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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연고라 / 욘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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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나의 연고라 
본 문 요나 1:11~16
설교자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어린 아이를 키워보신 엄마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는 잘 때는 천사인데 눈만 뜨면 원수예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우리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이를 데리고 쇼핑 가기가 무서워요. 한번 물건을 집으면 아무리 달래도 그냥 나오는 법이 없거든요. 제멋대로인 우리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디서 저런 말썽꾸러기가 나왔나 싶을 정도로 아이가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좋은 부모가 되고 싶지만 막상 고집불통이고 반항적인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미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가족심리학자인 제임스 돕슨 박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귀한 자식일수록 회초리를 들라’라는 책에서 답하고 있습니다.

  먼저 돕슨 박사는 어린 자녀는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영혼임을 잊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반항하는 아이에게 사랑으로 관대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매를 드는 일은 포기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매에 부모의 분노나 감정을 싣지 말라는 것입니다. 매를 들되 사랑의 매를 들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격려와 매를 균형있게 활용하여 아이를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요나서를 보면 요나는 마치 반항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요나를 다루시는 하나님은 때로는 사랑의 격려와 또 때로는 사랑의 매를 균형있게 사용할 줄 아는 성숙한 엄마와 같습니다.

  욘 1:2을 보면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을 칩니다. 하나님께서 매를 드셔서 그가 탄 배가 큰 폭풍을 만나게 됐고, 그는 바다에 던져져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했습니다.

  욘 3:2을 보면 요나는 다시 같은 명령을 받습니다. 마지  못해 니느웨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못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래도 그 말씀을 듣고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서자 이번에는 하나님께 화를 냈습니다.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박넝쿨을 준비하셔서 요나를 달래시고 설득하셨습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때로는 하나님께 반항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요나처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생각되어 하나님께 화를 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잘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매를 맞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항의 이유

  우리가 이 문제를 잘 극복하려면 먼저 요나가 하나님께 반항한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같은 이유로 하나님께 반항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유를 제거함으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반항한 이유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본문을 살펴보면 요나가 하나님을 잘 몰랐던 것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정말 뜻밖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저 이방 땅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정말 이 명령의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요나를 포함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사상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사상을 갖게 된 것은 신 7:6 말씀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선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목하는 단어는 바로 택하셨다는 뜻을 가진 바하르(bahar)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만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특별한 선택의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한 백성 다시 말해서 구별된 백성이 됐다고 믿었습니다. 다른 민족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신 민족, 하나님께서 포기하신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창 12:2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복의 근원의 사명을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받은 복을 부지런히 이방 민족에게 나누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하나님께 반항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가 문제입니다. 요나처럼 반항하고 불순종해서는 안됩니다.

  창 22장을 보면 소위 여호와 이레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100세에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께서 어찌 자기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하실 수 있습니까? 그것도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주신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실 수 있습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명령의 부당함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 까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이런 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순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각보다 크신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내 뜻보다 더 놀라운 뜻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알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너무 미워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니느웨는 당시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인 앗수르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이 니느웨 사람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도 큰 고통을 당해왔습니다. 그래서 요나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니느웨의 멸망을 위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니느웨 사람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11을 보면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죄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느웨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아끼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원수를 사랑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반항했습니다.

  프로이드라는 심리학자는 정말 기발하고도 재미있는 이론을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3-6세 사이에 아이들에게 독특한 심리적인 특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아이들에게는 소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있고, 여자아이들에게는 엘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라는 것이 있답니다.

  남자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은 충동이 생겨서 심지어 아빠를 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된답니다. 이것이 또한 죄책감으로 작용하여 아빠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나아가 아빠와 자기를 동일시하여 남성상을 이루어간답니다. 반대로 여자아이는 아빠 사랑을 독점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엄마와 자기를 동일시하면서 여성상을 이루어간답니다.

  실제로 이 시기의 아이들을 보면 사랑을 독점하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느낍니다. 아빠 사랑을 독점하고, 엄마 사랑을 독점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동생이 생기면 사랑을 독점할 수 없게 되어 동생을 미워합니다. 심한 경우 아빠 엄마가 없을 때 동생을 때리거나 학대하기까지 합니다.

  아빠, 엄마가 자기도 사랑하고 동생도 똑 같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빠 엄마가 동생을 사랑한다고 그만큼 자기를 덜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빠 엄마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하려 했습니다. 마치 3-6살짜리 어린 아이처럼 괴로워했습니다. 이스라엘도 사랑하시고 니느웨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반항한 것입니다.



  용혜원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라는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랑은 가난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청결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독점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누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반항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반항의 극복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반항하는 요나를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으로 격려해 주시고, 또 사랑의 매를 드셔서 선지자로서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니느웨와는 정반대의 길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도망치는 요나를  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의 매를 드셨습니다. 그 배에 큰 폭풍을 내리셨습니다.



  첫째, 영적 잠에서 깨었습니다.

  배가 큰 폭풍으로 어려움을 겪자 사공들은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폭풍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기 자기가 믿는 신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달랐습니다. 배 밑으로 내려가 누워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배에 타고있던 사람들 중에 요나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도 기도해야 할 때인 줄 알고 있는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명색이 선지자란 사람이 깊이 잠자고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요나는 “죽음의 잠을 자고 있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잠은 실제로는 깊은 영적인 잠이었던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못하는 영적인 잠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마비된 양심에서 될대로 되라는 포기와 절망의 잠입니다.

  감사하게도 깊은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요나를 이방 선장을 보내셔서 깨우십니다. 1:6에 보면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책망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명색이 선지자란 사람이 이방인에게 기도하라고 책망을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이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합니다. 영적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때로는 사망의 깊은 잠을 잘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할 수 없는 영적인 잠입니다. 믿음이 무너져내려 될대로 되라고 포기하는 절망의 잠입니다. 우리가 이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지금 일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둘째, 잘못을 깨닫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요나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이 제비를 뽑아서 이번 이 큰 폭풍의 원인을 찾고자 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흔히 사용하던 방법입니다. 구약성경에도 자주 나오는 방법입니다. 제비를 뽑아 결과를 보니 바로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제서야 요나는 12절에서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라!” 깨닫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다고 했습니다.

  사실 요나는 지금 되어지는 모든 일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만 보내시지 않으셨으면 자기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다른 선지자들처럼 목숨걸고 선지자 사역도 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괴롭히지만 않았다면 자기가 이렇게 니느웨로 가기를 싫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요나는 모든 것이 “네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내 탓”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요나의 회복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창 3장에 보면 인류의 타락 기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 3:12을 보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담은 자기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하와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와가 먹으라고 했기 때문에 먹었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담은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내게 주시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죄를 짓게 된 책임에 하나님의 책임도 있다는 것입니다.

  책임 전가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보편적인 특징입니다. 우리는 잘못이 드러날 때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자기 외의 상황에 돌리는 일이 익숙합니다. 어쩌면 타락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제 자기 죄를 깨닫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용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잠 28:13에 보면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요나처럼 “나의 연고라”, “내 죄 때문이요 내 탓이라”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잘되면 내 탓이요 잘못되면 조상 탓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잘되면 주님 덕이요 네 덕이고, 잘못되면 내 탓이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고백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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