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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성과 믿음 / 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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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과 믿음
요한계시록 2장 10절
김홍도 감독 (금란교회)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던 Polycarp은 사도 요한의 친구였는데, 86세에 화형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그 지방 총독이 그를 존경했기 떄문에 그리스도를 한 번만 욕하면 죽이지 않고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Polycarp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내가 86년 동안 그를 섬겨 왔으나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해롭게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를 모독하겠는가.”라고 말하고 나무에 달려 화형당해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이 순교자 Polycarp이 바로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에 책망을 듣지 않고 칭찬만 들은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이 서머나 교회입니다.
서머나(Smyrna)라는 말의 뜻은 “쓰다”(bitter)는 뜻입니다. 지금도 “이즈미르”(Izmir)란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믿음 때문에 쓰디쓴 고통을 당하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황제가 주님이다”(Caesar is Lord)라고 고백하도록 강요당했는데 크리스찬들은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다.”(Jesus is my Lord)라고 끝까지 고백하며 핍박을 받고 순교도 했습니다. 이 서머나 교회를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면서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10일 동안”이란 말은 “짧은 기간”을 의미합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충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충성”(Faithful)이란 말과 “믿음”(Faith)이란 말은 어원이 같습니다. 그리고 “순교” (Martyrdom)란 말은 “증인”(Witness)이란 말과 같은 뜻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며 영혼을 구원하려면 순교의 각오, 죽을 각오를 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참 믿음(Faith)를 가진 사람은 충성(Faithful)하게끔 되어 있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충성되지 못합니다. 충성된 신자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1. 희생을 감수합니다.(sacrifice)

희생이 없이 충성할 수가 없습니다. 희생정신 없이 순교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본문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임을 당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런던에 있는 박물관에 “충성”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AD 79년에 폼페이라는 사치와 허영과 음란의 도시에 베스비우스라는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도시로 흘러 내려오고 불비가 내리듯 화산재가 쏟아져 내릴 때 다른 사람들은 다 살려고 도망치는데 성문을 지키는 한 병사는 그 와중에도 도망가지 않고 자기가 지켜야 할 그 자리에 꿋꿋이 서서 충성을 다하다가 그 뜨거운 화산재에 싸여 죽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희생이 없이 충성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만큼 성장 발전하는 것은 각 분야에서 남이 알거나 모르거나 희생하며 충성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 중에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매연 가스를 맡아 가며 차량 안내하는 이들, 또 겨울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여름에는 비지땀을 흘려가며 주방에서 수고하는 여선교회원들, 주일이면 새벽부터 일어나서 아이들을 찾아다니고 전화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 자기 돈까지 써가며 수고하는 교사들의 희생 때문에 끊임없이 부흥되는 것입니다. 예배 끝나고 남들은 다 집에 가는데 모여서 성가 연습하고 새벽에 밥도 못 먹고 나와서 연습하는 성가대원들 등, 희생하며 충성하는 교인들이 없이는 교회가 운영될 수도 없고 부흥될 수도 없습니다. 충성은 희생 없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13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희생한 만큼 영광을 누리고 즐겁고 기뻐하는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2. 변절하지 않아야 충성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죽는 순간까지”란 뜻도 있지만 “죽음이 앞에 닥치더라도” 변절하지 말고, 믿음을 배반하지 말고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평안할 때나 환난을 당할 때나 꾸준히 믿음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기분 좋을 때는 반짝 열심을 내다가도 욕을 먹거나 억울하게 오해를 받을 때는 싹 돌아서 버리고 변절하면 그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가령 공산당들이 들어와 총부리를 대고 “예수님을 믿을래, 안 믿을래?” 하며 믿음을 배반하면 육신의 생명을 살려 준다고 할 때 변절하지 않아야 충성된 신자입니다. 가롯 유다는 은 30냥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믿음을 저버리고 목매달아 자살하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배반, 배신당하는 것처럼 가슴 아픈 일이 없습니다.

  이태리 로마에 가면 초대 크리스찬들이 핍박을 피하여 들어가 살다 죽은 카타콤(Cata-Comb) 이 있습니다. 햇빛도 없고 습기찬 그 지하 동굴에서 처참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 동굴 한쪽에 장사 지냅니다. 거의 300년 동안 그 생활이 계속되었는데, 그때 죽은 사람이 175만 내지 400만 명이나 되는데 그 캄캄한 동굴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즐겨 외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중세기 암흑 시대에 믿음을 지키다가 죽은 사람이 50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중국이 공산화 된 다음에 순교한 교인이 100만 명 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내전과 혁명 때 믿음을 지키다 순교한 사람이 수천 명, 수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믿음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그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기절하기를 수없이 하고 손톱 발톱이 빠질 정도로 대나무 꼬챙이로 쑤셔도 변절하지 않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맞고 기절하기까지 고문당하다가 추운 겨울에 옥사하여 순교한 것은 변절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개만 까딱하고 우상 앞에 절하고 신사참배만 했더라면 그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믿음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3. 충성은 겉과 속이 같아야 합니다.

  한자로 “충”자는 가운데 “中”과 밑에 마음 “心”자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 한가운데 중심을 바치는 것이 충성입니다. 또 “성”자는 말씀 “言”변에 이룰 “成”자입니다. 말과 행동이 같다는 뜻입니다. 말과 행동이 같아야 충성할 수 있습니다. 이해 관계에 따라서 말과 행동이 다르고 형편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며 손바닥 뒤집듯 하는 사람은 충성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눈가림만 하고 남 보는 데서 뭘 하는 척하고 남이 안 보는 데서는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은 충성된 사람이 못 됩니다. 에베소서 6장 6~7절에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했고 골로새서 3장 22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충성된 크리스찬은 항상 정직하고 진실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일 미워하시고 저주까지 한 사람들은 강도나 도둑놈이나 창녀가 아니라, 겉으로만 거룩한 체하고 속에는 썩은 송장과 같은 온갖 더러운 죄와 간악함과 질투심으로 가득찬 위선자들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하고 일곱 번이나 저주했는데, “외식하는 자”란 위선자(hypocrite)란 뜻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르고 시작과 끝이 다른 사람입니다.
  서양의 어느 귀족의 집 현관에 이상한 동상이 있는데 얼굴 한쪽은 친절하고 웃는 얼굴이고 다른 한쪽은 찡그리고 비죽거리는 얼굴 모양입니다. 그 집주인은 하인들이 주인 보는 앞에서는 굽신대고 상냥하지만 돌아서면 찡그린 얼굴로 입을 비죽거리고 욕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할 때 다르고 돌아서서 말할 때 다르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합니다. 앞에서 인사할 때는 지극히 존경하는 태도로 굽신거리고 예의바르게 말하다가 인사하고 돌아서서는 “미친놈, 개새끼” 하고 온갖 욕을 다 퍼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바에는 인사를 안 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시 거룩한 체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그들이 멸시하는 세리, 창녀, 도둑놈이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깝다고 한 것은 세리, 창녀, 도둑놈은 겉도 나쁘고 속도 나쁘지만 위선의 껍질을 뒤집어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늘 진실하게 합소서. 내 구주 예수여.”


  4. 게으르지 않아야 충성할 수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결코 충성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게으름은 인생의 최대의 적이라고 한 분도 있습니다. 죄 같지 않으면서 큰 죄가 게으름, 나태의 죄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어떤 사람이 먼 나라에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씩 나눠주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열심히 장사해서 이문을 남기도록 해라.” 하고 떠났다가 돌아와 보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도 다섯 달란트를 남겨 왔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두 달란트를 남겨 왔는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만 한 달란트 그대로 땅에 묻어 두었다가 내놓으면서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잘못해서 밑지면 혼날까봐 땅에 묻었다가 그대로 가져 왔습니다.” 할 때 주인이 대노해서 책망하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네가 알았느냐? 그렇다면 은행에라도 넣었다가 이자를 받게 하지 왜 땅에 묻어 두었느냐.”고 하시면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고 무서운 벌을 주었습니다. 주님의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는 책망을 기억해야 합니다.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맡은사명을 저버리고 게으르면 무서운 죄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어느 집에 시간당 1불씩 받기로 하고 청소를 하는데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청소 도구를 만들어서 구석구석 청소를 잘 하는 것을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던 주인이 시간당 50센트씩 더 주면서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요?” 묻고 “당신은 청소부가 아니라, 참으로 신사입니다.” 하고 칭찬하더랍니다.

성 Augustine은 “매일 인생의 마지막 날과 같이 여겨야 한다” 했고 또 “나는 오직 한 번만 인생을 산다” 하는 각오로 매일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게으른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쉴 시간도 없이 일하다가 과로해서 쓰러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도 목동 노릇할 때 부지런히 일하다가 부름 받아 왕이 되었고 베드로도 열심히 고기 잡다가 부름 받아 제자가 되었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귀하게 들어 쓰시지도 않고 큰 복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봉사도 못합니다. 게으른 사람이 귀찮아서 교회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게으른 사람은 기도 생활도 못합니다. 12시가 넘도록 TV 연속극이나 보다 잠든 사람이 어떻게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합니까? 절도가 없고 규모가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영성이 향상될 수도 없습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했는데, 주해를 보면 “기회를 사라”고 되어 있고 원어의 뜻은 “시간을 구속하라” 입니다. 부지런해야 기회를 포착할 수가 있고,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기회가 꼭 오게 되어 있습니다. 악한 시대일수록 육신의 쾌락만 좇아 살면서 게으르기 쉬운데 때가 악할수록 더욱 부지런해야 됩니다.
교인이 적은 시골 전도사일지라도 하루 몇시간이라도 기도하고 성경 많이 보고, 영어나 혹은 다른 외국어를 부지런히 외우면 앞으로 능력과 실력이 축적되어서 크게 쓰임 받고 큰 목회하는 날이 오게 됩니다. 그러나 교인이 없다고 파자마 바람으로 장기, 바둑이나 두며 세월을 보내고 성경 통독 한 번도 안 하면 생전 개꼬리, 여우꼬리도 안 됩니다.

  전에 영국의 어느 왕자가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중, James라는 한 목동을 만나서 길을 좀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안됩니다. 저는 남의 집 양을 치는 목자인데 양떼를 놔두고 길을 안내할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월급이 얼마냐고 묻고 월급의 3배를 줄테니 좀 안내하라고 하니까 “못 합니다. 저는 이 양떼를 버리고 갈 수 없습니다.” 하더랍니다. 이번에는 총을 겨누며 “안내하지 않으면 쏴 죽이겠다”고 하니까 “예, 죽을지언정 당신을 따라가지 아니하고 양들을 돌보겠습니다. 그러나 길을 말로는 안내해 드리지요. 저 산을 세 번 넘은 후에 서쪽으로 계곡을 따라 20분간 가면 도로가 나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대로 해서 길을 찾아 돌아갔습니다. 후에 그 왕자가 왕이 되자 James를 불러 재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하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 현재 나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스럽게 살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 받고 축복을 받겠습니까?

  저는 우리 교역자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게으르고 무익한 종은 하나님이 골라내어 내보내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충성된 믿음의 사람은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요, 변절하지 않는 사람이요,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요,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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