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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라나는 성도 / 엡 4:14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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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준식 목사 
  에베소서 4장 14절 - 16절 [자라나는 성도]


서울역 노숙자 사역을 하시는 전도사님이 최근에 상담한 내용입니다. 서울역에서 노숙자와 상담을 하고 있던 중에 어떤 30대 중반의 남자가 다가오면서 상담을 요청해 오더라는 것입니다. 이 남자는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경마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수 천 만원의 카드 빚을 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직장에서 눈치가 보여 그만 두고 죽을 궁리만 찾아다닌다 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담의 예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엘리트입니다. 좋은 직장에 다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온전한 어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 합니다. 비록 명석한 두뇌로 일류급 회사에 다니고 능력 있게 일 처리를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사람은 세상의 유행 풍조 가운데 하나인 경마에 자신의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요동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자신이 그 파도에 빠져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와 계속해서 성숙한 성도로 자라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먼저 14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보면 이렇게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우리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자. 그렇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바로 어른이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어린아이의 시기를 거친 사람만이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어린아이의 시기를 거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신 분이 아니십니다.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고 해서 곧 바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해서 곧 바로 선교사로 목사로 사역자로 나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 되고 성숙하고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우리만의 사역을 감당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궤술에 약합니다. 궤술이란 속임수를 말합니다. 야바우 꾼을 말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이런 야바우들의 속임수에 약합니다. 간사한 유혹에 쉽게 넘어 갑니다. 유행 따라 마음이 변덕을 부립니다.

여러분! 야바우 꾼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작년에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어릴 때 서울역 앞에서 본 야바우 꾼들을 거기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공기 안에 주사위를 넣어두고 이리저리 공기를 움직이면서 주사위가 있는 공기를 선택하면 돈을 몇 배로 주는 야바우들이었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먼 발치에서 그들을 관찰을 해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조직적이었습니다. 호객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바람을 잡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경찰이 오나 안 오나 감시하는 사람들이 한 조가 되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거기에 말린 사람에게 지는 척 해 주다가 나중에는 다 돈을 빼앗기게 만드는 전형적인 술법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계획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술법에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빠져 나오려고 하면 협박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거기에 돈을 내건 사람은 그 돈이 다 빼앗길 때까지 그 자리를 벗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야바우 들은 여행 온 사람들의 엔진을 다 망가뜨리고 마는 무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엔진이 망가진 사람은 이제 정처없이 떠돌아 다닐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성숙한 어른이고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유혹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은 어른이었지만 유혹에 약한 어린아이였습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은 어떤 작은 유행에도 지극히 민감한 반응을 하곤 합니다.

교회가 진리 위에 서 있지 않을 때 교회는 세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유행을 따라 가곤 합니다. 그래서 어떤 프로그램이 요즈음 유행인가에 관심을 갖고 유행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해 보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린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린아이들에게는 유혹들이 파도처럼 밀려 올 때 그 유혹에 약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파도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만난 파도가 잔잔한 파도든지 험한 파도든지 반드시 파도를 만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의 특징은 유혹에 약할 뿐만 아니라 그 파도에 겁을 먹고 그 파도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는 특징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기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어려움들이 나에게 다가올 때 혹시 예수님을 믿어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는 거 아닌가 라는 불안함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런 마음이 생길 때 용케도 어두운 세력은 나의 마음을 알고 당신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믿어서 그렇다. 그러니 빨리 예수님을 끊으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소리가 나를 지배하고 내가 거기에 빠지면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엔진이 고장난 사람입니다. 엔진이 파손된 사람입니다. 엔진이 파손되면 모든 문들을 닫아야 합니다. 엔진이 파손된 배는 한 방향을 향해서 가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 배는 표류하기 시작합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엔진이 꺼진 인생은 표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당당히 파도를 타면서 파도를 헤쳐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서운 파도 앞에서도 엔진이 작동되는 사람입니다. 엔진이 작동되는 사람은 문을 눈을 감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지 않습니다. 엔진이 작동 되는 사람은 가고자 하는 목표와 방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와 방향을 가기 위하여 엔진을 작동시킬 뿐만 아니라 인생의 키를 붙잡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인생에서 이긴 사람이고 누가 진 사람입니까? 이기고 지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배의 크기입니까? 큰 배라고 해서 파도를 이길 수 있습니까? 배가 작다고 파도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배의 크기와 파도의 힘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배가 파도를 이기느냐 무너지느냐의 기준은 배에 있는 엔진이 작동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배가 얼마나 크냐 작으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배에 있는 엔진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느냐 작동하지 못하느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큰 배라 할지라도 엔진이 작동하지 않으면 배는 방향을 잡지 못합니다. 표류합니다. 표류하다가 암초에 부딪쳐 파손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배라 할지라도 엔진이 작동하면 파도 앞에서 갈 길을 알 수 있습니다. 표류하지 않습니다. 암초에 부딪치려고 하면 레이더가 신호를 보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사람을 보는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배의 크기에 두고 있습니까? 엔진이 작동하느냐에 두고 있습니까? 집안 배경이 아무리 좋으면 무엇합니까? 엔진이 고장난 가문은 표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엔진이 꺼지면 아무리 똑똑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엔진이 꺼진 사람은 이 세상의 암초에 부딪쳐 망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엔진이 작동되는 사람은 파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암초를 피할 수 있습니다. 눈빛이 살아 있고 생명이 있는 사람! 절대로 이 세상에서 방황하며 살지 않습니다. 사람의 궤술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야바우 꾼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표류하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엔진이 작동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원히 살아 있는 엔진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갈 길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앞에 암초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아무리 크고 힘센 파도라 할지라도 파도에 깨지지 않고 파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작동시키십시오. 이 세상의 엔진은 늘 파손될 위험성이 있지만 예수님의 엔진은 파손되지 않습니다.

두 번 째로 성숙한 신앙인이 누구입니까?--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는 참된 것을 하라가 아니라 참된 것을 말하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어린아이가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성숙한 성도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된 것을 말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참된 것을 말해 주지 않습니다. 사랑이니까 이단 사설에 빠져도 거기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말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 못된 길로 빠졌을 때 사랑이란 이름으로 참된 것을 말씀해주시는 부모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이란 이름으로 강 건너 불 보듯 하겠습니까? 종교는 다 같은 거니까 너가 맞는 종교를 하나 택하여 진실되게 살라고 가르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다면 옆에 있는 우리 성도가 어린아이로 멈추어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잘 못된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 갈 것입니다. 때로는 심한 말도 하고 때려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잘 못된 것을 알려 주고 싶어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면에서 단호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길에서 하나님을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너가 선택하여 마시는 것은 다른 것과 똑같이 만족을 주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할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이런 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참된 말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청년 교회 지체들이 로마서 캠프를 하고 돌아 왔습니다. 약 150여명의 청년들이 구원의 참된 것을 말씀하시는 로마서를 공부하였습니다. 마지막 시간에 간증하는 형제의 간증은 참된 것을 보게 하고 참된 것을 서로 나눈 결과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 라는 것을 우리 모두 경험하는 자리였습니다. 형제의 간증은 모태신자였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인지에 대해서 명확하지가 않은 채 그저 교회를 다닌 형제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씀하시는 로마서를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확신하게 되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저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교제만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를 사랑으로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냥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 주어야 하는 곳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을 말하고 이해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참된 것을 말하는 참된 교회가 될 것을 소망합니다. 감사하게도 성도님들이 참된 것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들이 우리 교회에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참된 것을 분명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점차로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또한 감사합니다. 적어도 청년 교회 지체들 150여명이 로마서 캠프를 통하여 참된 구원의 도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표류하지 않고 한 방향을 향해 가는 참된 교회가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처받은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있으면 사랑으로 위로하십시오 그러나 구원의 기초가 흔들리는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 된 것을 말해 주셔야 합니다. 이단 사설에 빠진 사람에게 분명하게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인에게 그리스도인은 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 말이 상대방에게 서운한 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신앙 생활이 송두리째 뽑히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혼을 위하여 참된 것을 말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참된 것을 말해 줄 때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16절 그렇습니다. 스스로 세워져 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 세움 받을 때까지는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일어서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는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때문에 어린아이는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서로 상합하여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깊은 교제보다는 어느 정도 선을 두고 교제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과 교제를 하고 싶어서 누군가가 다가가면 불편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절대로 성숙할 수 없습니다. 손이 어깨 관절과 깊은 연결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 팔은 자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팔은 썩든지 잘라버리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팔이 어깨 관절과 깊이 상합 하여 있으면 처음에는 아주 짧은 팔이 성숙해지면 길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상합하기를 원하십니다. 명목상으로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아교풀로 하나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아교풀과 같은 성령님의 연합이 있을 때 우리는 성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숙한 사람들은 영적인 사기꾼에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기독교 유행 풍조에 쏠리지 않습니다. 또한 이런 연약한 성도가 있을 때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말을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림교회 성도님들은 이 말씀으로 무장하여 성령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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