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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자와 양 / 요 10 :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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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와 양 (요한복음 10 : 7-15)
고현봉 목사 (부산영락교회)


1. 군사부 일체

군사부 일체(君師父一体)란 말이 있습니다. 君은 임금군, 師는 스승사, 父는 아비부, 임금․스승․아버지의 은혜는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이 땅에 살면서 기본적으로 적어도 세 가지 은혜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며, 아울러 세 가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1) 임금과 신하

임금과 신하는 군신(君臣)관계인데 이것은 임금이 다스리는 왕정시대를 표준한 말이고, 현대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국가라는 한 나라와 국민의 관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나라 잃은 백성 곧 나라 없는 민족은 비참합니다. 과거 35 년간 일본 나라의 속국으로 있었던 우리 한국 민족은 이것을 뼈저리게 친히 경험한 바 있습니다.

2) 스승과 제자

둘째는 스승과 제자의 사제(師弟)관계입니다. 오늘 우리 나라에는 선생과 학생은 있지만 스승과 제자는 없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군사부 일체가 무너진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래서는 교육이 안 됩니다. 학교에서 선생이 생도들에게 지식만 가르치는 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군사부 일체의 정신 즉 어버이가 자녀를 사랑하고 한 나라의 통치자가 국가 사회를 위하여 올바른 국민을 양성하려는 의도와 같은 심정으로, 교사 자신이 인격적으로 모범을 보이며 지대한 관심으로 학생들의 지․정․의 삼자의 균형 있는 계발을 도모하는 전인교육을 실천함으로써만 참된 교육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나라의 제일 큰 문제점이 교육, 문교정책이 아닙니까?

(1) 모범적 스승 나는 일찍이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0세 때부터 약 10 년간 학교선생의 일을 본 관계로, 오늘도 학교 교육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지금도 학교 앞을 지나갈 때 그저 통과하지 못하고 운동장과 교실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때로는 교문 안으로 들어서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동들을 관심 깊이 관찰하기도 합니다.

일제시대 비록 식민지 교육이라고 하지만, 교육의 원리나 사제간의 의리 같은 것은 조금도 다름 없이 국경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지금도 절실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범교육을 받을 때는 도립 사범학교가 생기기 전 서울․평양․대구 세 군대에만 있는 총독부 직영의 관립 사범이어서, 스승들이 모두 우수한 분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범학교나 중․고등학교 선생을 교유(敎諭)라고 불렀지요. 평양 사범에 교유가 50 여명, 그중 한국인은 5 명 뿐이고 거의 전부가 일본인 일색이었어요. 지금은 다 작고하시고 일본인 한 분만이 남아 계시는데, 현재 일본 큐슈(九州)지방 나가사키(長崎)현에 거주하시는 미야진끼 노부오(宮崎信雄 )라는 스승입니다.

이 분의 전공 분야는 역사이면서 우리 학급을 계속 여러 해 담임하셨던 관계로 사제지간으로 각별히 친근하게 지내온 분입니다. 작년 5월 15일 인천 공항에서 이 은사 미야자끼 선생님을 66 년만에 처음 만나 뵙고 대단히 반가웠습니다. 92세의 고령으로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지만 체격은 매우 건강하셨습니다. 그날 북한 평양에 가기 위하여 “동북아 선교회” 7 인 대표 일행이 중국 북경으로 향발하는 비행 시간이 되어, 점심 대접도 못하고 총총히 작별을 고하고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서신 교통으로 사제간의 친교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교육가로서 흠할 데가 없는 참으로 훌륭하신 분입니다. 군사부 일체란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존경할만한 모범적 스승으로 제 마음 속에 모시고 있습니다. 작년 6월 7일부 그의 편지 가운데, 내가 북한에 들어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충격으로 가슴이 철렁할 정도(ドキツと すゐ程)였으며, 그후 무사히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일단 안심이 되었다(一應 ホツと しました)는 말씀과 함께, 부인과 자녀들을 만나지 못한 것을 대단히 섭섭하게 생각하셨다며, 2,3 개월 후에 또 가신다니 이번에는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마음 속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내용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스승의 말씀으로 깊은 감동을 받은 나는 곧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습니다. “선생님의 저에 대한 관념 또는 관심이 사제관계의 차원을 멀리 초월하여, 부자 또는 형제와 같은 육친관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지금까지 사랑 받는 제자로서 선생님을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해 왔습니다만, 이제 후로는 한 핏줄을 이어 받은 혈연관계와 다름없이 은사님을 육친의 아버지 또는 형님과 같이 모실 생각입니다.”

(2) 국경 없는 사제관계 1932년 11월 19일 평양 사범학교 개교 이래 가장 중대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3 년여 전부터 항일 투쟁을 위한 비밀결사가 학교 내에 조직되어 지하 활동을 해 오다가, 때마침 일제가 만주에 출병하여 괴뢰정권을 수립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반전 삐라를 뿌리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몇몇 학생이 퇴학 처분을 당했던 것입니다. 당시 이 조직체의 주동자였던 제3학년 학생(심상과 제1회 졸업예정자) 구 두서(具斗書)도, 경찰서로 끌려가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수감 중에 있을 때, 제3학년 담임 히다까(日高) 선생이 경찰서로 찾아가 자기 자신이 책임 지기로 서약하고, 평소 사랑하던 애제자(愛弟子)) 구 두서를 빼내어 학교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후 사범학교 교유 간부회의 때 츠다(津田) 교장이 히다까 선생에게, “당신은 한국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그들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모욕적 발언을 하였습니다. 이에 분연히 일어선 히다까 선생은 “스승의 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대들! 사제지간의 사랑이 메마른 그대들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대갈 일성(大喝一聲), 자리를 박차고 물러났다는 놀라운 사실이 후일 모 한군인 교유를 통하여 알려졌습니다. 진정한 사제관계는 국경을 초월한다는 진리를 증명하는 일화라 하겠습니다. 위에 언급한 미야자끼 선생이 이러한 국경 없는 사제관계를 견지하는 또 하나의 참된 스승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3) 아버지와 아들

셋째로 아버지와 아들의 부자관계, 이는 혈연적으로 이루어진 가장 친근한 관계라 하겠습니다. 한 핏줄을 이어받아 어버이의 자녀가 된 남녀 동기들이 한 지붕 밑에서 동거하며, 한 솥의 밥을 먹으며 본능적인 사랑으로 연합된 인생의 안식처와 행복의 요람인 한 가정의 구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인류 사회의 기본 단위로 어버이는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감사와 존경으로 효도하면서 성장하여 결혼으로 한 가정을 이루어 사회에 진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고 풍성하게 나타난 곳이 한 가정의 부자관계임을 알게 되며, 따라서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고 사랑을 배우며 또 그들 자신이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낳아 사랑으로 양육함으로써 자자손손 가문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사랑 뿐이 아니라 가정에서 말을 배우고 부모의 도움으로 학교에 가서 지식을 배우고 사회인으로서 공동생활을 영위할 줄 아는 훈련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군사부 일체 세 가지 관계 중에서 시간적으로 부자관계가 맨 먼저 성립되고, 실제적으로도 가장 기본적이며 혈연적으로 이루어진 친근한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어린이들이 점차 자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사제관계가 형성되며, 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로부터 국가 사회적 접촉을 통하여 군신관계로 서서히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은 또한 우리 인생 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즐겁고 행복한 곳입니다. 일찍이 옛 시인은 다음과 같이 “안락의 내 가정 (Home, Home, Sweet Home)”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락한 곳마다 모두 방황하여도 일간 두옥 내집 같은 곳이 없도다. 광활한 천지에 화려한 집 많아도 날 평안케 함은 오직 내집 뿐이라. 안락의 내 가정, 내 가정 밖에는 좋은 곳이 없도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오늘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모두가 다 즐겁고 행복합니까? 오늘 우리 사회에 가옥(House)은 있으나 가정(Home)은 없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혼율이 높아지면서 가정의 행복과 화락이 실종되어 가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고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악의 쓴 뿌리가 가정에까지 뻗어 들어와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앗아가는 말세지말의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민족과 세계 사회가 복음화되어 하나님께서 인생을 축복하여 세워 주신 가정의 신성과 행복을 굳게 지켜, 가정의 본질적 행복과 화락을 잘 유지하는 복된 사회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군사부 일체의 미덕을 준수 보존해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2. 목자와 양

오늘 말씀의 제목인 목자와 양의 관계를 군사부 일체와 비교해 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 11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하시고, 14절에 다시 반복하여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시므로, 예수님과 우리들을 목자와 양, 곧 목양관계로 지칭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목양관계는 단순히 목자와 양의 관계만이 아니고 군사부 일체의 세 가지 관계를 다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 봐야 하겠습니다.


1) 군사부 일체의 관계와 비교

(1) 사제관계 요한복음 13:13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옮도다. 내가 그러하다.” 14절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하신 주님의 말씀을 보아 예수님과 우리는 사제관계인 것을 알 수 있으며, 주인과 종의 주종관계도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2) 부자관계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질이요 동격이며 성부․성자는 꼭 같으시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찬송가 426장에 “날 위하여 날 위하여 예수 간구하시네, 형님 같이 대신하여 중한 고통 당했네.” 하신 가사대로, 예수님은 우리의 형님, 맏형님 또는 맏오빠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부자관계 또는 형제관계도 된다는 말입니다.

(3) 군신관계 또 예수는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으신 왕이신고로 우리와 군신관계도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 다 되시지요. 우리의 신랑이므로 부부관계도 성립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로서 성전의 모퉁이돌이 되시고 우리는 모두 거기에 연합된 돌들로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며(벧전 2:4,5), 주님은 성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만군의 주 군대장관이 되시고 우리는 십자가의 정병이 되는 것이며, 아울러 그리스도는 만국인의 구주시며 일만 왕의 대왕과,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과 영광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물로는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며, 액체로는 생수의 근원과 보혈의 능력이 되시는 동시에, 동물로는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4) 목양관계 이와 같이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 되셔서 군사
부 일체의 관계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찰해 보았습니다만,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 그는 목자이고 우리는 양들로서, 주님과 우리는 목양관계가 된다는 것을 밝히 말씀하신 사실에 각별한 주의를 환기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0장에는 그리스도의 최후 공중 강화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후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차차 막을 내리게 되고(11:-12:), 제자들에 대한 사적 계시(13:-17:)를 통해 십자가를 향해 전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 공중 강화의 마지막으로 목자와 양의 교훈을 주셨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인상 깊은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선한 목자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은 어떤 목자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삯군 목자도 있고 나쁘고 못된 목자도 있는데, 우리 주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고 두 번 반복하여(11절, 14절)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선하다는 헬라어 형용사가 둘이 있는데 ‘아가도스’와 ‘칼로스’, 여기에 선하다는 말은 ‘칼로스’로 되어 있어 ‘아가도스’보다 그 뜻이 풍부하고 다양합니다.

①예루살렘 성전처럼 외형적 미, 예수님은 그 외모도 멋있고 참 아름다운 분이었습니다. ②소금처럼 잘 사용되는 미, ③집사들처럼 그 직책을 맡아 잘 감당하는 미, ④도덕적인 미, 공동 번역에는 ‘착한 목자’라고 되어 있어 윤리 도덕적으로 매우 착하고 선하다는 뜻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⑤양심적인 미, 사람들의 양심은 오염되고 화인 맞아 타락할 수 있으나 예수님의 양심은 언제나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⑥완전성, 사람들은 모든 면에 불완전하나 예수님은 항상 완전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3) 생명의 관계

11절과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하시고는 어느 정도 선하신가 하는 내용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양의 관계는 곧 생명의 관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사부 일체에서 보면 역시 충성된 신하는 정몽주와 같이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이런 충신은 쉽지 않으므로 군신관계를 생명의 관계라고는 할 수 없고, 사제지간이나 부자관계, 심지어는 부부일신이라는 부부관계도 생명의 관계라고는 할 수 없지요. 자기 생명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지, 상대방의 죽음을 대신 죽는 일은 극히 드문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생명의 관계라고는 할 수가 없는 줄 압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 대신 죽으셨으므로 목양의 관계는 진정 생명의 관계임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측량할 수 없는 은혜

생각할수록 그의 은혜와 사랑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1) 군사부 일체보다 우월함

군사부 일체 중 첫째가 임금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나 오늘의 민주주의 국가의 혜택을 입고 우리가 살아 가지만, 왕이나 대통령이 우리 죽을 죄를 대신하는 생명의 관계가 되지 못하며, 스승의 은혜와 부모의 사랑이 지극하지만 우리 죽음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으므로, 사제간과 부자간도 생명의 관계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타 부부관계나 친구지간의 붕우관계도 생명의 관계는 되지 못합니다.

오직 목자와 양-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과 그의 양들인 성도들의 목양관계만이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는 생명의 관계임을 명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 믿음 굳게 지켜 선한 목자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친절한 팔에 안겨 행복한 생활과 영원한 생명 구원의 길로 매진해 나가는 그의 신실한 양떼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2) 삯군 목자

오늘의 본문은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를 날카롭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삯군들의 관심은 양에 있지 않고 삯에 있으므로, 이리나 맹수가 오는 위기를 당하면 그만 양을 버리고 도망 치고 맙니다. 주님은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삯군 목자라고 지칭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전장인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예수께서 고쳐주신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힐난한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삯군 목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도 양을 위하는 체하면서 양의 털과 고기를 탐하는 사이비한 삯군 목자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양들은 이런 거짓 목자를 절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인 나그네가 예루살렘 근처를 여행하다가, 저녁 석양에 많은 양떼를 거느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목자를 발견하고, 다가가서 목자의 옷을 바꿔 입고 양떼를 불러 보았으나 한 마리도 따라오지를 않습니다. 그때 목자가 나서서 스코틀랜드인의 옷을 입은 채 양들을 부르니 전부 모여 들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양들은 자기 목자를 알고 잘 순종합니다.

3) 목장생활의 2대 요소

목양관계가 질서 있게 유지되고 목장생활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데는 목자와 양들에게 각각 자기의 본분을 충실히 이행하는 미덕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을 위한 목자의 헌신적 사랑과 목자에 대한 양들의 절대적 신뢰-이 두 가지는 목장생활의 2대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덕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지만, 선한 목자 예수님이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므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희생적 정신과 헌신적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양들은 이러한 목자를 알고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그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양관계는 이 세상의 미덕인 군사부 일체의 관계보다 훨신 우수한 생명의 관계로서, 감히 측량 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은혜임을 깊이 깨닫고 이러한 특권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일평생 변함 없이 이 목양관계에 안주하며 고수하는 양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양의 문

1) 이중적 “진실로”

본문 7절에 보면 양의 문이란 말이 나오는데, 그 위에 진실로 란 부사구가 두 번 반복되어 있으므로 강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이중적 진실로는 요한복음 특징적 용어 중의 하나입니다. 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복음에는 진실로란 말은 한 번씩만 나오고, 진실로 진실로 하는 이중적 진실로는 요한복음서에만 25회 나타나 있습니다. 변론의 초두에 나타나는 법은 없고, 말씀을 계속하는 중에서 보다 깊은 진리나 회답 때에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보면 이 말은 아멘 아멘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도 끝에 우리가 아멘하는 것은 진실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이상 기도한 것이 진실한 것이니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기도 후에는 아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4에 예수님을 가리켜 아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멘이신 주님에게는 적당한 표현 방법인 것입니다.

2) 당시의 목양 제도

예수님 당시는 목자들이 몇 사람 합동하여 양의 우리를 가지고, 밤에는 양을 거기에 다 함께 넣고 문지기 하나를 두었습니다. 그 우리는 울장이 둘러있고 거기에는 목자라도 그 문을 통해서만 출입하며, 만일 울장을 넘어가는 자는 도적이요 강도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교회요, 문은 그리스도, 양은 신자, 목자는 교역자-목사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인이 받는 3대 축복

9절은 양들(그리스도인)이 받는 3대 축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문이니”-예수님은 교회의 문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① 안보(安保) 우리 안으로 들어온 양은 안전이 보장됩니다. 밖은 비록 캄캄하고 맹수들이 울부짖고 있지만,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은 절대 안전합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신자들은 절대 안전하다는 말입니다. 원수 마귀 손못대고 환난 풍파가 없다는 말입니다. ② 자유 보혈의 능력으로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 구원함을 받습니다. ③ 공급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습니다. 그리하여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풍성히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본 교회 성도 여러분! 교회 마당 앞 큰 길에서 넓게 열린 정문으로 들어설 때마다, 여러분은 양의 우리인 교회 안으로 들어와 현관 안에 들어서며, 양의 문인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다는 생각을 하면서, 들어가며 나오며 말씀의 꼴 생명의 만나를 얻고 또 얻어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이 받는 3대 축복-안전․자유․공급을 풍성히 받아 누리는 구원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5. 아흔아홉과 한 마리 양

1) 잃은 양과 찾는 목자

평화로운 목장생활 가운데 하나의 비극이 있다면 잃은 양이 생겼을 때라 하겠습니다. 100 마리 양 중에서 한 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면 충분하지 않느냐 하는 위로의 말에도 불구하고, 선한 목자는 그 양도 사랑한다고 결연히 우리를 떠나 높은 산 험한 길로 찾으러 나갑니다. 어둔 밤이 새도록 큰 고생 끝에 드디어 매-매 울부짖는 양의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층암 절벽의 위험을 무릅쓰고 목자는 기어히 잃은 양을 찾아 안고 기쁨 넘쳐서 돌아옵니다.

2) 천국 잔치

집에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의 잃은 양을 찾았으니 나와 함께 즐거워 하자며 큰 잔치를 배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한 큰 천국 잔치가 벌어진다고, 예수님 친히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에서 깊이 생각해야 될 것은, 그 한 마리 양이 잃어버린 바 되었던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목자와 양 중에서 어느 편에 책임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선하고 완전하신 목자에게 책임이 있을 수 없고 순전히 그 양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양의 부주의와 실수로 생긴 사건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 성도들은 크게 반성하고 회개해야 될 것입니다.

6. 결론
지난 달 양에 대한 설교를 제가 한 것과 같이, 양은 동물 중에 가장 연약한 동물입니다. 그 대신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 듣고 따르므로 안전과 자유와 공급을 받아 풍성한 삶을 누리며, 어느 동물보다도 사람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공급하며 가장 유용한 동물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비록 약하나 권세 능력 무한하신 선한 목자 예수님을 절대 신뢰하고 순종하며 따라 가므로, 항상 평안과 화평을 누리며 죄에서 자유를 얻어 구원의 축복을 받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영육간에 풍성한 공급을 받아 양과 같이, 교회와 국가 사회 민족 앞에 여러 가지로 유익한 봉사를 할 수 있는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불순종과 실수로 잃은 양되어 주님을 근심케 하는 자 되지 않기를 바라며, 잃은 양 찾기운동을 전개하여 내 가족과 이웃 또는 각자가 속한 교구와 구역 가운데, 본 교회 등록자 중에서 주일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교회 출석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전체 교우들이 책임지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며 교회에 등록시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미 등록된 자 중에서 교회 출석이 중단된 사람을 다시 복귀시키는 일을 꼭 잊지 않고 실천하므로, 본 교회가 더 한층 부흥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부산 영락의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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