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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믿음 /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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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믿음> 마15:21-28
새문안교회 2003. 2. 9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과 그의 이적 행하시는 능력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뿐만 아니라 인근 모든 지역으로 퍼져감에 따라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백성들의 높아가는 존경심과 신뢰감을 떨어뜨리기 위하여 갈릴리로 급파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공격을 통렬하게 반박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얼마 동안 갈릴리를 떠나 북쪽 이방인의 땅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거기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쉬려고 하셨던 예수님과 그 일행을 한 가나안 여인이 알아보고 좇아왔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과 인접해 살거나 섞여 살며 가장 오래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이방민족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이 이방여인과의 만남과 대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방여인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와 말씀 그리고 그 이방여인의 언행을 잘 살피는 것은 믿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위하여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선 본문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봅니다. 어떤 이방여인에게 "흉악하게 귀신 들린"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22). 예수님을 알아본 그 여인은 그 딸아이가 고침 받기를 원하여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며 나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소리지르며 좇아오는 그 여인에게 처음에는 아예 듣지 못하신 듯이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이 소리지르며 좇아오기를 그치지 않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가시고 짜증나게 하는 그 여인의 간구를 예수님께서 들어주셔서 그 여인이 더 이상 따라오지 않게 해주시기를 청했습니다(23).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24)고 냉담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여전히 "주여 저를 도우소서" 간청했습니다(25).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번에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26). 그 여인과 그의 딸을 개에다 견주신 예수님의 이 대답은 아주 매정한 말씀일 뿐 아니라 그 여인에게는 심한 멸시로 들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주님, 맞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27)라고 반문한 것입니다. 그러자 비로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칭찬하셨으며 "네 소원대로 되리라" 약속하셨고 그 때에 그의 딸이 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주된 관심은 그 여인의 무엇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크도다" 하셨는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그녀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2, 25, 27절에 보면 그 여인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그 여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22절에서 그 여인은 예수님을 또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약속된 메시아를 일컫는 유대인 특유의 표현입니다. 즉 그 여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다는 것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그 메시아로 믿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에서는 그 여인은 예수님을 향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향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다는 것은 그녀가 예수님을 신적 치유와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이로 믿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근본적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한 것이라고 거짓 비난을 한 것과 매우 대조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이 이방여인에게서 주목할 것은 그녀의 끈질긴 간구입니다. 그녀는 소리 지르며 간구하는 자신에게 예수님께서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찮아하며 예수님께 "제발 저 여자 좀 어떻게 해주시죠"라고 간청할 정도로 계속 뒤따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달려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그녀를 개에 견주는 모욕적인 발언을 하셨는데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고집과 오기에서 나오는 언행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저 그녀의 그 고집에 감동되셨거나 그만 그 오기에 굴복하신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구원과 치유는 오직 그에게만 있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에 그렇게 간절히 예수님께 매달린 것이라고 봅니다. 그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서 한 번 예수님께 접근해 본 것이었다면 예수님으로부터 그런 냉대와 모욕적 언사를 받을 때 일찌감치 포기하거나 욕설을 퍼붓고 떠나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그녀에게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녀가 기대하고 간구하는 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그녀의 인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며 그녀와 그녀의 딸을 개에다 견주는 모욕적인 발언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물러나지 않은 그녀의 행동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보셨겠습니까? 무엇을 보시고 큰 믿음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딸을 고치기 위해서라면 어떤 모욕도 참겠다는 그 갸륵한 모성애겠습니까? 아니면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모멸감을 느낄 줄 모르는 노예근성같은 무지함이나 무감각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개와도 같은 존재, 아니 그 이하의 존재로도 인정할 줄 아는 죄인으로서의 자기인식이라고 봅니다. 감히 구원과 치유를 요구할 권리도 자격도 없는, 그저 주인의 은혜밖에는 기대할 수 없는 자신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보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인이 은혜와 자비로 부스러기를 떨어뜨려 주면 감사히 받아먹고 안 줘도 할 말이 없다고 여기는 순종적 믿음, 그러나 우리 주인은 그렇게 무정한 주인이 아니고 반드시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고 믿는 순박한 믿음, 예수님께서는 그 이방여인에게서 그러한 믿음을 보시고 큰 믿음이라 부르신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교만하고 자칭 의인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불신앙에 확연하게 대비되는 이방여인의 겸허한 믿음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정통신앙의 수호자임을 자칭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의 정면대결을 벌이며 그들에게서 참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 이방여인에게서 큰 믿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의 냉담한 태도를 거두시고 호의적으로 돌아서신 것은 그녀에게서 이러한 믿음을 확인하시고 나서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그 이방여인을 냉냉하게 대하셨으며 나중에는 태도를 바꾸셨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또 "예수님께서 변덕을 부리신 것인가?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미처 이 여인의 믿음을 알아보지 못하셨던 것인가? 정말 예수님께서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하여 오셨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변덕쟁이로 만들 수 없습니다. 또 사람과 그 속 생각이나 믿음을 단번에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도 우리는 추호의 의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하여 오신 이가 아니시고 만인의 구주로 오셨음은 그의 출생에서부터 그의 가르침과 사역 자체가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방여인을 향했던 예수님의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그 태도는 교육적인 것이었다고 봅니다. 즉 그것은 그녀에게 있는 믿음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참 믿음의 한 예를 들어 보이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편으로 그 이방여인에게는 그 자신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고 확실하게 드러낼 기회를 주셨으며, 다른 한편으로 제자들에게는 그 여인을 통해 참되고 큰 믿음, 순박하고 겸손하며 순종적인 믿음의 한 본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일 직전에 갈릴리에서 맞부딪쳤던 유대인이며 정통신앙인으로 자처하는 교만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믿음과 대비시켜서 바르고 큰 믿음이 무엇인지를 한 이방여인을 통하여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비교적 단순해 보이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믿음에 관한 소중한 가르침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큰 믿음이란 다름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아는 바른 이해, 예수님의 치유와 구원의 능력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간절히 매달림, 하나님의 구원을 바랠 자격이 자신에게 없음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밖에 의지할 것이 없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죄인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우리도 우리가 근본적으로 개와 같은 존재임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믿음이 있는 곳에 치유와 해결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무정하게 여겨질 때에도, 주님의 응답이 늦어지는 듯 보일 때에도, 우리가 멸시를 당하는 것 같을 때에도, 믿음이 있는 곳에는 그 어디에서나 그 누구에게서나 국적과 신분에 상관 없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남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때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믿음을 보다 분명히 할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방여인에게 냉담하신 듯 뜸들이신 이유를 거기서 찾았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응답이 더딜 때에는 먼저 우리 자신이 우리의 믿음을 보다 더 분명히 하기를 주님께서 기다리신다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때로는 침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침묵 속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들으며 그의 무응답 속에서 오히려 응답을 발견하는 믿음의 귀와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큰 믿음을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큰 믿음이란 어마어마하게 큰 야망을 품고 그것을 이루어달라고 떼쓰는 것이 아닙니다. 큰 믿음이란 분에 넘치는 욕심을 갖고도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실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큰 일을 벌이고 대단한 능력을 행할 수 있는 것이 큰 믿음이 아닙니다. 몇 대에 걸친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큰 믿음이 있는 것 아닙니다. 새문안교회같이 오래 되고 전통 있는 교회의 교인이라고 믿음이 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 오직 그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간절한 기도,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항상 자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겸손과 순종,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 이것이 곧 큰 믿음을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치유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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