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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대로 / 왕하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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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대로
왕하 4: 1-7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오늘은 열왕기하 4장 1절에서 7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믿음대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믿음대로 살면 믿음대로 받고 믿음대로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송충이는 솔잎으로 말미암아 살고, 누에는 뽕잎으로 말미암아 살고, 장사꾼들은 이문으로 살고, 학자들은 지식으로 살아갑니다. 학자에게 지식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학자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믿음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중에 나는 이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더니 바라는 것들이 그대로 실상 즉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하신 일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사건을 본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믿음만큼 되어지고, 믿음대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믿음대로'라고 정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경외하는 믿음 (1-)

  구약 성경에는 '경외'라고 하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혹은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은 히브리말로 기록되어 있기 까닭에 '경외'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야레'라고 합니다. '야레'는 사실상 아주 쉬운 말입니다.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말로는 '경외하다'라는 말로 어렵게 번역을 한 것뿐입니다. 이 말을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좀 무서워할 줄 아는 믿음,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믿음이 제대로 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경외하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외하는 믿음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다' '두려워하다'라고말 할 때 한 밤중에 도적놈이 들어오면 그 도적놈을 무서워하듯이 무서워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말은 같아도 개념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무서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믿음의 생활을 하였음에도 사실상 죽는것을 무서워합니다. 또 요즘 사업하다 망하면 도망을 다녀야 하기에 망할까봐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는 병중에 가장 많은 병이 암이 아닙니까? 우리 교회 이우건 집사님이 지난밤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죽을 나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처와 자식을 남겨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은 간암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암에 걸릴까봐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나는 그런 것이 무섭지 않다고 합니다. 사람은 언제 죽어도 전부 죽기 까닭입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흥할 때도 있고 망할 때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병에 걸릴 수도 있고 나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곧 죽어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시면 금덩어리를 가져다 주면서 하라고 해도 네가 다 가지라고 하면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만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나가면 일당 백을 하고 일당 천을 합니다. 세상이 그를 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목사님, 우리가 하나님을 왜 무서워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면 항상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방패 양면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방패가 있는데 한 쪽은 금으로 되어 있고 한 쪽은 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사 둘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고 있습니다. 선비가 말리고 보니 한 무사는 분명히 방패는 금으로 되어 있는데 저 사람이 자꾸 은 방패라고 우기니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다른 무사에게 물어 보았더니 분명히 은으로 되어있는데 자꾸 이 사람이 금방패라고 우겨서 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비가 보니 나무에 걸린 그 방패는 한쪽에는 금이요, 한쪽에는 은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방패 양면이라고 하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에 싸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서도 부부가 왜 자꾸 싸우는 것입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당회가 모였을 때 또는 제직회가 모였을 때 왜 싸웁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천하만민이 열번 죽었다 살아나도 마땅한 그런 죄인들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고 또 사랑을 베풀고도 그 사랑이 남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뒷면을 보면 즉 뒤집어 놓으면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만큼 하나님의 공의를 똑같이 강조해야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인 만큼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쥐꼬리만한 죄도 타협을 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전부 뒤집어쓰시고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우리가 죽을 대신 죽으셨기 까닭에 우리가 저주와 죽음을 면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고도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게 되면 제멋대로 살고, 제멋대로 놀아나면서 할 말, 못 할 말을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버릇이 없습니다. 천방지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 할 줄 아는 믿음이 바로 된 믿음입니다. 그 믿음 그대로 크게 받고 크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을 보면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엘리사 시대에 신학교가 하나 있었습니다. 신학교의 교장은 엘리사 선지자였습니다. 그 학교에 다니는 신학생 중의 하나가 장가를 들어 두 아들을 낳고는 신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많은 빚을 남겨 놓고 그만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학생의 아내는 남편을 잃고 젊어서 과부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죽자 빚쟁이가 와서 빚을 받고자 하나 받을 재간이 없기 까닭에 젊은 과부가 눈을 뜨고 있는 앞에서 두 아들을 빼앗아다가 자기의 종을 삼고 때가 되면 팔아서 돈을 받아 빚을 해결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는 말이 이쯤 되면 그대로 적용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남편의 스승 되는 엘리사에게 나온 것입니다. "나의 남편을 내가 지켜보았고 또 스승님이 가르쳐 보아서 알겠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목사나 장로 같은 중직에 있는 분들의 자녀들 중에 간혹 탈선하고 삐뚤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저렇게 거룩 거룩해도 그 믿음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내 어머니가 성경 찬송을 들고 심방을 다녀도 그 믿음 역시 가짜라는 것입니다. 자녀의 눈에 비친 부모의 믿음이 가짜인데 자녀들이 왜 이어받겠습니까? 교회에서는 거룩 거룩하면서 집에 와서는 형편이 없는지라 자식들이 자기 부모들의 믿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남편에 대한 믿음을 그 아내가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반드시 집고 넣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금년 말이 되면 38년 동안 광성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저와 함께 38년을 광성교회에서 믿음 생활하신 분, 30년, 25년, 15년, 10년을 함께 하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김창인 목사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여러분들이 알면 무엇을 또 얼마를 알고 있습니까? 저의 겉모습밖에 더 알겠습니까? 진정으로 나를 잘 아는 사람,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아는 사람은 제 아내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향해서 천사 같다고 하여도 내 아내에게 가서 물어 보십시오. 내 아내가 '아니오'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이 김창인 목사가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내 아내가 '좋은 사람이다'라고 하면 좋은 사람입니다. 저를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지붕 밑에 살고 한 솥의 밥을 먹고 한 이불 속에서 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저와 한 이불 속에서 잔일이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언제 저와 한 이불 속에서 잠을 잤습니까? 그러니 알기는 무엇을 압니까?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신학생의 아내가 자기 남편을 가장 정확하게 알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녀의 고백이 내 남편이 그렇게 여호와를 경외했다는 것입니다. 남은 것은 빚밖에 없지만 사실 그 남편 그리고 그 아버지의 믿음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외하는 믿음 그 믿음이 엄청난 문제를 전부 해결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볼까봐 무섭고, 사람이 알까봐 무섭고, 사람이 들을까봐 무섭습니다. 사람을 그렇게 무서워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보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무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몰라도 전부 알고, 전부 듣고, 전부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을 무서워하는데 사람이 보면 어떻고 안 보면 어떻습니까? 사람이 무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 경외함으로 사는 믿음이 진짜가 아닙니까? 제대로 된 믿음이요, 질 좋은 믿음이요, 건강한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아서 그 믿음대로 받으시고, 그 믿음대로 되시고, 그 믿음대로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기도하는 믿음 (2-6)

  마태복음 6장 8절을 보면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전부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두 다 가지고 계시고 우리는 아쉬워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기도라는 방법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방법으로 온갖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을 보면 하나님은 전도라는 미련한 것으로 믿는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예수 믿고 구원 얻으십시오", 또는 옆집에 찾아가서 "교회에 나오십시오. 예수 믿고 구원 얻읍시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게 보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전도"라는 미련한 방법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무식한 할머니들이나 하는 넋두리쯤으로 생각하며 어리석다고 여기지는 않으십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기도라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지 못해 살아 있는 난감한 처지였습니다.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너희가 살던 저 가나안 땅을 에덴동산처럼 회복시켜 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이 약속된 것입니다. 지금 이 백성들은 희망 없이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과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백성들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가로 막혀 있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그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그 때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래도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지기를 내게 기도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겔 36:37). '그래도'는 '하나님이 에덴동산처럼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하셨을지라도'라는 뜻입니다.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지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라는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받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반드시 그 약속을 기도로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믿음을 갖고 그 믿음대로 받고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절에서 6절을 보면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에게 신학생의 아내가 하늘이 무너지는 듯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심정으로 나아가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지금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되었고 두 아들이 무럭 무럭 자라고 있는데 빚쟁이가 와서 빚을 못 받을 것 같으니까 내가 두 눈을 뜨고 있는 앞에서 두 아들을 빼앗아다가 종으로 삼고 때가 되면 팔아 돈을 받고 빚을 해결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에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너희 집에 무엇이 있느냐?" "기름병에 기름이 조금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돌아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되 동네에서 어느 집이든지 빼지 말고 그릇을 빌리되 빈 그릇이란 빈 그릇은 전부 빌려오고 문을 닫은 후에 기름병을 거꾸로 쏟고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응답을 받고 동네 사람들의 집집을 다니면서 큰 그릇, 작은 그릇, 큰 독, 작은 독할 것 없이 전부 빌려다가 하라는 대로 옮겨 놓았더니 전부 채워졌습니다. 기도로 그 큰 문제 자체가 해결된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떻게 선지자에게 나아가서 대화를 하는 것이 기도냐?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묘한 진리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9장 9절을 보면 '옛적 이스라엘에 사람이 하나님께 물으려 하면 말하기를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으니 지금은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지자에게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 묻고 싶어서, 응답을 받고 싶어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영감으로 선지자에게 응답하시고 선지자는 그 백성에게 대답해 주는 것입니다. 선지자로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사장 중에 제사장이요, 선지자 중에 선지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두고는 선지자 중에 선지자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기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는 하나님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기름이 전부 빈 그릇에 가득 찼습니다. 저는 그 값을 계산해 보고 싶었지만 계산이 나오지 않아서 계산을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돌아가서 컴퓨터에 물어 보십시오. 그 값이 얼마인지를 말입니다. 아마 컴퓨터도 그 값을 모를 것입니다. 기도하는 믿음 그대로 받고,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영국에 올리버 골드 스미스라고 하는 아주 마음씨 착하고 훌륭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주 남루한 옷을 입은 중년의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의사가 볼 때도 가난이 철철 흘러 넘쳤습니다. "선생님 내 남편이 누워서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병원에 올 수가 없으니 우리 집에 왕진을 해 주셔서 진찰을 하고 처방을 내려 고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여인을 아래 위로 가만히 살펴보더니 가자고 하였습니다. 먼길을 왕진을 합니다. 진찰을 해 보고는 병원까지 다시 가자고 하였습니다. 병원에 돌아와서 조제실에서 약을 조제하여 조그만한 상자에 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상자에는 약이 가득 들어 있고 처방전이 들어 있으니 집에 가서 열어 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아내가 한걸음이라도 빨리 가려고 걸음을 재촉하였고 남편이 보는 앞에서 그 상자를 열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속에 돈이 꽉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방전에는 '먹고 싶은 것을 실컷 사 먹으십시오. 당신의 병은 병이 아니라 너무 가난해서 먹지 못해 너무 허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의사의 처방대로 실컷 먹고 나니 기운이 넘쳐서 일어났습니다.

  이 간단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느끼고 배울 바가 없습니까? 의사만이 고친다고 하는 그 병, 만병의 의사가 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것을 못 주실 것이 없으신 하나님께 남루한 여인이 찾아와 하소연하듯이 하나님께 나와서 일대 일로 여러분들의 난감한 문제를 의논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주시는 날에 그 응답의 상자에는 여러분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넘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대로 받고 기도하는 대로 되어지는 진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빚을 갚는 믿음 (7-)

  본문으로 돌아가서 7절을 보면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고한대 저가 가로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기름 그릇 혹은 기름 독에 기름이 가득 채워졌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이제는 되었다'라고 하면서 새벽 기도회에 나오던 사람, 철야 기도회에 나오던 사람이 안 나올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요즘 왜 기도하러 안 나오세요?"라고 하면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기도가 달라고 졸라대는 것만이 기도입니까? 이 여인을 보십시오. 뚜껑을 덮고서 다시 나왔습니다. "하라는 대로 했느냐?" "했습니다" "어떻게 되었느냐?" "가득 찼습니다" "팔아라" 이 여인이 팔 줄을 몰라서 나왔습니까? 허락 받으러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달라고만 했지 우리가 받은 것을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쓰느냐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요?" "빚을 갚아라" '먼저'라는 단어 자체는 없지만 빚 갚는 것을 먼저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요?"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평생 먹고 남는다는 뜻입니다. 엄청난 문제가 전부 해결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빚을 먼저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빚 갚는 믿음이 귀합니다.

  빚 이야기를 하니까 지겨운 빚 이야기를 왜 하십니까?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빚은 지겨워할 문제가 아니라 감사할 문제입니다. 내가 10년 동안 공을 들여서 조그마한 기업을 하나 키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자금을 더 투입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고비가 오늘 내일입니다. 돈을 더 투입하지 않으면 깨끗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누가 나를 믿고 돈을 꾸어 주었습니다. 나를 믿고 돈을 꾸어준 그 빚이라고 하는 것은 지겨운 문제입니까? 감사할 문제입니까? 감사할 문제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믿고 돈을 꿔 주어서 지겹다'고 한다면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사업에 돈을 투입하니 사업이 잘 돌아가서 돈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지겨운 문제입니까? 감사할 문제입니까? 감사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돈을 갚아야 하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나에게 돈을 꾸어줄 때 자기의 살과 같은 돈을 꾸어준 것입니다. 그 돈을 꾸어 주었기에 그 돈을 가지고 내가 이렇게 성공했는데 빚을 갚을 때 지겨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감사하며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빚을 갚을 때는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갚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많이 갚을수록 내 마음은 가벼워지고 시원해지고 기뻐지면서도 목에 힘은 줄 수가 없습니다. 너를 도와  주고는 유세를 부리고 목에 힘을 줄 수 있으나 빚을 갚고는 유세를 부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빚 갚는 생활입니다.

  여러분은 돈 빚을 진일이 없습니까? 나는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 어머니께 진 빚이 엄청납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빚을 지고 지금의 내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님 잘 모십시오.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하시겠습니까? 날 낳아 주시고 키워주시고 장가보내서 살림을 따로 내 주면 되는 것이지 무엇을 더 해 달라는 것입니까? 부모님께 잘 해 드리고 감사하십시오. 유세는 부리지 마십시오. 이것이 부모님께 빚 갚는 길입니다.

  나에게는 귀한 목사님 한 분이 계신데 그 목사님의 빚을 지고 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훌륭하지 못합니다. 훌륭하다 할지라도 내 믿음이 혼자 크지를 못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저를 위해서 새벽마다 기도해 주시고 하나님 말씀을 떠 먹이듯이 가르쳐 주고 설교를 요리사처럼 준비해서 한 말씀 한 말씀 가르쳐 주셔서 제가 그 말씀을 받아  먹고 믿음이 자라 목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혼자서 저절로 믿음이 큰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 목사님은 나에게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목사에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는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에게 잘 하는 것이 아첨이요, 아부가 되는 것입니까? 그 목사님께 빚을 지고 내가 나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잘 돌보아 주는 목사들에게 빚을 갚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진 빚이 있습니다. 자기의 외아들을 대신 죽으라고 내 놓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잘 해 드릴수록 마음은 가볍고 시원하고 기뻐하면서 하나님 앞에 유세는 부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빚 갚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빚을 떼어먹고 잘 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빚을 잘 갚으면 하나님께서 더 많이 주시고 더 크게 주실 것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첫째로 경외하는 믿음 그대로 살아갑시다. 신학생의 아내는 그 믿음 그대로 살고 그 믿음대로 받아 큰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둘째로 기도하는 믿음 그대로 살아갑시다. 신학생의 아내는 기도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나게 약속된 큰 축복을 기도로 받아 큰복을 누렸습니다. 셋째로 빚 갚는 믿음 그대로 살아갑시다. 빚은 감사할 일이요, 빚은 꼭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빚을 갚고 났더니 더 크게 주고 많이 주시더라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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