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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등을 넘어서 / 고전 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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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갈등을 넘어서
본 문 : 고전 3:6-9
설교자 :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일전에 코트라의 파리 무역관장 김태랑씨가 한 세미나에서 외국서 장사하는 우리 한인들의 문제를 꼬집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이 이런 예들을 들었습니다.
브라질 상파울로 상가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옷가게가 나타나면 주변의 현지 상인들은 이제 우리는 망했다고 울상을 짓는답니다. 한국인이 워낙 근면하고 억척스러워 늘 주변 상권을 장악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상점이 하나 더 나타나면 이 사람들은 이제는 살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답니다. 한국 사람들은 둘만 모이면 싸우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둘 다 망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파리에 중국식당이 하나 생겼답니다. 여기서 식당 주인은 때가 되니 오래 일한 주방장을 같은 거리에 점포를 얻어 독립을 시켜주더랍니다. 그리고 자리 잡을 때까지 주위 사람들이 몇 달간 찾아가서 먹어주더랍니다. 그래서 그 거리에는 중국식당들이 새끼치듯이 늘어났답니다.

김관장은 그러면서 세 나라를 비교했습니다. 먼저 중국인들은 '너도 살고 나도 살자'고 서로 돕는 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너 죽고 나 살자'고 하면서 자기끼리 서로 경쟁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은 '너 죽고 나 죽자'고 치열하게 싸운답니다.

국내 분석심리학의 대가 이부영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림자-마음 속의 어두운 반려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이 박사는 융 심리학을 통해서 한국인의 마음을 분석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그림자가 자리잡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여기서 그림자란 자아에 숨겨진 어두운 억압 또는 콤플렉스를 말합니다.

우리 민족이 지난 30여 년 동안 짧은 기간 동안에 빠른 압축 성장을 하면서 이런 그림자가 마음 속에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그림자가 조급히 서두르는 '빨리 빨리 병', 상대방 장점을 인정하지 않고 업적을 깎아 내리는 '너 죽고 나 죽자 병' 지역과 동문끼리 뭉치는 '끼리끼리 병', 매사에 양극단을 가지고 팽팽히 대립하는 '흑백 판단증' 같은 것들이랍니다.

이런 그림자가 바로 우리 사회에 끝없는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림자 때문에 우리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계속해서 동서로 나눠지고, 보혁이 나눠지고, 세대가 나눠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들 합니다. 물론 그 위기의 원인이 외부로부터 온 것도 있습니다. 세상이 하도 빠르게 변하다 보니 그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 한국교회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더 큰 원인은 바로 내부로부터 생겨난 것들입니다.

한국교회가 담임목사의 세대교체 와중에 갖가지 갈등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담임목사 세습과 관련한 문제로 교회가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담임목사의 목회 노선에 따르는 파와 반대하는 파 사이의 갈등이 여러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 사이의 갈등이 시끄럽습니다.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갈등이 복잡합니다. 당회와 일반 신도들 사이의 갈등도 있습니다.

이런 갈등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부영 교수의 분석처럼 우리 안에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너무도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런 어두운 그림자를 털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런 갈등을 넘어서야 합니다. '너 죽고 나 죽자'식으로 내부 갈등에 휘말리면 모두가 망합니다. 이제 힘을 합하고 하나가 되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털어 버리고 갈등을 넘어설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해 줍니다.

본문의 상황

고린도 교회에는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교회 내에 파벌로 인한 분쟁과 갈등입니다. 1:12를 보면 고린도 교회 내에 네 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고 그리스도파입니다.

바울이 이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교회 초창기 때부터 바울을 따르던 사람들이 바울파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바울 이후에 아볼로가 이곳에 와서 교회를 지도했는데 이 사람의 탁월한 식견과 언변에 매료되어 아볼로를 따르던 사람들이 아볼로파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팔레스틴 지방에서 이주해 온 후에 자기들끼리 게바파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다른 영적인 은사를 받아서 자기들은 직접 그리스도와 영적 교제를 나눈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파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바울파와 아볼로파 사이의 갈등과 분쟁이 그 중에 가장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파가 숫자도 가장 많았고, 영향력도 가장 컸기 때문입니다. 이 두 파는 새신자가 오면 자기들이 세례를 주고 자기 파로 끌어들이려고 경쟁도 했습니다. 사사건건 대립하고 마찰을 빚었습니다.

문제의 원인

본문에서 바울은 이 문제의 원인을 진단해 주고 있습니다. 1-2를 보면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영에 속하지 않고 육신에 속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등을 빚는 이유는 아직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는 말처럼 아직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싸우고 갈등을 빚는 것입니다. 더 자라서 성숙해 지면 그까짓 것 싸울 일이 아닌데 왜 그토록 싸웠는지 후회하게 됩니다.
기독교교육학자 제임스 파울러라는 분은 신앙발달단계론을 주창하여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 분은 인간의 신앙이 여섯 단계를 거치면서 발달해 간다고 했습니다.

특히 이 중에 네 번째 단계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별적 성찰적 신앙 단계라는 것입니다. 주로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나타나는 신앙형태입니다. 주체적이고 비판적으로 가치관을 형성하는 시기입니다. 무엇이든 옳고 그름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 시기의 위험성은 자기 중심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의 관점을 볼 수 있는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음으로 다섯 번째 단계가 결합적 신앙 단계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무르익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단계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흑백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합니다. 인생의 모순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파울러의 이론을 따르면 매사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하고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개별적 성찰적 신앙단계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청소년기 수준의 신앙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파울러가 지적한 대로 성인 가운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파울러의 말대로 우리가 성숙해서 결합적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기만 하면 이런 갈등들은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다 성숙해져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을 한 마디로 '육신에 속한 자'라고 규정했습니다. 헬라어로는 사르키코스(sarkikov")라고 합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예수는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자기의 육체적인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기 뜻을 앞세우고, 자아의 욕망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서 성숙한 신앙인을 신령한 자'라고 규정했습니다. 헬라어로는 프뉴마티코스(pneumatikov") 다시 말하면 영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예수 믿고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앞세우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갈등을 빚어내는 이유는 아직 우리가 육신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에 속한 사람으로 변하면 우리 안에 갈등은 사라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갈등이 빚어지는 원인이 어떤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문제가 사라지면 갈등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문제가 없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문제 아닌 것도 문제로 만들어 갈등을 조장합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들은 문제도 기도하며 잘 풀어갑니다. 우리가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의 해결책

본문에서 바울은 갈등을 넘어설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용납입니다.

5절을 보면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아볼로와 자기 모두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역자라고 잘라서 말합니다. 상대파의 지도자인 아볼로를 같은 주님의 사역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대파를 용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여러 곳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과 아볼로는 무척이나 사역 스타일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서로 비판하고 서로의 입장 차가 커서 마찰을 일으켜 온 것이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행 19: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그러니까 아볼로의 가르침 안에 성령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볼 때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의 사역자로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그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역자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내에서 갈등을 극복하려면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하고 다르다고 배척하고 배타적으로 문을 닫으면 갈등은 더욱 심해질 뿐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실수도 용납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으로 5000년을 살아왔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기 힘든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큰 장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큰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단일 민족으로 살아온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지를 못합니다. 나와 다른 점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 차이나타운을 건설했습니다. 세계 주요 도시 가운데 차이나타운이 없는 곳이 없고, 세계 주요 국가 가운데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가 없습니다. 작년 월드컵 때 중국관광객들이 와서 차이나타운을 찾았지만 우리나라에는 차이나타운다운 곳이 없었습니다. 단 하나 인천 북성동에 명목상 차이나타운을 세워놓았지만 그 수준이 미약합니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 지독하다고 합니다. 중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차이나타운을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사람들의 배타성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배타성을 극복해야 하겠습니다.

사자하고 소하고 결혼을 했답니다. 서로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소가 아침상을 차렸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신선한 풀을 잔뜩 뜯어다가 사자에게 주었습니다. 사자가 최선을 다해서 먹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다음 날 사자가 식탁을 준비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슴 고기를 소에게 주었습니다. 소가 최선을 다해서 먹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결국 사자도 배탈이 났고, 소도 배탈이 났습니다. 끝내 둘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나 사자나 모두 상대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문제는 그에게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서로 다른 점을 수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둘째는 동역입니다.

6-7을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9절에 우리는 즉 바울과 아볼로 두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깨달음입니다. 바울은 자기도 그렇고 아볼로도 그렇고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 모두가 서로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내 일을 한다면 나와 뜻이 다른 사람들과 굳이 함께 일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드시는 사람들을 뽑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합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도 저 사람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 부르신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일전에 세계 교회협의회 모임에 구경 삼아 참여해 본 일이 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모였습니다. 피부색도 다릅니다. 말도 문화도 다 다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학도 크게 달랐습니다. 성령운동을 하는 복음주의자도 있었습니다. 게이를 목회자로 인정하는 급진 진보주의자들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제 눈에는 기적이었습니다. 저들이 그렇게 달라도 주를 위해 함께 모이고 함께 일을 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은 서로가 협력해야 합니다. 바울은 심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볼로는 물을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각자가 받은 바 은사로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협력해서 이루어 가야 합니다.

현대 목회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팀 목회(team ministry)입니다. 90년대 이후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으로 강조되고 있는 개념입니다. 다양한 은사를 가진 여러 목사가 함께 팀을 이루고, 다양한 은사를 가진 평신도들이 교역자들과 함께 팀을 이루어 수행하는 목회 형태입니다. 그러니까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찾아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회를 이루어 가는 목회라는 개념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 교회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의식 하에서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를 이루며 협력하는 팀 목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대의 이 다양한 상황 속에서 교회가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인삼각 경기에서처럼 서로 힘을 협력해야 합니다.

요한 웨슬리의 일기에는 자기 삶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준 어떤 분의 권면 구절이 적혀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섬겨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면 명심하십시오. 당신 혼자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동지를 찾으십시오. 없다면 만들어 보십시오. 성경은 혼자서 고독하게 믿는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 갈등이 심화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모아 이 갈등을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 기도/

우리로 성령 안에 하나를 이루게 하소서.
피차 용납하고 동역하게 하소서.
갈등을 넘어서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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