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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 눅 15:3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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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누가복음 15장 3-7절
유상현 목사 (알곡교회)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영접하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듣던 청중들도 모두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리, 창기, 범법자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여 철저히 정죄 된 자들이었습니다. 사회에서 멸시 당하며 심한 열등의식과 고통 속에 살아가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 일은 주님이 오신 목적이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말씀이 누가복음 15장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이야기만 다르고 메시지는 동일한 세 가지 비유가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본문은 그 중에 제일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백 마리의 양을 가진 목자가 있었습니다. 목자는 양을 끌고 하루 종일 풀을 찾아다니면서 양을 먹입니다.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지면 지정된 양우리로 양떼를 몰고 옵니다. 와서는 우리 문 앞에 막대기를 걸쳐놓고는 한 마리씩 그 막대기 밑으로 통과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모든 양들은 제 차례를 기다리다가 목자가 들어가라고 하면 한 마리씩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목자는 막대기 밑으로 통과하는 양을 일일이 살펴보면서 어디 다친데는 없나, 오늘 잘 먹었나, 병이 나지는 않았는지 유심히 살펴보면서 들여보냅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일일이 세면서 들여보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마리, 두 마리 세면서 전부 다 들여보냈는데, 백 마리여야 할 양이 아흔 아홉밖에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리가 없는 것입니다. 잘못 세었나 싶어 다시 세어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하, 한 마리가 없어졌구나.' 그 다음부터 목자의 마음은 우리안에있는 아흔 아홉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캄캄한 밤에 혼자 떨어져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벌벌 떨며 헤매고있을 그 어린 양 하나에게 목자의 마음은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피곤하고 배가 고프다는 것도 무시한 채 막대기 하나를 들고 양을 찾아갑니다. '오늘 내가 어느 골짜기, 어느 언덕을 지났더라?' 하루의 여정을 회상하면서 오던 길을 다시 찾아갑니다.

그 잃어버린 어린양을 찾을 때까지 밤이 새도록 다니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목자의 소리는 양이 제일 잘 압니다. 어떤 소리를 지르는지는 모르지만 그 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지릅니다. 행여나 길을 잃고 헤메이던 양이 그 소리를 듣고 "음매"하고 응답을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마침 내 벼랑에 떨어져 가시덤불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양을 찾게 되었습니다. 상처에 피를 닦아주며 치료한 후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어깨에 메고 휘파람을 불며 신나게 돌아옵니다. 배고픈 것도 모르고 친구들을 다 불러 놓고 "찾았어, 찾았어."하면서 기뻐하는 목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본문에 "일어버린 양"은 '고의' 혹은 '악의'로 양떼를 떠나 사악한 길로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양이 연약하고, 무지하며, 미련하여 양떼들과 함께 올바로 목자를 따라가지 못한 양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잃어버린 양은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는 죄인들을 나타냅니다. 아직 예수께 나아오지 못한 비 기독교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나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기쁨은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는 일은 잃은 양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1. 한 영혼의 귀중함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본문 4절에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양을 잃어버린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를 위하여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렇다고 남은 아흔 아홉 마리가 귀중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숫자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한 생명의 귀중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귀중히 여깁니다. 남은 99마리의 양떼도 역시 한 마리 한 마리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마 16:26). 또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마 18:14). 그러므로 영혼을 실족케 하는 자는 화가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마 18:7). 한 마리의 양은 귀중합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은 귀중합니다. 한 영혼은 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께서는 지금도 잃어진 한 마리의 양을 찾으십니다. 그 양의 경제적 가치 때문이 아닙니다. 길을 잃고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고 무지하여 목자의 품을 떠나 잃어졌기 때문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랑은 잃어진 한 마리의 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그러므로 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합니다.


2. 잃어진 영혼에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양무리를 세던 목자는 한 마리가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리 세어봐도 아흔 아홉 마리뿐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목자는 온통 잃어버린 양에 마음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양을 사랑하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그 사랑은 관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생각합니다. 99마리가 있는데도 그 마음은 한 마리의 잃은 양만을 생각합니다. 그 양을 찾을 때까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의 머리는 온통 불쌍한 양의 환상으로 가득차 버렸습니다. 사랑은 관심입니다. 우리도 불신자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환상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사람들이 갖는 마음입니다.


3.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양을 잃은 목자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불행한 일을 당하였을까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양들을 들에 남겨두고 잃은 양을 찾아 헤매 입니다. 이름을 부르면 찾습니다. 찾을 때까지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찾습니다. 피곤한 줄도 모르고 찾습니다. 양을 찾아야 된다는 일념뿐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그렇게 찾으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직접 역사 현장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다니시면서 잃은 양을 찾으셨습니다. 지속적으로 찾으셨습니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찾으셨습니다.

왜 그토록 양을 찾으셨을까요? 이유는 자기 양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양을 찾고야 마는 목자,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기 양 찾아 여리고 성으로 들어가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팔자 센 여자라고 조롱을 받으면서도 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어서 여섯 번째 시집을 갖는데 그것도 남의 남편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동네 사람들에게 찢기고 상하여 괴로워하는 잃어진 한 여인을 찾으러 사마리아로 들어가셔야만 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아다니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자고 합니다. 전도는 잃어진 영혼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잃어진 영혼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4.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5절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절에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고 했습니다. 7절에 "...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즐거워( )"라는 말은 만족으로 인한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기쁨이 넘쳐서 노래라도 부르며 춤을 덩실덩실 추고 싶을 정도로 흥분이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합니다. 그 양은 목자의 어깨에 업히는 순간 모든 불안과 초조가 사라지고 평안과 쉼을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는 자마다 이러한 평안을 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 11:28). 누구든지 예수께 오는 자마다 쉼을 얻습니다.

이 안식을 맛본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시 23:1). 양을 찾는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 쉼을 얻게 하는 것이 그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잔치를 열어 이웃과 함께 기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목자를 향하여 "양을 찾느라 피곤하거나 짜증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고개를 흔들면서 "아니오 나는 너무 기쁨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참으셨다고 하셨습니다(히 12:3). 한 영혼이 돌아 올 때 예수님은 기뻐하십니다. 지옥의 고통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기 백성을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 받은 성도의 존귀와 영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스바냐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우리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잃은 양을 찾아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잃은 양을 찾아 주님의 기쁨에 동참해야 합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기 위하여 주님이 친히 세우신 지상에 자리 잡은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관심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영혼에 대한 관심이 없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일 수가 없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은 아직 무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아니했거나 왔다가 떠나간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교회는 그들의 고통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받을 저주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찾기까지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전도입니다.

양은 지혜 있는 것 같으나 대단히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한번 간 길을 돌아 올 줄 모릅니다. 자기를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외부의 도전과 공격에 대처 할 능력이 없습니다.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도 못하는 철저한 의존적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양에게 목자는 필수적입니다. 목자가 없는 양은 죽음에 버려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것 같으나 죄 가운데서 빠져 나올 힘이 전혀 없습니다. 누군가가 구해주지 않는다면 영원한 멸망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신 선한 목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만한 여러 가지 일들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내가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이 기뻐 하실까? 내가 주님의 나라를 위해 특별히 헌신하면 기뻐 하실까? 예배 열심히 나오고 하나님 말씀을 잘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하나님이 기뻐 하실까? 예, 그것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기쁘게 하기를 원합니까? 전도하십시오. 전도해서 안 믿는 사람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십시오. 이것만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선교사나 전도자들이 최고입니다. 다른 것도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전도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전도하면 30배,60배, 100배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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