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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위한 부자가 되라 / 눅 12: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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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위한 부자가 되라
누가복음 12:16-21
옥한흠 목사 (사랑의교회)


언젠가 우리 교회 한 자매가 제게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 납니다. "목사님, 사랑의교회는 헌금 설교를 안 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러고 보니 정말 1년이 가도록 헌금 설교를 거의 안 하다시피 하면서 지금까지 목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의 이야기가 한편으론 '헌금 설교를 안 하니까 부담이 안돼서 너무 좋습니다. 헌금을 하든 안 하든 교회가 별 간섭을 안 해서 마음 편하게 교회 다닐 수 있고요.'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헌금 설교를 안 해도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기쁨으로 헌금하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좋아요.'라는 긍정적인 말로도 들렸습니다. 적어도 헌금이란 은혜 받을 때 하는 것이며 은혜 받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목회 신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헌금에 관한 설교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이 자랑은 아니며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 밥 러셀(Bob Russell)이라는 목사님의 간증문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저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분은 처음 목회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부분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나는 헌금에 관해서 꼭 한 번만 설교해야 겠다. 아무래도 헌금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부담을 느낄 테니까....'  그리고는 정말 한 번만 헌금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설교 할 때 특별히 교인들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제가 헌금 설교를 합니다. 부담스럽더라도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1년에 꼭 한 번만 하겠습니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읽고 깨닫는 중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간음하지 말라. 성적 범죄를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엄한 명령으로써 이에 불순종하면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헌금도 하나님의 명령인데, 어떤 말씀은 성도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1년에 한번만 설교하고, 어떤 말씀은 부담이 없어 언제든지 설교 할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간음에 관한 설교를 한다고 합시다. 오늘 현대 사회를 보면 성적으로 잘못된 숨은 행위를 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성적 범죄에 연루되어 있을 정도로 타락한 세상입니다. 그럴지라도 간음에 관해 설교할 때, "오늘 제가 여러분들 귀에 거슬리는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만약 성적 문제에 연루된 분들이 있다면 특별히 양해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여러분에게 좀더 편안한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 말씀에 거부감을 느껴 예배 중간에 일어나는 사람이 몇 명 생기더라도 거기에 구애 받지 않고 '간음하지 말라'고 전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헌금도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러셀 목사님이 이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1년에 세네 차례씩 헌금에 대해서 시리즈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도 수는 더 많아지고 헌금도 15%나 더 증가했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교회는 목사님께 "바른 헌금 생활에 대해 잘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나 카드도 보내었다고 간증했습니다.

헌금 설교를 많이 안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을 하든 열 번을 하든 바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헌금을 제대로 하는 신앙생활을 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성공하는 신앙인입니다. 헌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합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실패하는 신앙인입니다. 이 사실을 꼭 명심해두십시오. 

예수님께서 주신 이 비유의 말씀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농경 사회였습니다. 농사를 지어 얼마나 추수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재산과 부가 판가름 되는 시대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수확이 몇 배로 늘어 창고를 자꾸 지었습니다. 손만 대면 황금알이 들어오는 것 같은 엄청난 축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교만한 생각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구나! 이제 이만큼 재산을 모았으면 됐어. 저금통장으로 보나, 주식에 투자한 것을 보나, 부동산을 사 놓은 것을 보나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러니 내 영혼아, 이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편안히 쉬면서 즐거워하자.'

그러나 사람은 듣지 않았지만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통촉하시는 하나님은 그 내면의 숨은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는 책망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겠다. 그렇다면 네가 쌓아놓고 즐기자고 한 그 재산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그리고는 그날 밤 그 영혼을 불러가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부자는 4가지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첫째로 자기 재산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관리자일 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께서 잠시 그에게 맡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주인인 줄 착각했습니다. 자기 손에 있기에 내 것이라고 하는 단순한 사고방식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대상29:11) 천하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두려워 떨며 청지기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되는데, 이 부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재물을 쌓고 즐기는 데만 사용했지 그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해야 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재물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선하게 써야 하는데 돈을 벌면 벌수록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돈을 내가 즐길 수 있는 나의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셋째로 쌓아 놓은 재물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거나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쌓아 놓은 재물도 자신을 오래 살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즐기고 건강관리를 하고 모든 면에서 노력해도 자기 생명은 자기 맘대로 할 수 없음을 그는 몰랐습니다. 

넷째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면 빈털터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땅에 있는 곳간에는 잔뜩 쌓아 놓았지만, 막상 천국에 가보니 빈손이었습니다. 설령 자기가 그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이처럼 이 부자는 4가지를 모르고 살다가 인생을 끝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바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 엄숙한 자세를 가지고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부자가 되는 한 생을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부자가 되는 한 생을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재물을 쌓는 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 재물을 쌓는 자가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과연 세상에서 부자 되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하나님나라에서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지 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돈이란 원래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재물이란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것으로, 바로만 쓰면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을 살면서 인간답게 살고 인간답게 대우 받기 위해 돈이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건입니다. 특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는 돈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돈이 없이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킵니까? 돈이 없이 어떻게 가정을 행복하게 꾸려갈 수 있습니까? 돈이 없이 어떻게 인간답게 여가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돈이 없으면 어떻게 선한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까? 돈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천하게 여기거나 정죄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목적도 내가 수고한 만큼 대가가 돌아온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입니다. 수고한 만큼 거두는 것이, 눈물로 씨를 뿌리는 만큼 기쁨으로 수입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반면에 이 돈은 불의한 재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물, 돈이라는 것은 단순한 지폐, 수표가 아닌 그 이상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돈은 사악하고 무서운 힘을 지닌 괴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과 가치관을 지배하는 폭군으로서 군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신까지도 마음대로 유린하는 천하무적의 괴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돈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돈 앞에서 쩔쩔 매고 아부합니다. 돈이 마치 하나님인 양 엎드려 절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30여 년 전만 해도 대학 신입생들에게 어떠한 인생을 살고 싶냐고 물으면 두말없이 의미 있는 생을 살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10명 중 8명이 많은 직업을 가지고 평안하게 살고 싶다고 거침없이 대답합니다.

비단 특정 나라에 국한된 상황만은 아닙니다. 미국은 물론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돈이 우리의 가치관을 변질시켜놓았습니다. 보수만 많으면 자신의 직업에 보람을 느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돈을 많이 주는 직업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가치를 수입의 가치와 동일시합니다. 수입이 많은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 삶의 가치도 높은 삶을 산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만큼 우리의 가치관이 뒤틀려 버렸습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수입이 얼마인지에 따라 그의 인격을 논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한 예로 로또 복권 열풍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땀 흘려 열심히 수고해서 돈을 벌려는 생각은 안하고, 어떻게 하든지 쉽게 한꺼번에 돈을 손에 쥐어 보고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모두 일확천금의 꿈에 최면이 걸려 있습니다. 다음은 13명이 1등에 당첨되어 64억 원을 받게 되었다고 떠들썩할 때 TV에 방영된 인터뷰 내용입니다. 기자가 질문 했습니다. "64억 원을 한꺼번에 손에 쥔 사람 아시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자 30대 초반의 한 자매가 조금도 거리낌 없이 대답했습니다. "너무 부러워요. 그래서 오늘 저도 한 장 샀어요." 만일 50대 되는 실직 당한 한 남자가 나와서 그런 인터뷰를 했다면 '얼마나 인생의 짐이 무거우면 그럴까?' 하고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제 30대 꽃다운 나이에 있는 젊은이가 너무나 부럽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회가 되었다니 개탄할 일입니다.

우리는 돈의 양에만 눈이 어두웠지, 돈의 질에 대해서는 제대로 분간할 수 있는 눈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돈에는 불의한 돈이 있는 반면 의로운 돈이 있습니다. 더러운 돈이 있는 반면 깨끗한 돈이 있습니다. 아마도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셨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한 복권 당첨자는 10만 불, 곧 1억이 넘는 돈을 구세군 선교단체에 헌금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선교단체에서 그 헌금을 놓고 이것을 받을 지 돌려줄 지 토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돈을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박으로 번 돈은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일 것입니다. 아직도 돈의 가치를 볼 줄 알고 돈에 대한 양심이 살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돈은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면 대단히 무서운 해독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돈을 쌓으면 쌓을수록 더 탐욕이 생기는 중독 증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재물에 관한 한 굉장히 엄하게 말씀합니다.

한 예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이런 교훈을 주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6:17-18) 곧 너희 교회에 잘 사는 사람들에게 명령하라는 것입니다. 행여나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까봐, 상처를 줄 까봐 부드럽게 말하지 말고 단호하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돈 좀 있다고 거드름 피우지 말라고, 재물이 아닌 하나님께 마음을 두며 선한 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만일 그 명령에 순종하면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복을 받는 자들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거역하여 채찍을 맞는 자들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돈 문제를 엄하게 다룹니다. 그만큼 돈에는 위험한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로 우리는 세상에 살 동안 많은 재물을 다룹니다. 한 달에 2백만 원씩 번다고 할 때, 30년이면 7억 2천 만원이 됩니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하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부자처럼 빈털터리가 되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된다는 뜻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20절에서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된다는 것은 나에게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재물을 하나님나라에 쌓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6장 33절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20절에는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를 잘 해서 열 달란트를 주인에게 돌리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얼마의 재물을 주시고 그것으로 평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재물을 선한 일에 잘 사용하고 그것을 배로 증식해서 나중에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도록 하라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또 어떤 성경에는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말씀을 종합해보면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재물을 하나님이 원하는 일에 바로 써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칭찬 받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흡족하시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수고해서 번 것이므로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생각은 아주 저질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기독교 사상이 사회 저면에 깔려 있는 선진국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저질적인 사고로 인정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그렇게 취급해 버립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재벌이라고 하는 빌 게이츠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자기가 만든 빌 앤드 멜린다 재단(Bill and Melinda Gates Foundations)에 1998년도부터 자기 재산의 60%를 기부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많은 액수를 기부해서 가난한 자, 교육 사업, 복지 사업에 투자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선배 기업인이 자기를 찾아와서 이렇게 충고했다고 합니다. "빌, 그렇게 많은 돈을 은행에 처 박아 두는 것이야 말로 자네가 돈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게." 빌 게이츠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그때부터 자기 재산의 60%를 기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계적인 재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나이로 봐서는 인생을 살만큼 살았고, 하나님 앞에 설 날이 상당히 가까워 왔음에도 계속 은행에 저금할 생각만 하고, 재산 증식에만 신경 쓰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이것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잘못 사용하는 것도 없습니다. 쌓아 놓기 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와 맞먹을 정도로 바보 같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기 위해 실천해야 될 것이 있다면 헌금입니다. 가장 소박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헌금입니다. 성경이 정하는 적정한 헌금을 하나님 앞에 구별하여 드림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요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제 막 결혼하여 직장을 얻은 사회 초년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열심히 벌어라. 즐겨라. 빚지면 갚아라. 조금 여유가 있으면 저축해라. 그리고 형편이 괜찮으면 기부해라." 그런데 이렇게 흔히 가르치는 내용을 유명한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은 거꾸로 뒤집어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첫째는 열심히 버십시오. 둘째는 헌금하십시오. 셋째는 저축하십시오. 넷째로 진 빛은 갚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즐기십시오." 바로 이것이 정상적인 순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헌금을 앞세우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헌금이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씻으시고, 영광스러운 그의 아들로 삼으셨으니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잠깐 있다가 가는 세상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끝나도록 하지 않으시고,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준비하신 후 값없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해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흥분을 감출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흠뻑 젖을 정도로 사랑해주셨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우리 교회에서 레나 마리아(Lena Maria) 공연을 했습니다. 이미 매스컴을 통해서도 보았겠지만, 그녀는 스웨덴의 한 마을에서 두 팔이 없고 한 쪽 다리가 짧은 중증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주 받은 인생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녀의 부모는 하나님이 주신 아이로 확신하고 그녀를 정상아와 똑같이 신앙으로 양육했습니다. 수영과 십자수, 요리와 피아노, 운전, 성가대지휘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하나 밖에 없는 오른 발로 못하는 게 없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세계 장애인 수영선수권 대회에서 4개의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이제 30대 중반이 되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저녁에 공연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얼굴에 행복해 하는 모습이 광채처럼 빛났습니다. 그러면서 몇 곡의 찬양을 불렀는데 그 중 'My Tribute'라는 찬양을 제일 좋아한다고 합니다.

'My Tribute'란 나의 감사, 찬양, 제사, 이런 여러 가지 말로 번역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크신 은혜를 가장 잘 표현하는 찬양입니다. 그 찬양을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함께 따라 불렀는데, 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팔도 없고, 다리도 제대로 활동할 수 없는 자매가 저렇게 구원의 은혜를 기쁘고 감격스럽게 찬양하는데, 팔 다리 다 있고 정상적으로 태어난 내가 과연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그토록 감격하면서 살았는가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그 자매가 부른 'My Tribute'라는 찬송가 가사는 이렇습니다.

"어찌하여야 그 크신 은혜를 갚으리
무슨 말로서 그 사랑 참 감사하리요
하늘의 천군 천사라도 나의 마음을 모르리라
나 이제 새 소망이 있음은 당신의 은혜라
그 피로 날 구하사 죄에서 건지셨네
하나님께 영광 날 사랑하신 주
바치리라 모두 주님께
세상 영광 명예도 갈보리로 돌려 보내리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날 사랑하신 주"

이 찬양을 부르는 그 자매의 얼굴엔 은혜가 흘러 넘쳐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양팔이 없어도, 다리가 하나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구원에 감격하고 감사해서 드리는 예배의 기본 요소가 헌금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사실 우리 모두의 마음은 돈에 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려면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들고 나와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빈손으로 와서 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잠3:9). 돈을 들고 나와 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을 공경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예배를 아무리 정성껏 드려도 헌금에 인색하면 마음이 빠져버린 예배가 된 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헌금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일에 동참하는 헌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뭡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빈 손 들고 전할 수 없습니다. 선교사 한 명을 보내는 데도 돈이 필요합니다.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돈을 투자해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데도, 우리 후손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하고 교육하는데도 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교회에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우리 교회의 목회 철학을 많은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 일본 교회의 목회자들과 나누게 하셨습니다. 평신도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깨우고 함께 동역함으로 교회마다 건강해지고 성장해서 전 세계에 있는 교회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우리를 불러 봉사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 교회나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17년 동안 우리는 이 일에 순종해 왔습니다. 이제 더 많은 요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선한 일에 우리가 동참하고 동역하려면 빈손으로는 안됩니다. 나의 것을 바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헌금은 하나님의 선한 일에 우리 자신을 헌신하는 놀라운 일입니다. 정호승이라는 시인이 말한 것처럼 빈손은 사람의 생명을 구합니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도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합니다. 내 손에 많은 것을 움켜 쥐고 있으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드리고 나는 빈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예배,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헌신으로써 헌금을 제대로 하면 세상의 재물을 영원한 보화로 바꾸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화폐를 천국의 화폐로 환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 재물을 직접 가지고 가진 못하지만 먼저 재물을 하나님나라로 보낼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설 때,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로 설 수 있습니다. 

저 개인적인 이야기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헌금에 관한 한 전혀 집에서 터치를 안 합니다. 모두 아내가 다 맡아서 합니다. 얼마를 내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참 좋은 아내를 주신 데 대해서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합니다. 전도사 시절, 또 교회개척을 했던 시절, 통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매일매일 그냥 허덕이며 사는 생활인데도 푼푼히 절약하여 적금을 들어 놓았다가 교회에 특별한 헌금을 할 때 그 적금을 빼어 하나님께 기쁘게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게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이 헌금을 드리지만, 할 수 있으면 우리 교인 전체가 드리는 1/100은 우리가 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어요." 그런데 정말 성탄 헌금을 해도, 추수감사절 헌금을 해도 1/100 이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헌금하는 것을 너무나 기쁘게 생각하는 아내를 주셔서 감사하곤 합니다. 지금은 대형 교회의 목사로 잘 살게 되었어도 헌금하는 자세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을 헌금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것을 보고 정말 도전을 받습니다.

헌금은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헌금은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쌓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구원을 생각하면,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내 몸도, 내 생명도 드리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심정이기에 얼마의 헌금을 드리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황송하게 생각하면서 '주님,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 드립니다.' 하고 기쁘게 드리는 것이 헌금입니다. 결코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기쁘게 주님 앞에 드리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자에게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간섭을 가끔 보여주십니다. 곧 재정적인 기적을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게 하는 기적입니다. 수입이 별로 많지 않아도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메워 주시는 기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너무 많이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말라기 3장 10절 말씀을 좋아합니다.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물론 십일조를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 당시는 농경 사회이므로 황충을 금하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시고, 밭에 포도나무 과실이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도록 기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내가 노력한 것보다 더 주실 때가 있습니다. 수입이 적어 생활이 빠듯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이리저리 잘 메워져 오히려 신나게 살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간섭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움켜쥔 채 헌금하지 않고, 헌금할 때가 되면 그 주일에 안 나오면서 피할 구멍을 찾지만, 결국 돈이 뒷구멍으로 다 빠져 나가기 일쑤입니다. 사람에게 속아 돈을 떼이기도 하고, 아이들 병원 비로 다 나가 버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이 기적적인 간섭을 아십니까? 이것을 알면 신나게 헌금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것보다 하나님나라에서 부자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나라에 갈 때 그곳에서 함께 손잡고 춤추는 날이 올 수 있길 바랍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주신 귀한 재물을 우리가 어떻게 하면 바로 쓸 수 있는지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리 숙인 주의 자녀들에게 물질의 축복도 주셔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아름답게 쓰고, 그 나라에 가서 영원토록 부요한 자가 되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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