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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울지 말라 / 누가복음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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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말라 / 누가복음 7:11-17
옥한흠 목사 (사랑의교회)


몇 주 전 이 본문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읽고 난 뒤 이상하게 오랫동안 제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ꡐ울지 말라. 울지 말라.ꡑ 제가 특별히 어려운 문제로 인해 울고 있는 처지도 아닌데, 제 마음 속에 이런 음성이 자꾸 들려왔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지금도 눈물 흘리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교우들을 생각할 때마다 제 마음 한 구석에는 눈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울지 말라는 말씀을 주시려고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나 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설교 내용으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장례행렬을 따라가며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나인성이라는 동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이란 동네에서 남쪽으로 하룻길쯤 여행하면 발견하게 되는 골짜기에 아름답게 자리잡은 동네였습니다. 아마 처녀 때에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식을 올린 후 그녀에게도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마 인생에 있어서 가장 달콤한 시기가 있다면, 갓 결혼을 해서 낲은 자녀들이 재롱부리는 모습을 보면서 오순도순 사는 때일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도 인생의 푸른 꿈을 꾸면서 마냥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느닷없이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하루 아침에 과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당시 여자가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앞날에 엄청난 시련과 극심한 가난, 고독이 기다리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루하루를 보냈을까요? 그래도 유일한 희망은 자라고 있는 어린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정성을 다해 고생을 이겨가며 아들을 키웠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이 아들을 놓고 ꡒ청년아!ꡓ라고 부른 것을 보면 이제 성인으로 불릴만한 나이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로서 얼마나 마음에 꿈이 부풀어 있었을까요? ꡐ이제는 가정의 기둥이 생겼구나. 이제는 기대고 살 만한 기둥이 생겼구나.ꡑ 하고 안도의 한숨과 함께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 아들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마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더 흘릴 눈물이 없을 만큼 울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아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여인의 집에 모여들었습니다. 아마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ꡐ이 여자, 무슨 죄가 많아서 이렇게 팔자가 사나울까? 남편을 먼저 보내더니, 이제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마저 보내다니….ꡑ 그러면서 장례 준비를 거들었을 것입니다. 입관절차에 따라 시체를 마루에 눕히고 머리를 반듯하게 빗긴 후 가장 좋은 새 옷을 입혔습니다. 그런 다음 갈대로 만든 관에 시체를 누이고 두 손을 모아 놓습니다. 그리고는 당일에 장례를 치릅니다. 하룻밤을 더 보내지 않고 오후 5시나 6시쯤 되면 죽은 자를 메고 나갑니다. 장례 행렬 앞쪽에는 여자들을 세웁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함으로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자들이 관을 메고 따라갑니다. 그 뒤에는 돈을 주고 불러온 호곡꾼이 피리를 불고 곡을 하면서 뒤를 잇습니다. 장지라고 해봐야 동네에서 한 20~3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이제 장례행렬이 동네를 지나서 성문으로 빠져나갑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를 이끄시고 나인성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마침 장례 행렬이 성문을 빠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한번 그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군중을 데리고 나인성을 향해서 오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문 입구에 이르렀을 때 반대 편에서 다가오는 죽음의 행렬과 만난 것입니다. 사탄이 마치 자신의 전리품인양 한 젊은이를 관에 담고는 울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죽음의 사신처럼 의기 양양하게 성을 나오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생명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과 함께 다가오고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의 만남이요, 대결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셔야 될 것 같습니까?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시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구주라고 한다면, 이 순간을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피하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장례 행렬이 지나가도록 길가에 서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면으로 대결했습니다. 관 뒤에 따라오면서 슬피 울고 있는 과부에게로 주님은 눈을 고정시켰습니다. 과부를 보셨다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 과부를 주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항상 먼저 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슬픔을 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버림받은 자들, 실패한 자들, 병든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ꡐ보셨다ꡑ는 말이 40여 번 나옵니다. 주께서 ꡐ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ꡑ라는 말씀도 그 중 하나입니다.(마9:36)

이처럼 주님의 눈이 가는 곳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 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에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사랑의 만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이 만조를 이루면 온 세상이 바닷물로 덮이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만조를 이룬 가슴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 당하는 자를 가장 먼저 주목하시고, 그 아픔에 동참하는 심정을 느끼셨습니다. ꡐ과부가 얼마나 슬퍼할까? 과부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까?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을까? 얼마나 자기 팔자를 놓고 탄식하고 있을까?ꡑ 주님은 설명을 듣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시고, 그 과부의 고통과 아픔에 자기 마음을 함께 담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과부를 보고 울지 말라고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슬픔 당하는 사람을 볼 때, 위로한다며 ꡒ울지마, 울지마ꡓ 하고 말하지만 대부분 빈말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빈말로 ꡒ울지 말라ꡓ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의 눈에 눈물을 씻겨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예레미야를 통해 대언하시던 그 말씀을 지금 주님이 여인에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ꡒ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ꡓ(렘31:16-17)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시자 걸어가던 자들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ꡒ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ꡓ 그러자 그 청년이 일어나 앉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을 과부에게 인도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의 눈물이 기쁨이 되게 하셨고, 슬픔이 춤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으로 그 과부를 위로하셨습니다.

우리는 함께 보고 있는 이 본문의 이야기는 참 아름다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 담긴 사건과 주님의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일까요? 우리 중에는 이 여인처럼 남편을 먼저 보내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까지 잃어버린, 그런 슬픔에 안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지 모릅니다. 설혹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당장 그 아들을 무덤에서 일으켜주시는 일을 주님은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음의 사자들이 걸어 나오는 그 현장에 생명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 그들을 만나셨기 반드시 그 아들을 살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이 이런 기적을 일으키셨을까요? 온 세상 앞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인이시요,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 이 사건의 목적이었습니다. 온 세상을 향해서 주님이 ꡒ나는 죽음을 이기었노라. 나는 생명의 주가 되느니라.ꡓ 하는 것을 선언하는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ꡒ청년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ꡓ 할 때 죽었던 자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 사탄은 아마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그 청년의 시체를 끌고 나올 때에는 자기 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있는 군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ꡒ청년아 일어나라.ꡓ 할 때 사탄은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었습니다. 청년을 붙들 수도 없었고, 그 청년을 그대로 죽음에 묶어 둘 수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자 청년은 죽음을 이기고 일어났습니다. 사탄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로마서 14장 9절에서 예수님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계시록 1장 18절에서 예수님은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서 주님은 친히 선언하셨습니다. ꡒ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ꡓ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에게 사실 죽음이란 없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영원히 사는 생명으로 옮기는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찬송가에서 자주 이야기하듯이 요단강을 건너가는 과정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죽음은 이미 떠났습니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ꡒ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ꡓ(눅20:38) 아브라함, 이삭도, 야곱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안에서 영원히 삽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하나님 앞에 보낸 분이 있습니까? 어린 자녀를 먼저 하나님 앞에 보낸 분이 있습니까? 우리는 인간이기에 슬퍼할 수 밖에 없지만 먼저 간 그들이 결코 죽은 자가 아님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ꡐ죽었다ꡑ고 하시지 않고 ꡐ잔다ꡑ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은 죽은 자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쌓여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자를 놓고 죽었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도 언젠가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생명의 주가 되심을 선언하는 것이 바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목적이었습니다. 우리 중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형제 자매들이 계십니까? 남은 인생 동안 죽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합니까?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인생을 마음 놓고 살 수 있을까요? 예수 믿으십시오.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는 그 분 앞에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십시오. 거기에 죽음을 정복한 승리가 있습니다.

또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적이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분명히 현실적으로 우리가 받아야 될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2가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울고 있는 과부를 눈 여겨 보시던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울고 있을 때 우리를 주목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한번도 눈물 흘리지 않고 세상을 사시는 분은 없습니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은 이에 대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ꡒ죄가 없는 자녀를 두신 일은 있어도,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는 자녀를 두신 일은 없다.ꡓ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자신도 세상에 계실 동안 몇 번 우셨습니다. 눈물이란 말문이 막힐 때 터지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을 때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것이 눈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눈물은 그 자체가 완벽한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역도, 설명도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완벽한 언어가 됩니다.

우리 인생을 고해라고 말합니다. 인생은 마치 고통과 슬픔이 기다리는 먼 항해 길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어찌 눈물이 없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울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죽을 때 보면 눈에 눈물이 고인 채 숨을 거두는 것을 봅니다. 태어날 때 울고, 죽을 때까지 우는 것이 인생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 문화의 밑바닥에는 우는 것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야 합니다. 슬퍼도 슬프지 않는 것처럼 하는 것이 가장이요,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처신하는 것이 위선입니다. 울 때는 울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는 것은 인생 본연의 자세입니다. 이 세상을 구석구석을 보십시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아무리 평안하고 어려움이 없는 형통한 인생을 산다 할지라도 조금만 눈 높이를 낮추어 주변을 살펴보면, 눈물 없인 쳐다볼 수 없는 참혹한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과거 일제 강점 하에서 고달픈 신앙생활을 하던 우리 조상들은 교회당에 모일 때마다 울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소리 내어 기도할 때면 그것은 통성기도가 아닌 통곡 그 자체였습니다. 6?25 사변으로 하루하루 비참한 삶을 연명해나가던 우리 부모들, 조상들에게 있어서 교회란 우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바로 울기 위해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이 울음 바다가 되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아 우는 것보다도, 인생의 무거운 짐이 너무나 괴로워서 울었습니다. 그 슬픔과 한을 풀어 놓을 데가 없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울고, 찬송하면서 울고, 기도하면서 울고, 서로 붙들고 울고, 그러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그 힘을 가지고 세상을 살았습니다. 우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귀히 여기십니다. 우는 자를 주목하십니다. 우리 가운데서 남모르게 우는 사람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울고 있을 때 주님이 여러분을 주목하십니다.

시편 56편 8절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ꡒ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ꡓ 다윗은 젊은 나이에 10년이 넘도록 정치 망명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수모와 모함과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매일 울다시피 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 다윗이 우는 장면을 자주 봅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에겐 ꡐ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야. 그러므로 내가 울 때 하나님은 내 눈물을 굉장히 소중히 보셔.ꡓ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ꡐ사람은 내 눈물을 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만은 내 눈물을 반드시 보시고, 귀중히 여기실 거야. 그러니까 나는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어. 주여, 나의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아주시옵소서. 주님의 아들이 울고 있습니다. 내 눈물을 잊지 마세요.ꡑ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눈물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도의 눈물을 귀히 보십니다.

어린 아이가 닭 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자녀가 울고 있으면 부모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우리가 울고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히스기야는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려서 다시 살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벽을 향해 대성통곡 하면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ꡒ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ꡓ(사38:5)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에게는 15년을 더 살 수 있도록 생명을 연장시켜주셨습니다. 눈물이란 이렇게 능력이 있습니다.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보좌를 움직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둘째로 우리가 받을 메시지는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 울지 말라고 위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한번은 우리 교회 부 목사님 한 분이 심방을 하면서 느낀 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교회에 부임하기 전 강남이 아닌 다른 지역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ꡐ강남이야 말로 성공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고급주택이 있고 어려운 사람이 별로 없는 부유한 촌이다.ꡑ라는 시각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교회에 와서 자신이 맡은 구역을 돌아보기 시작했는데, 마침 강남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이런 내용을 담아 편지를 띄웠습니다. ꡒ목사님, 강남이라는 겉 모습과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많은 아픔이 있다는 데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ꡓ

그러면서 몇 가지 사례를 들었습니다. 양옥집 지하나 옥상에 있는 단칸 방에 살면서 카드 빚 천 만원을 갚으려고 밤낮없이 부부가 뛰어도 갚을 수 없는 가난한 가정, 잘 사는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날마다 가출하여 부모 눈에 눈물이 마를 날 없는 가정, 남편이 실직하자 아내가 대신 일거리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가정, 살만하자 남편이 바람을 피워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는데 아내는 2년이 넘도록 그 남편을 기다리며 하나님께 눈물로 통곡하는 가정 등등 가지 각색입니다. 

물론 세상적으로 잘 살고 형통한 사람들 대부분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 스스로 예수가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찾아 나와 예수를 믿어보겠다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고통과 눈물을 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강남에 살더라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눈물 흘리며 인생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자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런 이웃들을 보면, 마치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ꡐ상한 갈대ꡑ, ꡐ꺼져가는 심지ꡑ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갈대는 강 기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풀입니다. 다른 풀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키가 큽니다. 한창 잎이 파랗게 뻗어 났을 때에는 정말 매력적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때 우리도 이런 당당한 갈대와 같이 화려할 때가 있었습니다. 남보다 성공하고 빨리 진급하며 가정이 평안할 때가 있었습니다. 젊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마음껏 즐기며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그 갈대가 상하고, 그 다음에는 꺾여 버리고 맙니다.

요즘은 전깃불 아래에서 살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제 나이만 되어도 꺼져가는 심지가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기름이 말라 없어지든지 심지가 너무 타서 못쓰게 되면 불을 켜도 불꽃이 점점 작아집니다. 살짝 열려진 문틈으로 바람만 들어와도 이내 꺼져버립니다. 등잔 위에 꺼져가는 심지란 죽음 직전을 말합니다. 소망이 별로 없는 존재입니다. 한 때는 당당하고, 한 때는 모든 사람 앞에서 자랑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중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울고 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더욱 참혹한 사실은 갈대가 상해 꺾이면 사람들은 그 갈대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안 쓴다는 것입니다. 그냥 밟고 지나갑니다. 꺼져가는 심지 역시 사람들은 아무런 신경을 안 씁니다. 꺼지든지 말든지 방 구석에 밀쳐 놓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다가 40대나 50대, 아니면 일찍 30대에 상한 갈대처럼 꺾여버리고 등잔의 심지처럼 꺼져버리면 얼마나 세상이 야박한지 체험해보셨습니까? 사람들은 쌀쌀 맞게 등을 돌립니다. 그리고 비정하게 밟고 지나갑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다릅니다. ꡐ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ꡑ(마12:20) 오히려 주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를 보시며 ꡒ울지 말라. 내가 네 눈물을 씻겨주겠다.ꡓ고 말씀하십니다.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를 보시며 우리 등에 손을 얹으시고 ꡒ울지 말라. 내가 너를 위로해주겠다.ꡓ고 속삭여주십니다. 그러면 주님이 어떤 방법으로 우리 눈의 눈물을 씻겨 주실까요? 과부의 아들처럼 당장 무덤에서 죽은 아들을 살려주실까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눈에 눈물을 씻겨 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실까요?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2가지 답이 나옵니다. 

하나는 히브리서 4장 16절에 그 방법이 적혀 있습니다. ꡒ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ꡓ 여기에서 ꡐ때를 따라 돕는 은혜ꡑ란 내가 필요할 때마다 도와주시는 은혜가 있음을 말합니다. 주님은 내가 필요할 때마다 도울 수 있는 은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면, 항상 필요를 따라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주님의 손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런 체험을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시간이 없을 정도입니다. 분명히 좋으신 우리 주님은 울고 있는 우리를 주목하시고, 우리의 눈물을 소중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울지 말라고 하신 다음, 우리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시고, 때를 따라 필요한 은혜를 그때그때 적절하게 허락해주시면서 우리의 눈에 눈물을 씻겨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로마서 8장 28절에 나옵니다. ꡒ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ꡓ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은 우리 눈의 눈물을 씻겨 주시고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것은 굉장히 큰 그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어떤 어려운 인생의 풍랑을 만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됩니다. 1년, 2년, 3년이 가도 문제 해결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의심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럴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의 눈물을 씻겨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정신을 차릴 수 없고, 해답을 얻을 수 없지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큰 그림을 하나님께서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어쩌면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당대에서는 보지 못하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크고 선하신 큰 뜻을 갖고 우리를 다루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 눈에서 눈물을 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 나오미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ꡐ희락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좋은 이름 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나오미라는 이름으로 잘 짖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팔자가 너무나 기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 땅에 흉년이 들자 남편과 함께 아들 둘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아들 둘을 결혼까지 시켰습니다. 한동안은 행복한 가정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10년이라는 짧은 사이에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큰 아들이 죽었고, 오랜 후에 둘째 아들도 죽었습니다. 한 마디로 집안의 남자들은 전부 다 죽고 만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마치 저주 받은 집안 같았습니다. 이제 나오미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밖에 안 되는 젊은 자부 둘, 이렇게 과부 셋만 남은 가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룻기서를 읽어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런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만 했을까요? 하나님은 당장 해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나중에 고향으로 나오미가 돌아올 때 둘째 자부인 룻을 데리고 돌아 왔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나중에 그 자부가 재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오벳입니다. 오벳은 다윗 왕의 할아버지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왕통이 그 과부 둘을 통해서 이어지고, 그 왕통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만약 나오미가 그런 끔찍한 비극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되는 확률은 백만 분의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비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 왕의 혈통을 조성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의 길을 닦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엄청난 계획이었기 때문에 나오미로서는 미처 알 수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 그 누구도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한 뜻을 가지고 그 계획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모든 것이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고생하며 고통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믿음이 좋은데도 눈물이 떠날 날이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던지, 아니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려는 큰 계획을 갖고 계시던지 둘 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아니면 때가 되어 이 둘을 다 주시면서 눈물을 씻겨 주신다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 부교역자 중 자기 아버지가 목사였던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젊었을 때, 은혜를 더 받아보려고 산에 가서 40일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애들을 몇 낳아놓고 가난한 교역자 생활을 하는데, 그런데 금식 기도를 하다가 그만 죽은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금식 기도를 했으면 성령충만을 받아 펄펄 뛰어서 내려오든지, 아니면 무슨 능력을 얻어 굉장한 종이 되어서 내려오든지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그것도 목사가 죽다니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수십 년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우리가 넓게 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목사가 된 그 아들을 앞으로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실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눈물이 눈물로 끝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이 비록 초라하고 보잘 것 없지만, 주님을 의지하고 인생을 사는 자는 결코 눈물이 눈물로 끝나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눈물로 뿌린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눈물의 나날을 보내시는 분이 있다면, 그 눈물을 주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것을 믿고 주님 앞에 나가십시오. 그리고 울지 말라고 하시는 주의 음성과 위로를 들으십시오. 그리고 절대 낙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내일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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