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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부부는 행복합니다 / 마 5: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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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27-30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어제 TV뉴스에 보니까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부부가 사소한 일로 인해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화가 난다고 해서 엽총을 가지고 처가 가족들을 무참하게 쏴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아주 끔찍한 살인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면서, 또 온 가족이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화목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너무나도 행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는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아내가 병들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죽기 전에 자기 남편에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여보, 나는 지금까지 세 남자를 사랑했습니다. 나는 그 세 남자 모두를 내 생명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면서 사랑했습니다."
아내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된 남편은 다소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아내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첫 번째로 사랑했던 남자는 내 어릴 적 옆집에 살던 오빠였습니다. 내가 두 번째로 사랑했던 남자는 대학 다닐 때 같은 과에서 공부했던 선배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 번째로 사랑한 남자는 지금의 내 남편이 된 바로 당신입니다. 나는 이 세 남자 모두를 지극히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비록 짧은 삶을 살다가지만 누구 못지 않게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말을 듣고서 한없이 서럽게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사랑했던 세 남자는 모두가 자기를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일평생토록 한 남자인 자기만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그의 아내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하루는 영국의 유명한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Churchill, Sir Winston L 1874∼1965)이 기자들과 함께 회견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자 가운데 한 사람이 불쑥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일 수상께서 다시 태어나신다면 그때는 어떠한 일을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그 질문은 이러한 뜻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수상께서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렇게 골치 아픈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또 사시겠습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처칠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할 것입니다. 또 다시 나는 내 아내의 남편이 될 것입니다."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처칠의 아내는 남편의 말에 감동한 나머지 울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 정치인의 아내로서 많은 고생도 했지만, 그 순간에 그 모든 고생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단지 자기 한 사람만을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이 있다는 사실에 그는 더없이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나의 아내, 나의 남편을 사랑하고 또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의 원리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보시고 좋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위해서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두 사람을 짝지어서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한 남자에 여러 명의 여자를 만드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반대로 한 여자에 여러 명의 남자를 만드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남자를 만드신 것도 아니고, 두 여자를 만드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남자에 한 여자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짝지어서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남자는 자기의 아내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자기의 남편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남편은 한 여자 곧 자기 아내만을 사랑하고, 아내는 한 남자 곧 자기 남편만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부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요, 가정의 천국을 이루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는 제 7계명을 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눈 돌리지 말고 남자는 자기의 아내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아내는 자기의 남편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우리의 아내, 우리의 남편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얼마나 행복한 부부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의 가정에, 늘 천국처럼 날마다 매 순간 마다 행복이 넘치는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27절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간음하지 말라"는 제 7계명을 잘못 해석하고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둘째로, 28절입니다. 예수님은 제 7계명의 참뜻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셋째로, 29-30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부로서, 우리의 아내를, 우리의 남편을 어느 정도로 사랑해야 하는지 예를 들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해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7절입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예수님은 본문 끝 부분에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긍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부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까지는 그렇게 들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러한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 사람들이 잘못 들어왔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간음치 말라."
이 말씀이 잘못 되었다는 뜻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일곱 번째로 분명하게 기록된 말씀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계명에 자기들의 유전도 전혀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무엇이 잘못이었습니까? 우리는 28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비추어볼 때, 그들의 잘못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에 대한 해석을 잘못한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마음으로 음욕을 품든지 말든지 그것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행위, 결과에만 치중을 했습니다. 그것만 문제시했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계명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해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의 잘못된 해석은 그 당시 사람들을 성적인 방종 상태로 몰아가고 말았습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음욕을 다스려야 되는데, 그 음욕을 다스리지 못하니까 결국 음욕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음욕을 이루기 위해 아주 손쉬운 하나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이혼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혼을 아주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혼을 하면서도 전혀 마음 속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할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남편에게 무안을 주었을 경우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아내가 요리를 하다가 음식을 태웠을 경우나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 짜게 만든 경우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하여튼 남자들은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별의별 사유를 붙여서 아내를 내버렸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이혼증서 한 장만 써주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런 뒤에 남자는 자기 마음에 드는 다른 여자와 합법적으로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사회가 얼마나 성적으로 문란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했겠습니까?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이혼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난 뒤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9:9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그런데 그 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마19:10의 말씀입니다.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찐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이혼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면 차라리 장가들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더 낫겠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그런 말을 할 정도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이혼을 쉽게 생각했는지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그러자 그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아마도 그 여인은 그런 말로서 자기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삶을 감추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 여인은 남자로부터 다섯 번씩이나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혼을 다섯 번씩이나 했으니까 얼마나 이혼이 지긋지긋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아예 결혼도 포기하고 남의 첩으로 얹혀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해석은 그 당시 사람들을 성적인 방종 상태로 몰고 가서,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문란한 세상을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을 가리켜서 몇 번씩이나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여"라고 말씀하시면서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바른 의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28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권세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요1:1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이, 장차 우리 모두를 심판하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명의 참뜻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8절 중반부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마음에 품은 음욕 자체를 간음이라고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여자 보기를 아예 돌같이 하라는 뜻입니까? 여자 앞에서는 여자의 얼굴도 쳐다보지 말고, 눈꺼풀을 땅에 내려 깔고서 땅만 보며 지나가라는 뜻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을 통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깨뜨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23:25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그들 마음 속에는 음욕이 불일 듯 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자기들은 간음죄를 저지르지도 않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이 성전에서 했던 기도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마음에는 음욕이 불일 듯 일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자기들은 계명을 잘 지키는 자라고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들은 만일 다른 사람이 눈으로 드러나는 간음죄를 저지를 경우에는 가차없었습니다. 혹독하게 다루었습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8장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성전에 올라가셔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예수님 앞으로 끌려 왔습니다. 그 여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온 사람들은 살기 등등한 모습으로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여러분! 이 가련한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돌로 치려고 했던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묻기를 마지않았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입을 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그 자리를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이라고 질책하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의 의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의는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우리도 역시 다 간음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허물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리와 같이 애통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혀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없는 의가 있습니다. 그들보다는 더 나은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의입니다. 온전한 의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살고 있기 때문에 천국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옷 입고 사는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 신부된 교회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짝지어주신 우리의 아내를, 우리의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부부입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너무나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우리의 아내와 남편을 어느 정도로 사랑해야 하는지 살펴봅니다.

29-30절입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의 손을 붙잡고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부잣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크고도 으리으리한 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집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네가 공부도 잘하고 열심히 살면, 너도 이 다음에 이런 집에서 살게 될 것이다."

아들은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잠시 뒤에 그들은 다 낡아서 허물어져 가는 가난한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집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네가 공부도 안하고 되는 대로 살면, 너도 이런 집에서 살는지 모른다."
아들은 알겠다는 듯이 또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를 교육시킬 때 때로는 당근을 이용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채찍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우리에게 천국의 영화로움을 말씀하시면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또 때로는 지옥의 끔찍한 광경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지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는 말씀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은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말씀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컨대 오른눈이 우리를 실족케 한다고 해서 빼내버리고, 그 다음에 왼눈이 우리를 실족케 한다고 해서 빼내버렸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두 눈이 없다고 해서 그 다음에는 실족케 할 일이 전연 생기지 않겠습니까? 또 오른손이 실족케 한다고 해서 찍어내 버리고 왼손이 실족케 한다고 해서 찍어내 버리면, 모르긴 해도 병원은 손 자르는 사람들로 붐비게 될 것입니다. 또 오른발이 실족케 한다고 해서 오른발을 찍어내 버리고 왼발이 실족케 한다고 해서 찍어내 버리면,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손과 발도 없는 두루뭉실한 모습이 다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또 음욕을 품는 것은 마음으로 품는 것인데 손과 눈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빼내버린다면 심장을 빼내든지 허파를 빼든지 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문자적인 의미로 말씀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상징적인 의미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두 눈으로 여자를 보면서 두 손을 가지고 여자를 범했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육체적인 음행을 저질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저 한 눈으로만 여자를 보고서 한 손으로만 범했다는 것은 실질적인 육체적 접촉 없이 그저 마음으로 음행을 저질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분명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우리의 배필에게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도 다른 여자, 다른 남자에게 한 눈 팔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내 아내만, 내 남편만을 온 마음을 다하여 극진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불행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오른눈은 계속해서 그들을 실족케 했건만 그들은 빼내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오른손이 계속해서 그들을 실족케 했건만 그들은 찍어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몽땅 다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온몸은 지옥에 던지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내가, 우리의 남편이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짝지어주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아내, 가장 훌륭한 남편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이 내게 짝지어주신 내 남편, 내 아내만을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부부입니까?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어지는 장기려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50년 12월, 6·25 동란쯤 평양 의과대학부속병원 2층 수술실에서 밤새워 부상당한 국군장병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폭탄이 떨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장기려 박사는 국군 버스를 타고서 국군 장병들과 함께 황급히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인 김봉숙 여사와 또 다섯 자녀와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그는 늘 빛 바랜 가족 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계속 혼자 살았습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재혼을 권유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하면 그는 이런 말로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난 밤이면 그는 꿈속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자기를 보고 환하게 웃는 듯 했습니다.
하루는 간호사 가운데 한 사람이 황급히 뛰어 들어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큰일났습니다! 106호 환자가 간밤에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때 장기려 박사는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도망가라고 문 열어 주었지. 생각해 보시오. 다 나은 사람을 돈이 없다고 해서 붙들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빨리 가서 땅이라도 파야지. 그래야 그의 가족들이 굶어죽지 않을 것 아니오?"
그는 자기가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그 누군가도 북쪽에서 자기를 대신해 자기의 가족들을 돌보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1990년 초에 그는 미국에 있는 어느 친척을 통해서 북한에 있는 그의 아내와 그의 사랑하는 다섯 자녀들이 무사히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상봉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는 어느 신문지상을 통해서 북한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런 애절한 편지를 띄웠습니다.
"여보, 40년이 흘러 여든이 된 지금, 여보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40년을 남한에 살면서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이 들었다오.
그러나 당신에게 한 스스로의 언약,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 만일 우리 둘 중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뿐 아니라 떠나 있을 때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
라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을 기다렸소.
여보, 몇 년 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 명씩 남과 북을 방문하여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난들 왜 가보고 싶지 않겠소.

당신과 자식들을 만나고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도 둘러보고 고향집과 평양 신양리의 옛집에도 가보고 싶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 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나는 내 생전 평화통일이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는 끝내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빛 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바라보면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홀로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듯 육체의 하나됨보다는 마음이 하나되는 것을 더 소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끝내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자녀들을 보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아침, 성탄을 알리는 새벽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참으로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죽거들랑 나의 비문에는 '주를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써 주시오."
과연 그는 주를 섬기다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그의 아내만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내에 대한 우리 모두의 사랑이, 남편에 대한 우리 모두의 사랑이 이와 같이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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