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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된 생활이 따로 있습니다 / 창 1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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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생활이 따로 있습니다
창 17: 1-8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오늘은 창세기 17장 1절에서 8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복된 생활이 따로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복된 생활이 따로 있습니다'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복 받는 생활은 따로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복을 받는 생활도 있지만 저주를 받고 화를 당하는 생활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참된 생활도 있고, 막되어 버린 생활도 있습니다. 막된 생활에 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막되다'라는 말은 거칠고 사납고 개준의 정이 없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전혀 막되어 먹은 생활을 계속한다면 하나님께서 무슨 복을 주시겠습니까?

  예를 들면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의 생활은 그 하나 하나에도 주인이 말끝마다 칭찬을 했고 마지막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함을 약속하는 온갖 복을 다 받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말끝마다 불평이었고 주인도 역시 말끝마다 책망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있는 것도 빼앗기고 나중에는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한 달란트 맡은 종과 같은 삶에는 주실 복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는 생활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어떤 생활이 복을 받는 생활인지 즉 하나님이 어떤 생활에 복을 주시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완전한 생활에 복이 있습니다 (1-2)

  마태복음 5장 4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하시는 중간에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완전할 수 있을까? 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완전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았으되 완전한 존재로 창조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처럼 완전해 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해석하면 이해가 갈만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흔히 유일신이요, 천지를 창조하신 만물의 주인이시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죽음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일본에 가면 아마데라스오우미까미라고 하는 귀신이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랍 족속들에게는 알라신이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로마인들에게 쥬피터라고 하는 귀신이 하나님 노릇을 했습니다. 헬라 사람들에게는 제우스라는 신이 하나님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들은 참 하나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여러 신들 중에서 가장 완전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다른 신들은 전부 잡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을 가졌기에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조금만 힘들면 병들고, 세월이 지나면 나이가 들고, 늙고 죽곤 합니다. 육신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처럼 완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 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신들의 세계에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들은 사람들의 세계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을 보면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사람으로써 감히 행할 수 있는 일입니까? 사실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처럼 완전한 사람은 그 일을 할 수 있다 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이 신들의 세계에서 완전한 것처럼 사람들 세계에서 완전한 자는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6장 9절을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노아 시대의 모든 사람에 비해서 완전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완전의 생활은 바로 그런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 중에서 아무개는 무엇인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라는 말을 듣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2절을 보면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앞에서 살라 즉 나를 표준으로 해서 살면 너의 생활은 완전해 진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 아버지는 육신이 없는데 어떻게 그 하나님을 표준으로 하라는 것입니까? 그러나 신약시대의 하나님은 육신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불한당 만난 자의 비유를 하시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설명하셨습니다. 그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보면 사람들 세계에서 완전하다 할만큼 온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율법사에게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비유 중에 나오는 사람인데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너도 예수님이 한 것처럼 그대로 본받아 행하라 그러면 사람들 중에서 완전한 자가 되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표준하여 완전한 자로 살아 복된 여생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을 명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나를 표준으로 삼아 완전한 자가 되라'는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사람으로서 이렇게 온전한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그런 삶에 복이 있다는 이야기임을 기억하시고 남은 여생은 완전한 자의 완전한 삶을 살아 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변화의 생활에 복이 있습니다 (3-6)

  야곱은 형의 낯을 피해서 밤중에 외갓집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외갓집 가는 길이 천리 이천리입니까? 오천리나 되는 길입니다. 얼마나 멀고 먼 길입니까? 외가에서 20년만에 돌아오다가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져주신 것입니다. 씨름에 져주신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축복하지'라고 하시면서 그 때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40살 되는 아버지와 세 살난 아들이 씨름을 하면 누가 이깁니까?  100번하면 100번 다 아버지가 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힘이 없어서 집니까? 져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져주고는 '그래 네가 이겼다'라고 하면서 먹을 것도 주고 장난감도 줍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 씨름하자 하신 후에 져주시고 이런 저런 복을 주시는데 먼저 이름부터 바꾸자 하여 야곱을 이스라엘로 고쳐주셨습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사람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나와 김창인이가 따로 있습니까? 내 자신이 곧 김창인이고, 김창인이 곧 내가 아닙니까? 이름과 나는 별개일 것일 수 없습니다.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내 이름이 바뀌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도적질만 하고 살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 즉 대명사가 도둑놈입니다. 그런데 회개하고 예수 믿고 교회에서만 열심히 봉사한 것이 아니라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이름은 따로 있지만 목사라는 대명사를 갖게 된 것입니다. 도적놈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별명이 바뀌면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는 것은 변화를 시키셨다는 뜻입니다. 변화는 자기가 노력하고 훈련을 받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꾸어 주셔야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면 나를 먼저 변화시키십니다. 이름을 바꾸어 놓으면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변화된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브니엘의 생활 이전과 이후가 얼마나 달라집니까?
  첫째로 야곱이 브니엘 이전에는 가는 곳마다 빼앗는 생활이었습니다. 형에게서 빼앗고 외삼촌에게서 빼앗고 외사촌들에게서 빼앗았습니다. 빼앗는 것이 본색이라 할만큼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브니엘 이후에는 주는 생활이었습니다. 완전히 변화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브니엘 이전에는 가는 곳마다 원수 맺는 생활이었습니다. 형과 원수를 맺었고 외삼촌과 원수를 맺었고 외사촌들과 원수를 맺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원수를 맺었지만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름을 바꾼 후부터 변화되는데 그 다음부터는 원수 맺은 것을 푸는 생활을 합니다. 화해를 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트러블 메이커가 피스 메이커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셋째는 브니엘 이전에는 거짓말하는 것이 본색이라 할만큼 이 사람에게도 거짓말 저 사람에게도 거짓말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속였습니다. 그러나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는 진실 그대로가 아닙니까? 그에게서는 거짓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실했습니다. 완전히 사람이 뒤바뀌어 졌습니다. 그렇기 까닭에 하나님은 반드시 변화를 시키고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30년 동안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면서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것 뿐 전혀 변화가 없다면 하나님이 주실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된 삶에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절에서 6절을 보면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고 하였습니다.

  아흔 아홉 살 난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 이름을 바꾸어 주겠다"고 하시면서 "네 이름은 아브람이지만 내가 네 이름을 바꾸어 주리니 아브라함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본래 아브람이라는 말은 큰아버지 즉 아버지 중에서도 위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라는 말은 열국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자녀 손들을 낳으면 그 자손들이 여러 민족을 이루게 되고 여러 나라가 되기에 열국의 아비가 되고 너에게서는 그 나라를 다스릴 많은 왕들이 나리라고 하셨습니다. 네 이름을 바꾸어 줄텐데 이름대로 된다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나이 99세 때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어 주시므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아브라함의 삶은 전적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삶이 되었습니다. 물론 고향 땅을 떠날 때도 그랬지만 고향 땅을 떠나고도 몇 번씩이나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99세에 이름을 바꾼 이후로는 전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변하여 뭔가 더 달라지고 새로워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삶에 하나님은 반드시 복을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에 서울 시내에 한 상인이 있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반과 상놈으로 나눌 때 상놈이라는 의미의 상인 김형택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때 마침 감리교의 선교사로 아펜셀라가 들어와서 정동에 교회를 세우고 그 옆에 배재학당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전도하러 다니다가 김형택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전도했더니 가만히 듣고 생각한 끝에 예수를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에 이 사람을 데리고 일을 시키고 생활비를 돕고 싶은데 글을 알아야 사무 보는 일을 시킬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교사는 할 수 없이 잡부로 채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김형택씨 집에는 딸이 넷이 있었습니다. 셋째 딸의 이름이 김점동인데 아펜셀라가 스크랜톤이라고 하는 선교사에게 그녀를 소개를 시켜주었습니다. 스크랜톤 선교사가 지금의 이화여고와 이화여대학의 전신인 이화학당을 세웠습니다. 그 당시는 요즘과 달리 호랑이가 담배 피운다고 하던 시절이기에 월사금을 내고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전부 먹여 주고 돈까지 주어 가면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학생들은 그 돈으로 용돈을 쓰고 옷을 사 입던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 사람들은 서양 사람한테 자녀들로 배우지 못하게 하던 시절입니다. 그 때의 사람들이 참으로 미개했습니다. 그런데 그 김점동이 이화학당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졸업을 했습니다. 그때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에스더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주었습니다. 그 때 박씨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세례받은 이후부터는 김정동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김에스더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미국에 가면 여자가 자기의 성을 그대로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반드시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성이 박씨인지라 박에스더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감리교에서는 박에스더라고 하면 알 만한 사람은 알 것입니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의학 공부를 하고 대학원을 졸업하여 의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졸업하던 해에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여자는 한국 최초의 의사가 되어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장로교에서는 박에스더라고 하면 잘 모르지만 감리교인으로 박에스더를 모른다면 날라리 교인이라 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감리교 부인회 즉 여전도회에서 얼마나 활약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감리교의 부흥의 일익을 담당하는 정말로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가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세례를 받으면서 이름을 바꾸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사 키워 주시니 그렇게 큰 것이 아닙니까? 30년 동안 습관적으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햇수를 세지 마십시오. 그 연조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변화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름을 바꾸듯이 변화 될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변화의 생활에 복이 있습니다.

  셋째, 계대의 생활에 복이 있습니다 (7-8)

  '계대'라고 하는 말은 '대를 이어간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죽음의 족보입니다. 거기에는 누가 몇 백살을 살고 죽었더라 누구는 몇 백살을 살고 죽었더라 죽었더라는 "죽었더라의 족보"입니다. 즉 죽음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그 족보도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사람은 몇 백년을 살아도 끝에 가서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백년을 못 살고 죽습니다.  사람은 몇 백년을 살아도 끝에가서는 반드시 죽습니다. 우리 인간은 죽음의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가 하면 마태복음 1장은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라는 "낳고의 족보"입니다. 즉 낳고의 복음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하여 예수님에게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님에게서 마침표를 찍고 다윗도 예수님에게서 마침표를 찍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 때부터 예수님 때까지는 애굽에서의 비참한 종살이 400년, 바벨론에서 비참한 포로 생활 70년 그리고 로마의 식민지 생활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고난과 불행과 역경 속에서도 계속 낳고 낳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 중에서도 믿음의 대를 이어가더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에게서 마침표를 찍는 선민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과 불행 속에서도 믿음의 대를 잇고 잇다가 예수님에게서 마침표를 찍는 인생이 복된 인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계대의 생활에 복이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7절에서 8절을 보면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대대 후손 사이에 나의 언약을 세워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이 되어 주겠노라, 그리고 너와 네 후손들에게 가나안 일경을 기업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을 삼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성경 두 절에 세 번씩이나 네 후손의 하나님을 말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오래 살고 가문이 번창해도 믿음의 대를 잇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집안입니다.
  3월 23일부터 우리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리는데 미국 LA에 있는 선한목자 교회 림형석 목사님께서 강사로 오십니다. 그 분은 노량진 교회 림인식 목사님의 아들입니다. 우리 교단에서 선교 백주년 기념 대회를 할 때 총회가 하나 밖에 없는 그 가정에 상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만 해도 4대를 믿어오는 집안은 있어도 4대가 목사가 된 집안은 림목사님의 가정밖에 없었습니다. 림인식 목사님의 할아버지가 목사요, 아버지가 목사요, 림목사님 본인이 목사요, 그 아들 형제가 목사입니다. 그 아들중의 한분이 강사로 오시는 것입니다. 표창을 받을 만 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대를 이어갈 뿐 아니라 목사의 대를 이어갔습니다.
  바울사도가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를 맡기면서 새로 입교하여 믿은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절대로 감독이나 장로의 직분을 맡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하여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장로의 집안에서 장로, 목사의 집안에서 목사가 되는 계대의 가정에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대를 이어왔기 때문입니다.

  강화도 교동면 난정리라고 하는 곳에 박길원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형님이 있고 동생이 있는데 그 동네에 복음이 들어와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을 했습니다. 교회에 나가서 진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일에 형님이 일하고, 동생도 일하는데 박길원은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형이 얼마나 동생을 미워하겠습니까? 동생도 형이 얼마나 싫겠습니까? 그래서 얼마나 핍박을 하고 못살게 구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나는 집을 나가겠습니다"하여 산고개 하나를 넘어 지석리라고 하는 곳에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 장로님 한분이 부자로 살았습니다. 그 장로님께 찾아가서 그 집안의 머슴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기 위해서 머슴이 된 것입니다. 주일날 장로님 가정이 쉴 것 아닙니까?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봉사를 했습니다. 아주 성실하게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내가 이렇게 집을 떠나 사람의 머슴이 될 바에는 하나님의 머슴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즉 목사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보니 그 사람이 무엇인가 될 사람이라 싶어서 자기의 큰 딸과 짝을 맺어 주었습니다. 즉 큰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네가 여기에 있을 것이 아니라 서울로 가게"라고 하여 서울로 보내고 신학공부를 하게 하였습니다. 감리교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에 그 장로님은 돈이 있는지라 교회를 개척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장로교이기 까닭에 박길원 목사를 잘 모르지만 강화 지방에서 박길원 목사를 모른다 하면 그 사람은 날라리 교인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형님도 "우리도 예수 믿어야 되겠다" 하여 예수를 믿고, 동생의 가정도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후손들이 지금 전부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얼마나 복된 가정입니까?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그 가정 그 생활에 복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계대생활에 복이 있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복된 생활이 따로 있습니다. 첫째 완전한 생활에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한 말씀대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혹은 노아처럼 하나님 앞에 행하여 사람들의 세계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고 완전한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신약에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을 표준으로 삼고 살아갈 때 사람으로서 완전하여 하나님의 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변화의 생활에 복이 있습니다. 변화는 내가 스스로 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을 변화시킨 하나님, 아브라함을 변화시킨 하나님, 하나님은 변화 시켜 놓고 복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처럼 이름이 바뀌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 계대 생활에 복이 있습니다. 계대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자손손이 믿음의 대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대를 이어 복 받는 가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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