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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또 다시 불기둥, 구름기둥을 기다리라 / 출 13:20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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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불기둥, 구름기둥을 기다리라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구약의 말씀: 출애굽기 13:20 ~ 22

  그들은 숙곳을 떠나 광야 끝에 있는 에담에 장막을 쳤다.  주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군할 수 있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 길을 비추어 주셨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8:35 ~ 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12:35 ~ 40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곧 열어 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 주인이 와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되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나 새벽에 오더라도,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집주인이 도둑이 언제 들지를 안다면, 그는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당도하기 전, 광야 생활의 이야기 한 토막이 실려 있습니다. 광야는 물 없는 사막이요 황무지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 40년이 아마 지긋지긋 했을 겁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문제점은 광야의 날씨입니다. 광야의 날씨는 유별납니다. 낮에는 태양 볕이 너무 뜨겁게 비춰서 그늘 없이는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또 밤이 되면, 정반대로 날씨가 너무 차가워서 두꺼운 옷을 입지 않고는 밤을 지낼 수가 없습니다. 뜨거운 극과 차디찬 극이, 밤과 낮을 교차해가면서 사막을 뒤덮습니다. 그래서 사막이라는 것이 극단과 극단의 결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날씨만 그렇겠습니까? 사람이 느끼는 감정과 정서와 심성, 아마 다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목표는 단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 성서 표현대로 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는 것입니다. 유목민족 이스라엘로서는 양봉이 잘되어 꿀이 많이 나오고, 목축업이 잘 되어서 가축이 번성하고 젖이 많이 나오는 땅이라면 최고의 땅입니다.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우리의 기본적인 의식주와 농사가 잘되는 땅, 그 땅을 향하여 40년 동안 한 걸음 한 걸음 행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목표가 제일 중요합니다. 가나안 땅! 그렇지만 그 땅,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수많은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산다고 하면, 내일의 땅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40년 동안 살아야 오늘의 땅, 이 광야의 하루하루 생활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는 목표가 있습니다. 목표를 반드시 이루고 싶고 이루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가는 하루하루의 여정, 이 인생의 과정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과정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 목표가 제대로 달성될 수는 없습니다. 과정이 나쁜데 어떻게 목표 도달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 목표와 과정 모두를 지배하십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작렬하는 태양 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와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름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구름 기둥이라고 표현할 만큼 큰 기둥 같은 구름을 주셨습니다. 밤에 추워서 견디기 힘든 없는 백성들한테 불기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필요한 만큼, 필요한 장소에, 필요한 시간에, 하나님은 보호막을 치셨습니다.
날씨가 덥고 춥기 때문에 구름과 불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성서 말씀에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항상 이스라엘 백성 앞에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뒤에 있는 것도,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기둥은 항상 앞에 있었습니다. 그 말은, 추워서 혹은 더워서 불을 아니면 구름을 줄 테니, 여기에 자리를 정하고 여기다 장막 짓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따뜻한 가운데, 또는 시원한 가운데 길을 따라서 계속해서 목표를 향해서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걸어가야 한다, 앞을 향해서 가야 한다, 쉬지 않고 걸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의 땅이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좌절을 많이 겪은 분들은, 2003년에는 따뜻한 불기둥을 주시라고 기도하십시다. 혹시 복이 넘쳐서 조심스러우면 내년 1월 달에는 차분해지게 구름 기둥 좀 주시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면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구름과 불을 적절하게 주시어서 평화와 정의가 넘치는 새로운 날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구름기둥, 불기둥을 주시는 것은 그날그날 안주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앞을 향해서 가십시오. 앞에서 인도합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항상 여러분을 앞을 향해서 인도하시는데, 출애굽 때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확 싸서, 벨트로 싸서, 그 백성을 몽땅 벨트로 싸서 가나안을 향해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항상 앞서 가십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오늘 여러분을 묶어주는 띠가 있습니다. 벨트가 있다 그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기둥이라는 벨트와 불기둥이라는 벨트로 묶어주셨지만, 오늘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벨트를 주셨습니다. 그 벨트는 이름하여 사랑의 벨트! 그 벨트는 하나님의 사랑의 벨트입니다. 구름과 불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랑의 벨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의 벨트입니다.”

그 벨트는 자연 속에 있는 벨트이거나,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벨트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되, 우리와 상관없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택정하시고, 그분이 사랑의 화신이 될 수 있게끔 골고다란 언덕을 정하시고, 죽음의 시간도 정하시고, 사흘 뒤에 부활의 시간도 정하셔서, 다시 말해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 정해진 사람을 통해서 우리한테 사랑의 벨트를 주셨습니다. 그 벨트로 우리를 싸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벨트 안에 묶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오늘도 전진, 전진해야 합니다.

생각을 좀 넓혀보면, 사람도 벨트가 있고, 짐승도, 동물도, 자연도 다 벨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상에도 벨트가 있는데, 이것은 이 지구를 숨쉴 수 있게 하는 그린벨트입니다. 요즈음 그린벨트가 좁아져지고 없어져 갑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시멘트벽이 자꾸만 커갑니다. 뭘 느끼십니까? 문명이 발달할수록, 그 속에서 우리가 편안하게 호흡할 수 있는 녹색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린벨트가 중요합니다. 바다에도 벨트가 있습니다. 바다의 오염이 너무 심합니다. 그러면 바다가 죽습니다. 바다에도 생명의 구역이 있습니다. 바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명의 지역을 정하는데, 소위 우리가 말하는 청정해역이란 것입니다. 바다가 살아야 수자원을 보호되고, 우리도 양식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산에는 그린벨트가 있고 바다에는 블루 벨트가 있다고 합니다. 이 벨트가 없이는 바다는 죽습니다. 그린벨트가 자연을 살리는 벨트라고 하면 블루 벨트는 바다를 살리는 벨트입니다.
자연만 그런 게 아니라 동물도 그렇다고 합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 가운데 쥐가 있습니다. 이 쥐에게도 생명이 가능하게 하는 벨트가 있답니다. 쥐는 본래 시력이 나빠서 눈만 가지고는 어디를 잘 못 다니는데, 조그만 구멍도 쏜살같이 들락날락 하면서 고양이를 피하는 그 민첩함,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하면, 쥐에 나있는 수염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수염의 촉각은 고도로 발달되어서, 이것으로 구멍의 크기도 재고 위치도 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과학서적에는 쥐 잡기 제일 좋은 방법은 쥐의 수염을 전부 잘라 버리는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삼손의 머리칼을 자르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그 쥐도 수염이라는 생명벨트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수염이 없는 쥐는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특별히 고양이 앞에서는 말입니다.

식물에도 벨트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기르는 선인장은 모래바닥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그런데 선인장의 특징은 일단 수분을 흡수하여 오랫동안 자기 몸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사막지역에서, 어떻게 하면 수분을 증발하지 않게 보호할까? 이 보호 장치가 선인장의 가시라고 합니다. 가시의 역할은, 자기 보호이기도 하지만, 수분 증발을 막는 벨트입니다. 동물도, 식물도, 자연도, 우리 인간 세계도 벨트 없이는 다 와해되고 해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벨트는 뭡니까?
로마서로 다시 갑니다. 바울의 말씀! “벨트는 사랑의 벨트입니다. 그 사랑의 벨트는 인도주의적 사랑을 넘어서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사랑의 벨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벨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벨트로 여러분을 묶어주셨습니다. 그러니 이 벨트를 허리에 띠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목표를 향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그러니 등불을 켜들고 깨어 준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도둑처럼 갑자기 임하실 때 여러분은 예 하고 그분을 맞으십시오.

우리에게 주신 이 벨트는 사랑이라고 이름했습니다. 이 사랑의 벨트는 천지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다양하게 주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벨트, 오늘의 사랑의 벨트는 무슨 색깔입니까? 이제 2002년을 마감하면서 답변할 때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색깔은 뭡니까? 시인인 이해인 수녀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킨 다음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생명벨트를 보여주셨습니다. 무지개입니다. 이해인 수녀는 이 무지개 색깔,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를 신앙적으로 이렇게 해석해 놓았습니다.

빨간색은 눈부신 열정을 상징합니다. 열정적으로 한번 인생을 살아보십시다. 주황색은 타오는 환희. 우리는 항상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어려울수록! 노란색은 부드러운 평화. 부드러운 평화 가운데 살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초록색은 싱그러운 생명. 우리에게 주는 은총입니다. 파랑은 바다처럼 열려 있는 공간. 남색은 마르지 않는 잉크. 우리의 감사와 찬양을, 우리의 노래를 계속 써도 항상 마르지 않는 그 색깔로 그렇게 한번 써보십시다. 보라색은 은은한 하늘의 신비가 담겨있는 그릇. 이렇게 색깔에 관해 썼습니다.

사랑이라는 벨트 속에도 이렇게 일곱 가지 색깔이 들어가 있습니다. 사랑은 어떤 때는 눈부신 열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어떤 때는 타오르는 환희로 임합니다. 우리는 부드러운 평화로 사랑이 우리한테 오는 걸 느낍니다. 은은한 신비의 모습으로도 옵니다. 이 사랑의 벨트가, 십자가에 달린 사랑의 벨트가 오늘 우리한테 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60년대 말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당시 흑백 TV를 볼 때에 TV 가진 것도 굉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나자, 흑백 TV가 없어지고 컬러 TV가 나왔습니다. 제가 70년대 중반에 독일에 갔는데요, 그때 가니까 길거리에서 물건을 놓고 거저 가져가라고 해서 가봤더니, TV 세트가 모여 있더라구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 텔레비전도 공짜로 주는구나 하고 켜보았더니, 흑백 TV예요. 컬러 TV가 나오자마자 흑백 TV는 그렇게 밀려나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컬러 TV를 보았을 때, 컬러의 아름다움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칼라는 한 색깔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색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흑백 시대는 갔습니다. 컬러 시대가 왔습니다. 세상의 문명은 그렇게 발전하고, 금년도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는, 우리의 생각 속에는, 우리의 인식 가운데에는, 우리 사회의 저변에는 여전히 우리는 흑 아니면 백,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흑백의 사고를 여전히 좋아하면서 혹은 강요당한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다양한 색의 무지개를 주신 때가 언제인데 말입니다. 왜 우리는 흑백시대의 단순 논리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은 종류와 색깔이 다양합니다. 단, 이것들이 모여서 함께하여 무지개의 조화를 이루면 됩니다. 앞서가시는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향하여 함께 가는 이 사막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받은 복과 재능과 모든 것은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끼리 모인 다양성의 합의,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모든 다양성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끈으로 묶이게 됩니다. 배고픈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묶입니다. 힘들어하는 사람도 즐거워하는 사람도 묶입니다. 그 끈 안에서 각자가 갖고 있는 제나름의 색깔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끈에 묶일 수 있는 색깔이어야 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가나안이라 이름하는 복된 동산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목표가 같고 미래의 꿈이 같고 같은 고백을 가질 수 있으면, 다양한 공동체 속에서 아름다운 칼라가 어우러진 사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 때로는 구름 기둥, 또 다른 때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 하루하루 살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앞서가십니다.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여정을 하나 하나를 지배하시고 반드시 우리를 목표로 이끌어 주십니다. 목표가 분명한 신앙, 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오늘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띠를 두르고 당신을 따라오는 사람, 그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생명을 값으로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생명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내가 소유하고 있다,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생명의 차원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가질 수는 없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결코 생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유 자체가 우리 생명을 대신할 수 없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들어 놓고 인간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즐겁게 살거라. 그 대신에 한 가지는 지켜야 한다.” 그 한 가지가 뭡니까? 인간이라 이름하는 우리의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것, 인간의 것은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이 와서 유혹합니다. 하와가 사탄에게 넘어갔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그대가 눈이 밝아집니다. 인간 존재 속에 하나님의 존재를 가져오면 인간이 하나님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변화! 허나 그것 때문에 하와는 벌을 받고 아담도 벌을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선악과 아닌,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은 맘대로 소유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아닙니다.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습니다. 뭐라고 찾는지 아십니까? “아담아, 네가 얼마나 기쁨을 소유했느냐?” 이렇게 묻지 않습니다. “아담아 네 인간의 업적이 무어냐?”고 묻지 않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네 존재를 밝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그러나 얼마나 부자인지,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 얼마나 지위가 높은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높은 만큼, 가진 만큼, 깊은 만큼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한테 우리가 가진 것 내놓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나님께 내놓습니다. 자기 존재를 내놓습니다.

에서는 너무 배가 고파서 팥죽 한 그릇을 소유하고서 그 대가로 자기 장자권이라 이름하는 존재를 팔았습니다. 결론은 하나입니다. 야곱에게 존재 계승권이 주어졌고, 에서가 일시 소유했던 물건은 없어졌습니다. 에서는 정통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소유할 수 있는 많은 것을 주십니다만,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복 받은 피조물로서의 인간 됨, 참사람 그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는 불기둥, 구름기둥을 시절에 따라 장소를 따라 필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주십니다. 무지개 색깔처럼. 소유가 존재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선 진실한 인간의 존재가 있고, 거기에 하나님이 필요한 물건, 필요한 양식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한해를 마감하면서 돌아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으로, 존재로 살아갑니까? 하나님은 우리한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항상 너희보다 한 발짝 앞에 있다. 나를 바라보고 걸어 오라.”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그걸 가리켜서 전문 용어로 코람 데오(coram Deo)라고 합니다. 우리 앞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 앞에 선 우리 존재.
그 하나님은 종말의 주인이십니다. 내일 올지 모레 올지는 누가복음 말씀대로,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종말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종말의 날을 앞에 두고 오늘을 산다면, 우리는 종말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종말을 숨쉬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끌어안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 완전하지는 않으나, 하나님나라를 눈앞에 보고,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걸 느끼면서, 그렇게 호흡하면서 사는 것이 종말적 삶입니다.

오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사랑의 띠를 띠고 살면, 이렇게 약속된 가나안 땅, 종말을 눈앞에 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미래의 현실화입니다. 오늘 이 날을,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의 선취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름답고 다양하게!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은 구하면 주십니다. 북쪽에도, 남쪽에도, 이 세계에도, 불기둥, 구름기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볼 수 있는 자, 느낄 수 있는 자, 결단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의 복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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