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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 있는 동안 힘쓸 일 /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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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살아 있는 동안 힘쓸 일
< 본 문 > 눅16:19~31


지난 주간에 발생된 대구 지하철 참사는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많이 착잡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일을 저지른 방화범이 괘씸하기도 하고, 정신 장애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불쌍하기도 하고, 어떻게 우리 나라는 늘 이 모양일까 부아가 치밀기도 하고, 나라 위해 많이 기도하지 못한 자책감이 들기도 하고, ... 하여간 심란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일로 가족을 잃은 분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생각해보면 정말 기가 막힙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될 줄로 압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게 정말 살아 있는 게 아니구나 ... ” 분주한 일상 생활에 파묻혀 잊어버리고 살아서 그렇지 사실은 죽음의 그림자가 늘 우리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잘도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 전 한 신문에 논설위원이 쓴 글의 제목이 기억납니다. ‘목숨 걸고 살아가는 나날’이란 제목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안전 시스템의 허술함을 풍자하는 글이었지만, 그 제목이 어쩌면 우리 인생살이를 가장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봤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도 멀쩡히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언제라도 누구라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 날 사고 당시 죽음을 맞이한 분들 가운데는 남녀노소가 다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부모보다 앞서 간 젊은이들도, 꿈에 부풀어 새 학기를 준비하던 학생들도, 신혼의 단꿈을 꾸던 분들도 있었습니다. 죽을 만한 이유도 없고 죽을 시기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갔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모든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이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마음 속에 새겨봐야 될 것입니다.

흔히 현대인들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터부시합니다. 특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에 비해 그런 경향이 더 심합니다. 비근한 예로 병에 걸려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본인에게만 쉬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죽음은 우리 인생의 필연적인 한 부분입니다.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잊어버리고 살다가 갑자기 맞이하고 당황해서는 곤란합니다. 물론 지나치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도 병적이겠죠. 하지만 최소한 우리 인생의 현실로 인정할 줄 아는 것이 현명한 삶의 태도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역설적으로 잘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이 사실은 인생을 가장 잘 사는 사람입니다.
예> 미국 역사 상 최고 부자 록펠러 - 빌게이츠 이상 - 기본적으로 신실한 크리스천이지만 아주 헌신적인 삶을 살게 된 데에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53세 때 이미 석유 재벌로 거부가 되어 있을 때인데 불치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의사의 말을 듣고 이제 1년 후에는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늘 우울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죽으면 이 많은 재산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가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래, 기왕 죽을 바에는 실컷 베풀고 죽자.” 그 후로 학교, 자선단체, 교회, 사회단체 등에 적극 기부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의 생각과 삶
이 달라지면서 저절로 그의 병이 치유된 것입니다. 그 후 그는 98세까지 45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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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죽음을 현실로 인정하는 사람이 인생을 가장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을 정말 지혜롭게 가치 있게 잘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죽음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저 멀게만 여기다가 갑자기 맞이하여 당황하면서 후회 막심한 인생을 마치면 절대 안됩니다. 이런 취지에서 오늘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의 중요한 일부인 죽음을 생각하고 남은 생애 더 지혜롭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는 말씀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 살 때 부귀영화를 듬뿍 누린 사람입니다. 호의호식하고 날마다 잔치나 하고 희희낙락하며 살았습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는 문자 그대로 상거지입니다. 음식 쓰레기나 주워먹고 질병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음과 더불어 완전히 입장이 역전됩니다. 나사로는 천국에 올라갑니다. 반면에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얼마나 후회 막심했을까 짐작이 갑니다. 그는 인생을 잘못 살았습니다. 왜요? 죽음을 미리 진지하게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나사로는 미리 죽음을 의식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나사로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누가 그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영생을 얻는 데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좋다고 한다면 반드시 죽음을 의식하며 신앙 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저 현세적 관심만 갖고 산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바른 신앙 생활도 지혜로운 인생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 말씀을 부자의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합니다. 죽음을 의식하지 못한 채 인생을 잘못 살았던 사람의 예를 반면교사 삼아 죽음을 의식하고 남은 생애 어떻게 살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쪼록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을 만들어 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살아 있는 동안 무엇보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가진 소유나 즐기는 것들이 대단해 보입니다. 그래서 가진 사람, 누리는 사람 편에서는 자랑하며 살고, 못 가지고 못 누리는 사람 편에서는 기죽어 삽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이 닥쳐오면 소유나 즐기던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 헛됩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때는 가장 중요한 게 믿음입니다.

왜 믿음이 중요합니까? 죽음 이후 영혼이 내세에 들어갈 때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 오직 믿음의 유무에 따라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값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값을 대신 치뤘습니다. 대신 심판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지옥 고통의 예고편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에게 그 고통이 면제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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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죄 사함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얼마
나 소중합니까? 그래서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이 피를 믿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만이 천국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입니다.(요14:6)

나사로는 믿음이 있었기에 천국의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습니다. 거기서 영원한 복락을 누립니다. 그러나 부자는 믿음이 없었기에 자신의 죄로 인해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거기서 고통 가운데 괴로워하며 있습니다. 지옥은 타오르는 불이 있고 목마름이 있는 곳입니다. 오죽하면 물 한 방울이 아쉬웠겠습니까? 23절~24절. 게다가 이것은 결정적입니다. 번복이 안됩니다. 26절. 큰 구렁이 있어 왔다 갔다 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것이 결정되는 시기입니다. 이 세상 살 동안입니다. 이 세상 살 동안 믿음이냐 아니냐 그것에 따라 미리 확정됩니다. 나중에는 바꿀 수도 만회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국은 예약 손님만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 동안 할 일도 많고 바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형편과 사정이 있더라도 결코 핑계대지 말고 피하지 말고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게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하다 못해 턱걸이 구원이라도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 십자가 옆에 달렸다가 죽음 직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에 간 강도처럼 말입니다. 그 이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 우리에게 죽음이 닥쳐올지 자신도 아무도 모르기에 믿음의 순간은 항상 ‘지금 당장’입니다. 고후6:2 “ ...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예수 그리스도를 행한 믿음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 살아 있는 동안 사랑하며 살아야 됩니다.

세월이 가도 죽음이 닥쳐와도 사랑의 추억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죽음이 닥쳐오면 아무 것도 영원한 추억으로 남기지 못합니다.

부자를 보십시오. 자기 혼자, 혹은 그런 부류들 끼리 끼리 먹고 마시고 즐겼습
니다. 대문 앞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부자의 죄
악 중 하나가 바로 무관심입니다. 그는 쾌락에 빠져 있었지만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죄입니다. 약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세상 모든 것은 다 사라지지만 사랑만은 영원합니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번 대구 참사의 경우도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교훈해 줍니다. 마지막 순간 그 아수라장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하는 연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 “여보, 사랑해요. 애들 보고 싶어.” “어머니,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세요.” 이 순간 세상에서 그동안 굉장하게 여기던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없습니다. 통장 어디 있다느니, 누구한테 빚 받으라느니, 회사 일이 어떻다느니, ... 이런 것은 언급할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우선순위를 뒤바꾸고 살아갑니다. 덜 중요한 것에 목을 걸고 살아갑니다. 일에 쫓기고, 공부에 쫓기고, 세상 재미에 푹 빠지고, ...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나중에 가서야 아쉬워하면서 후회하게 되는 겁니다. 심지어는 별 것도 아닌데 사소한 오해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하기에도 짧은 인생인데 ...
예> 어느 부인 - 친구가 남편 조심하라고 충고 ... 이야기인즉슨 차에 여자를 태우고 가더라는 것 ... - 퇴근한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었습니다. 남편이 같은 바행으로 가는 회사 아가씨인데 옆으로 지나가면서 못본 척 하기 어려워서 태워 주었다는 것 ... 오해가 풀리지 않아 다투고 대판 싸웠는데 ... 다음 날 서로 말없이 남편이 출근 ... 그후 바로 몇 시간 후 연락이 왔는데 ... 교통 사고 ... 뛰어 가보니까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고 곧 숨을 거두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오해 였는데 ... 이런 경우 일평생 얼마나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야 하나 ... 우리는 항상 풀고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늦으면 아주 늦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기회 잇을 때 사랑하십시오.”

그러므로 매일 매일 순간순간 우리 주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언제 헤어진다 하더라도 사랑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3] 살아 있는 동안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됩니다.

이 세상 떠나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복음 전도와 구제입니다.
이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도 지금 당장 확인해야 되지만, 복음 전도도 지금 당장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죽음의 순간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27절~31절. 부자가 세상에 있는 형제 다섯이 생각났습니다. 나사로를 시켜서 지옥의 고통에 대해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은 일언지하에 거절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을 때 전도해야 됩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 ”

그리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고 구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무관심도 죄악입니다. 본문의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의 나사로에게도 무관심했습니다. 사람 잘 만나서 그렇지 담 뛰어 넘어가서 위협하고 강도질하면 어떻게 할 뻔했습니까? 그러므로 가족 사랑 외에 이웃 사랑도 중요합니다. 살다 보면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 가족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이번 참사의 경우 장애인이 방화한 게 발단이었
습니다. 그 사람이 백번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거시적으로는 사회 전체가 책임입니다. 그 사람이 그 지경이 되기까지 무관심했으니까 말입니다. 결국 그런 것들이 나 자신과 내 가족들에게까지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겁니다.
예> 공산당이 출현한 것도 다 이런 것 때문입니다. 소외된 자들을 돌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예> 옛날 미국 뉴욕에 유명한 판사가 있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 이야기 - 즉결재판 담당 - 가게에서 도둑질하다 잡혀온 노인 ... - 기소 - 배가 고파 훔쳤다고 진술 ... - 10불 벌금형 선고 - 그리고 나서 지갑에서 10불 꺼냈다. “이 10불은 내가 냅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의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데 그동안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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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음식 먹은 죄에 대한 벌금입니다.” 중절 모자를 돌림 ... “이 재판정에 있는 분들 중에서도 나처럼 벌금을 내고 싶은 분 있다면 이 모자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넣고 나갈 수 있었다고 ...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중세 수도사들은 “Mo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시오!)라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굿모닝이 아니라 ...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 시켜주는 인사말입니다. 기분나쁜 말이 아닙니다. 의미심장합니다.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 인생을 잘 살 수 있습니다. 부디 이 말씀 들으시고 오늘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힘쓰며 살아갈 것인지 다시 한번 마음 속에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디 남은 생애 지혜로운 인생, 승리하는 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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