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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을 통과한 참 생명 /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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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통과한 참 생명
갈라디아서 2장 20절
김홍도 감독 (금란교회)


전에 우유가 몸에 좋으니까 화분에도 주면 좋겠지 하고 생우유를 화분에 부어주었더니 그 식물이 도리어 병들고 시들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우유를 한 번 발효시켜서, 즉 한 번 죽여서 주어야 영양분이 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죽여야 참 영양이 되는 것입니다. 우유가 몸에 좋다고 주사기에 넣어서 혈관에다 넣으면 되겠습니까? 몸에 좋은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합니다. 위장에 들어가 독한 위액으로 한 번 죽여서 흡수되어야 영양이 되는 것이지 생으로 집어넣으면 사람이 죽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모든 진리는 죽음을 통과해야 참 사는 길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밀알이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으면 실상은 죽은 것이고,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 사실은 사는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번 죽어야 참으로 사는 길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마태복음 10장 39절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도 주를 위해 죽는 것이 참으로 사는 것이고, 죽지 않고살려고 하면 사실은 죽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 34~35절에도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영생의 길,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은 목숨(life)과 자기(self)를 죽이는 것이며 참으로 유익한 길(profit), 참으로 쟁취하는 길(gain)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죽는 것이고 부인하는 것인데, 많은 크리스찬들이 죽을까봐 겁이 나서 무서워합니다. 그렇다고 자살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도만능주의자로 유명한 George Muller씨에게 “그렇게 승리의 생활을 하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나는 어느 날 죽었습니다. George Muller에 대해 죽고 세상이나 친구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육에 속한 자기가 죽고 예수님으로 살았더니 능력이 나타나고 참된 승리와 축복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널 때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고 버티고 서 있는 동안 요단강이 갈라지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많이 죽을 때 많은 사람을 살릴 수가 있고 교회가 부흥될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12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우리가 많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죽고,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기워지는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는 것이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생활인데 우리는 죽을까봐 겁을 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새생명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을 통과해서 참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죽은 재물만이 성전에 들어올 수가 있었습니다. 죽지 않은 산 짐승들이 성전에 들어 왔을 때 예수님은 채찍을 들어 다 내어쫓았습니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 쓸모가 없습니다. 옛사람에게 속한 것은 모두 한 번 죽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죽어야 할까요?
 
  1. 옛사람의 정(passion)이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passion and desires)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상시에 부모나 처자식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하지만 예수님과 상충될 때는 가족에 대한 애정도 부인해야 되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순위가 잘못될 때 사랑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나 되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번창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해 주신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허리 굽혀 안을 때에는 아들이라기보다 손자라고 해야 어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하는 아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이 차지해야 될 마음의 지성소에까지 차지하게 될 때 그 우선 순위를 바꿔놓기 위해서 이삭을 번제로 잡아 바치라고 했습니다. 단 하룻밤이었지만 많은 번민과 갈등 속에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결단을 내려 모리아 산에서 칼을 들어 치려할 때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됐다. 나는 네가 정말로 그 아이를 죽이게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나는 단지 이삭을 마음의 지성소에서 내보내고 내가 그 자리에서 너를 통치하려는 것이었다. 너의 사랑 속에 있는 타락된 것을 고쳐주기 원했던 것이다. 이삭을 데리고 네 장막으로 가라. 건강한 채로 데려가도 좋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 네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은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 후부터 아브라함은 부자였지만 심령은 비어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실 때 자기가 고문을 받고 고통당하는 것보다 추운 겨울에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빨갛게 언 발로 서 있는 것을 볼 때 제일 참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고개만 한 번 숙여서 신사참배하면 귀여운 처자식과 함께 편안히 살 수 있는데 자기가 죽기 전에 처자식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2. 육에 속한 욕심이 죽어야 합니다.
 
  크리스찬이 영적 생활을 하는데 큰 장애물이 소유욕입니다.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의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에 소유욕을 가지고 매달리는 것이 영적 생활에 큰 해를 가져다줍니다. 인간의 마음속 지성소에 하나님만이계셔야 하는데 물질의 우상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별로 가진 것도 없으면서 소유욕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이 있고 아브라함처럼 엄청 많은 재물을 아브라함처럼 가졌으면서도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을 모시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도 한 번 죽였다가 하나님이 살려주신 것이라야 안전한 것입니다. 드려지지 못한 것은 안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죽이라고 명령하실 때가 있습니다. 죽음을 통과한 사람은 어떤 불황에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기회 있을 때마다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도둑맞을 염려도 없고 부도날 염려도 없습니다. 아무 때라도 필요할 때는 하나님이 척척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19~21절을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러므로 물질을 죽여서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마음도 하나님께 가 있고 세상에 있는 물질도 안전합니다. 죽음을 통과하지 않는 물질은 안전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세례 받는 것은 “옛사람이 죽어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새사람으로 다시 산다”는 뜻으로 세례를 받는 것처럼 내 물욕을 죽이고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뜻으로 드리는 재물이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헌납으로 한 번 죽지 않은 재물은 언제 다 날아갈 지 알 수 없습니다. 십일조는 내가 소유한 것을 하나님 앞에서 한 번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물질, 재산도 하나님 앞에서 한 번 죽음을 통과하면, 밀알이 죽으면 백 배나 되는 것처럼 백 배나 풍성히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3. 육에 속한 지체가 죽어야 합니다.

  본문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하신 것처럼 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라디아서 5장 24절) 한 말씀과 같이 육에 속한 옛사람의 지체의 정욕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① 신자의 발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형틀에 못박혔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의 발도 못박혀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곳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도하는 곳으로만 가야 합니다.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따라 가지도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한다”고 합니다.

② 신자의 손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십자가의 귀한 피로 죄씻음 받은 성도가 죄의 더러운 것을 만지는 손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거룩한 손으로 술병을 든다든지, 담배를 끼고 다닌다든지, 남의 여자를 만지거나 더듬는다든지 하면 아직 못박힌 손이 아닙니다. 불의한 채팅에 손가락을 쓰는 것은 죽지 않은 손입니다.
 
  ③ 신자의 귀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세상에는 우리 영혼을 끌어내리고 영을 흐리게 하는 소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음성만 들어야 하는데 마귀의 달콤하고 그럴듯한 소리에 솔깃해 듣다가 결국 범죄하고 타락했습니다.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④ 마음과 생각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피흘리셨고 그 가슴이 창에 찔려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십자가에 못박혀 죄악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죽지 않고 옛사람대로 사는 것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며 위험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⑤신자의 눈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그 얼굴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이사야 52장 14절에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라고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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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눈도 십자가에 못박혀 죄악과 마귀의 유혹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죽지 않은 눈은 위험합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 설교 가운데 성도가 섹시한 눈으로 상대방을 쳐다본 것도 죄악이므로 즉시 회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여자, 남의 남자를 섹시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음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 자체가 죄악입니다. 심상히 여기면 안됩니다. 베드로후서 2장 14절에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눈을 가진 자가 있으면 문제가 생기고 분쟁이 생깁니다.

이 세대가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가 되어서 보이는 것이 모두 죄의 사욕을 유발시키는 것들입니다. 여자들의 옷은 가슴을 파고 들어가다 못해 유방이 거의 다 드러나게 입습니다. 치마는 짧아지다 못해 엉덩이도 다 못가리웁니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눈을 조심해야 합니다. 나쁜 생각이 없이도 마주 앉은 여자의 무릎으로 눈이 가기 쉬운데, 의식적으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대화해야 됩니다. 저급한 본능을 유발시키면 안됩니다. 음란한 영화나포르노를 보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산 사람을 음심이 가득한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눈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우리의 눈은 항상 위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헛된 것에 눈길을 돌리면 안됩니다.

⑥우리의 혀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옛사람의 혀가 아직 죽지 않아서 쉬지 않고 악을 토해내며 남을 죽이는 독을 뿜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물론 듣는 사람들의 심령을 오염시키고 어질어질하게 만듭니다.

시편 기자는 “내 입에 재갈을 물려달라”고 했고 “내 입에 파숫군을 세워 달라”고 했습니다. 큰 배가 작은 키 하나로 방향을 잡아나가는 것처럼 작은 혀가 생의 방향을 저주의 방향으로 또는 축복의 방향으로 운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목회의 석양을 바라보면서 전에 깨닫지 못하던 것을 많이 깨닫고 철드는것을 느낄 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말하는 버릇입니다. 특히 남을 웃기려고 저급한 농담을 하던 것이 다 무익하고 해롭고 후회스럽습니다.
  여러분, 깨끗한 심령으로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주님과 동행하기 원한다면 남에게 상처주는 말이나 중상모략하는 말, 거짓말, 지저분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혀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한 번 죽지 않은 것은 위험합니다. 안전하지 못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장 20절)한 이 말씀은 바울이 가장 깊은 신비의 경지에서 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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