이 수용했습니다. 아니 재산을 박탈당하는 일들 조차도 그들은 감당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들이 지금은 믿음에서 흔들리고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금 옛날에 양을 잡아서 제사 드렸던 그 제단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제사를 드린 후에 함께 나누어 먹었던 양고기의 입맛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 가셨을 때에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양심이 거듭나고 깨끗하게 된 사실로 인해서 찬송하면서, 세상에 그무엇 보다도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다고 싸우며 나아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월과 함께 신앙의 열정이 식어지니까 유월절, 오순절 절기가 되면 은근히 그때 양 잡아 제사하고 갈라먹었던 양고기가 떠올려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는 그런 분 없습니까? 명절을 당해서 민족고유의 명절을 당해서 친척끼리 모이면 젊었을 때 가문에서, 집안에서 따돌림을 당해서 까지 신앙생활 한다고 출발했는데 지금은 누가 보지 않으면 무슨 과실주라고 권하면 은근히 한잔 해보고 싶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 없습니까? 지금 그런 처지에 이 히브리서 편지를 받던 사람들이 빠져 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통해서 때로는 호된 책망과 질책을 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미워서도 아니고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들의 영적 유익을 위한 일념으로 한 것임이 이 기도의 요청을 통해서 확인 됩니다. 그가 히브리인 성도들을 사랑 안에서 그리고 믿음 안에서 신앙 안에서 한 형제라고 생각하는 점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에게나 기도 부탁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아무에게나 기도 부탁을 합니까? 기도를 신실하게 하리라 여겨지는 이에게 하지 않습니까? 사도는 그들을 주 안에서 동역자라 여기고 사랑하며 기도의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하게 되며 사랑하고 신뢰하는 자에게 부탁을 하게 됩니다. 비록 호된 꾸지람을 하긴 했지만 그들을 무시하거나 싫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사랑 때문에 진리를 말해 주었을 뿐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성도들의 기도의 도움으로 속히 돌아가게 되리라고 믿고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사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오는 길이 열리고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사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뜻 때로 안 되면 실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바울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믿었으나 운명론자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기한이 있음을 믿으면서 동시에 기도로 그 기한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너희 기도로 속히 돌아가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기도의 지원이 있으면 만나보고 싶은 성도들을 빨리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그분은 우리와 대화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간청하면 하나님께서 한발 물러설 수도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그런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이루어 지지만 그 예정을 하신 하나님께서, 그 계획을 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좋은 의미에서 흥정 하실 수 있는, 타협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조카 롯을 위해서 몇 차례 거듭거듭 기도했던 것 여러분 알고 계시죠? 오십명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거기에 다섯명 모자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결국은 의인 열명 수정에 까지 하나님과 밀고 당기고 했던 것을 우리는 읽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주시기 전에 우리로 하여금 필요를 느끼게 하시며 간구하게 하십니다. 필요를 느껴서 간구할 때 응답하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니까 그때사 부스스 일어나서 ‘그래 필요해?’하고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려면 우리로 하여금 필요를 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 하면 ‘그래? 내가 주지’그렇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기도를 드린 우리로 하여금 응답의 기쁨을 맛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당신의 거룩한 역사에 우리로 하여금 참여하는 기쁨을 맛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에스겔 36:37절을 보십시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 70년 정한 기한에는 반드시 회복시키겠다고 하나님이 미리 말씀 하셨어요. 그들이 포로 되어 가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그 연한을 70년 정하셨어요. 그러면 그건 틀림없이 70년되면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이백성이 내게 부르짖어야 할찌니라 하나님이 기도하도록 그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여기 울산 교회를 세우시고 여기에 큰 구원의 방주를 마련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 번 기도에 대해서, 특별히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중에서도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동시에 사역자들을 위한 기도가 교회로 하여금 제 역할을 감당 하는 데는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도자의 지도력이 기도를 통해서 확보되지 아니할 때 그 교회는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모든 교회 성경학자들의 이론들을 다 가지고 여러분 살펴보십시오. 앞에 세운 담임목사의 지도력이 서지 아니할 때 부흥하는 교회 한곳도 없습니다. 지도자의 지도력이 기도를 통해서 세워져 갈 때에 교회는 발전해 갈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 드렸죠? 여러분은 잘 해 오셨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해 오셨기 때문에 이만큼 교회가 안정하게 된 것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의 기도가 이제 진지하게 새롭게 되어지면 우리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교회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 이제는 안정된 기반위에서 일치월장 자라갈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기도로서 합해져야 합니다. 영광스런 축복의 대열에 부름 받은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매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그 엄청난 역사를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이제 열방에 흩어져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돌이키실 이 엄청난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기 때문에 옛일을 기억하지 말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 교회 종탑 7층에 올라가면 탁구장 들어가는 앞에 방에 가면 우리 울산교회가 처음 시작해서 15년 동안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래프가 있습니다. 저는 그 그래프를 볼 때마다 참 감사합니다. 정말로 여느 교회가 성장하듯이 아주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울산에서 제일 성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로 울산교회를 하나님께서 삼아주셨고 여기까지 나아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우리의 업적에 만족하기를 결코 바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기 시작할 때에 울산교회는 명실공히 백만 영혼의 방주가 될 것입니다. 이제는 극동방송 세워져서 좋은 엄호사역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창원에는 5년만에 기독교 인구가 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앞으로의 5년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지도자를 위해서 여러분이 기도하기 시작하면 교회는 새롭게 될 것입니다. 모든 시민들의 영혼의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러면 그 분은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응답해 주시고자 할 때에 언제나 우리 기도를 먼저 요구하십니다. 구주대망 2003년, “찬송, 기도, 전도의 해”를 맞이하여 기도로 비전 5555를 앞당기는새 역사에 동참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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