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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세 가지 특징 / 롬 3: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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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복음의 세 가지 특징
주제 :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성구 : 로마서 3:21-24


말씀의 제목은 ‘복음의 세 가지 특징’입니다. 주제는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 않는다.’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만을 보십니다.

기독교 복음의 특징은 행위로 인간의 구원이 결정되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거의 행동을 묻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병든 육체와 정신을 고치시고 새롭게 거듭나게 하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인간은 만들어진 자이고, 만들어진 자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것이 성경의 입장입니다. 또 과거에 아무리 못된 삶을 살았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그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질지언정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만세 전에 우리 죄지은 인간들에게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시고, 하나님 당신께는 우리 죄지은 인간을 대신해서 저주와 죽음을 당하기로 예정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잘나고 못난 것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유일한 가치는 예수를 우리 각자의 주로 고백하며 또 하나님을 죽어 무덤 속에 있는 예수를 살리신 분으로 믿는 것(롬 10:9)입니다. 하나님은 입으로 고백하는 이 믿음만을 보시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죽어 가는 모든 것, 또는 죽어 있는 상태,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혹은 영적인 것이든 간에 죽어 가는 것들 또는 죽어 있는 것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셨고, 또 다시 살아나게 하실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할 하나님은 죽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살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어야할 하나님은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과거 2000년 전에 바리새인들은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지난날의 잘잘못을 따지는 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조상의 죄를 후손에까지 벌하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입밖에 발설하지를 못하였고, 안식일에 지켜야할 서른아홉가지 금지조항과 매일의 삶 속에서 지켜야 할 613개의 율법조항을 만들어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조항들은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죄의식만 가중시키는 가혹한 형벌이자 민중을 억압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굴러 내린 무거운 돌을 간신히 언덕 위에 올려놓으면 이내 다시 굴러 내리고 안간힘을 써서 다시 올려놓으면 이내 다시 굴러 내리곤 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시쉬포스(Sisyphus)의 영원한 지옥의 형벌’과도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안식과 평안이 있었을 리 없었습니다. 고단하고 지친 영혼들에게 안식과 쉼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짓누르고 고통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행위를 보시기에 앞서 믿음을 보십니다. 결과를 보시기에 앞서 성실함을 보십니다. 과거를 묻기보다는 현재의 회개하는 마음을 보십니다. 어제보다는 오늘을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과거보다는 현재를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과거 다섯 남편이 있었고, 현재 한 남자와 동거 중이었던 한 불행한 여성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예수는 그녀의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신령과 진실한 예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끌려온 한 여성에게 예수는 그녀의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돌 몰매를 맞아 죽을 상황에 처한 그 불쌍하고 가련한 여성의 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가버리고 아무도 없을 때, 예수는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0-11)고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특징은 차별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잘잘못을 떠나서, 잘나고 못난 것을 떠나서, 적어도 구원과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묻지 않습니다. 18세기말 19세초 조선시대에 기독교 복음을 받아드린 그리스도인들은 신분차별을 철폐하였습니다. 교인들은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며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신분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황일광이란 백정출신의 기독교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청소년 시절을 모든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보냈습니다. 그런 그가 기독교인이 되자, 교인들은 그를 친형제처럼 대우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농담조로 “사람들이 너무 점잖게 대해 주기 때문에 내게는 이 세상에 하나, 또 후세에 하나, 이렇게 천당 두 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정조대왕이 죽고 정순왕후와 홍낙안이 이끄는 북인 벽파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드렸던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다수의 남인 시파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천주교를 박해할 당시, 그 죄목들 가운데 한 가지가 천국신앙으로 사회개혁을 꾀하고,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며, 양반과 상놈의 신분타파로 반상체제를 위협하는 국가의 원수 집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첩의 자식을 서자라 하여 좌족(左族), 반사(半士), 사점박이 등으로 천대받고 과거도 보지 못하고 제사에서도 소외 받았으며 가계(家系) 상속에서도 소외 받기가 다반사였습니다. 19세기 초엽 신자가 비신자를 전도하는데 있어서 가장 컸던 고충이 다름 아닌 양반 상놈, 적자 서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같은 계급으로 인식하는 기독교의 평등사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천당은 좁고 입구도 바늘구멍 같다던데 어떻게 상놈이나 서자가 또 미천한 계집이 들어갈 틈이 있겠느냐는 것이 믿음을 외면하는 큰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 난관을 극복하는데 동원된 선교 도구가 바로 프랑스 신부들이 신고 들어온 양말이었습니다. “믿음이란 지극히 공평한 것으로 그 앞에서는 양반도 상놈도 지아비도 지어미도 또 어른도 아이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 양말이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 어느 누구의 발에도 신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하고 양말을 신겨만 보이면 손쉽게 깨닫고 예수를 구세주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 1839년에 순교한 베드로 신대보(神大輔)가 샹스탕 신부에게 부친 편지 가운데 적혀 있습니다.

바울서신 빌레몬서에 보면 오네시모라는 노예출신의 그리스도인이 나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에게 상당한 손해를 입히고 로마로 도망친 죄수였습니다. 법대로 하자면, 오네시모는 불에 달군 쇠로 이마에 F자를 새기고 채찍을 맞은 후에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오네시모를 동역자로 삼기를 원했고,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노예로서가 아닌, 사랑하는 형제로서 영접해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서 16절에서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고 말하면서 더 이상 오네시모를 노예로 받아들이지 말고 노예 이상의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형제로서 영접하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신분의 차별이나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일 뿐입니다.

본문 로마서 3장 21절을 보면, 이제 인간을 억누르는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구약성경에 예언되어진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한 의’는 앞서 말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말한 대로, 죄지은 우리 인간들에게 저주와 사형을 받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축복과 생명을 주기로 작정하시고, 하나님 당신께는 우리 죄지은 인간을 대신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저주와 죽음을 당하기로 예정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 ‘의’는 차가운 정의나 냉혹한 심판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따사로운 하나님의 사랑과, 자애로움을 말합니다.

이 사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처벌을 받으셨다는 이 선포가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시는데, 흑인이어서 안 되고, 못생겨서 안 되고, 가난해서 안 되고, 상놈이어서 안 되고, 여성이어서 안 되고 하는 식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그분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고 안 믿는 다 한 가지 조건이 있을 뿐입니다. 믿고 안 믿는 것 이외에 차별은 결코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에는 값이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특징은 값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24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의롭다 하심’이란 법정용어입니다. 재판장이 법정에서 무죄선고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재판장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유죄한 인간을 믿음 하나만 보시고 무죄를 언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죄 없는 거룩한 자로 취급하십니다. 믿는 자가 실질적으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주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간주된 의’라고 말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의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인간에게 전가되었다 하여 ‘전가된 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의 것으로 전가되기 때문에 이를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은혜란 무엇입니까? 넓은 의미에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죄의 용서와 구원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따름이 없는 은혜를 ‘값싼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차별 없이 또 값없이 선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차별 없이, 그리고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세 가지 특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사람답게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믿음이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것입니다(롬 10:9). 예수가 누구이십니까? 죽음을 이긴 부활의 주가 아니십니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생활 속에서 순간 순간 우리를 죽이려 하고 짓누르는 죽임의 생각, 죽임의 일들을 극복하고 살림의 생각, 살림의 일을 하는 것이 믿음의 생활입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확신 속에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생활입니다. 또 바울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롬 8:37)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확신 속에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생활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활 속에서 차별 없는 공정하고 공평한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아무런 값없이 은혜의 선물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을 주신 것처럼, 값없이 주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대가를 기대하고 계시겠습니까? 대가를 기대하기보다는 먼저 솔선하는 하나님이 본을 보이신 복음의 정신을 가지고 넉넉한 삶을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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