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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와 민족애 / 히 11: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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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민족애 (히 11:23-30)


오늘 우리 조국이 처하여 있는 현실은 그렇게 밝지를 못하다. 북에서는 수백만 명이 굶어죽어 가는데 핵무기로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을 앞두고 기대와 불안이 엇갈려 있는 것 같다.
이렇게 한국은 남북분단의 긴장과 갈등 속에 있는데도 남한은 너무 사치하고 정신적으로 해이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지난해 H 그룹이 51억 불어치 고급상품을 수입해 들어왔는데 며칠만에 불티나게 다 팔리고 그 백화점 근처는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한다. 밍크는 세계시장의 13%가 한국에서 팔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을 '밍크 공화국' 또는 '사치 공화국' 혹은 '뇌물 공화국'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오늘은 3.1절 제 84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기독교가 3.1 운동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였다. 당시 크리스천의 인구는 전체 인구의 2-3% 밖에 안되었지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 하나만 보아도 3.1 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다시 한번 3.1 정신과 3.1 운동에서 보여준 기독교의 애국애족 정신을 살펴봄으로써 귀감을 삼고자 한다.
기독교는 국가지상주의나 민족지상주의는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민족주의적 성격과 요소가 강하게 담겨있지만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민족주의를 초월한다. 국가지상주의나 민족주의가 좋은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망치게 하는 것이다. 독일의 히틀러나 일본의 동조나 이태리의 뭇소린이 저지른 죄가 바로 그것이었다.

프리드리히 마이니케는「독일의 비극」에서 지난 1세기 반 동안 독일국민의 의식 속에 소위 민족지상주의가 자리 잡은 데서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는 두 가지 결론을 내렸는데 하나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그 분에게 독일국민이 의식의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이런 비극을 피할 수가 없으며, 둘째로는 국가나 권력이 아니라 양심이 우위를 차지하는 의식구조가 아니고서는 그러한 비극을 극복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말은 의미 심장한 이야기이다. 진정한 애국운동을 하려면 국가지상주의나 민족지상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편 크리스천 중에는 사회참여를 거부하고 이 세상은 썩을 세상이요 멸망할 세상이니 우리는 상관할 바가 아니고 우리는 예수나 잘 믿다가 천당에나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

이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 참 믿음의 사람이면 믿음의 사람일수록 자기가 속하여 있는 지역사회와 민족 공동체를 참으로 사랑하고 봉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모세의 민족애가 그러했고 바울의 동족애가 그러했으며 그 외 예레미야나 에스겔이나 에스더 등 모든 신앙의 위인들이 참으로 불타는 애국심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모세는 출애굽기 32장 31절 이하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 얼마나 애국애족적인 호소인가?

오늘 읽은 히브리서 11장 24절 말씀이나 로마서 9장 1절 이하에 보면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라고 고백했다.

사도행전 28장 19절과 20절에서는 바울이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고 외쳤다. 에스더는 어떠했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말하면서 동족을 모함에서 구하기 위해 왕께 나갔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눈물의 기도는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3.1 운동은 다름 아닌 이러한 성서에 나타난 자기 민족의 자유와 구원을 위한 한국 크리스천의 신앙고백이 행동과 생활로 표현된 사건이었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지만 크리스천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기가 속한 국가가 있고 민족이 있다. 그 자기가 속한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므로 인류와 세계를 사랑하기를 배워야 한다. 자기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인류와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은 말짱 거짓말이다.

3.1 운동은 한국 크리스천들이 보여준 민족 공동체에 대한 행동과 생활로 표현된 신앙고백이었다. 당시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독립위원회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에 보면 9개 종목으로 된 한국의 주장을 설명하는 내용과 6개 종목으로 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학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학정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아왔다. 그들은 억압되었고 기독교가 공격을 받을 때 허위에 의해 기소되었고 죽어갔다. 기독교인 중의 지식인들은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종교를 포기하게 하려고 한국인들에게 온갖 처벌이 가해졌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등록을 해야만 했고 그들의 종교를 믿도록 허용하는 특별 증명서를 구해야만 했다. 교회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아야만 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방법으로 기독교 신자들을 억압했다.

2) 대한제국의 궁전에 속하는 토지들은 소작농들에 의해 경작되어 왔다. 그러나 합병 후에 이 토지들은 일본의 식민지화 단체(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유했고 한국농민들은 쫓겨나고 일본인들이 그곳에 정착했다. 생활수단이 박탈당했기 때문에 한국농민들은 옛 고향을 떠나서 만주로 이주해야만 했다.

3) 일본인들은 가족의 재산을 없애고 모든 한국인들을 빈곤하게 하려고 한국의 아들들에게 가족의 재산을 낭비하도록 유도했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소송을 충동질했다.

4) 일본인들은 부도덕을 조장하기 위해 한국인의 결혼 제한 관습을 철폐하고 혼례와 연령을 무시한 결혼을 허용했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기도 했다. 합병 이래로 8만 건의 이혼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중국도시들에 한국인 매춘부를 팔아 수입원으로 삼았다. 이 매춘부들 대부분은 14살이나 15살이다. 이것은 모든 한국인들을 멸망시키려는 일본의 종족 멸종정책의 일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 사람들을 기억하소서.

5) 일본정부는 아편 판매청을 세웠고 아편이 의학적 목적으로 사용된다는 구실 아래 한국인들과 대만인들에게 양귀비를 재배토록 했다. 그 아편은 비밀리에 중국에 반입되었다. 이 거래를 일본인들이 조장했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아편 중독자가 되었다.

6) 일본인들은 중고등학교 이상의 교육과정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선교단체에 의해 세워진 고등교육학교에는 심한 규제가 가해졌다.
또 함흥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맥레(McRae)목사는 당시 함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상세히 보고해 주고 있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함흥에서는 아무런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인 1919년 3월 2일 밤과 3월 3일 새벽에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 약간명과 교사 한 명이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3일 월요일에 경찰이 가게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는 말이 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중심가에 모였다.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나팔을 불었고 이를 신호로 하여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태극기가 물결쳤다. 함흥시의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많은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이날 일본인 소방대원들은 소화 진압용 갈고리를 휘둘러댔다. 그러나 아무도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3월 4일 12시 30분 경에 한국인들은 다시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 소리를 듣자 일본인 소방대가 곤봉을 들고 군중을 해산 시켰다. 그들은 또 곡괭이, 소화용 갈고리, 쇠뭉치, 단단한 몽둥이, 혹은 짧은 손 곤봉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여기 저기서 머리를 때리고 갈고리를 휘두르면서 군중 속으로 돌진해 갔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고 얼굴에서 피를 흘리면서 소방대원들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렇게 당한 사람들 중에 '채규세'라고 하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학생이며 한 한국인 경찰관의 동생이었다. 그는 큰 고통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머리는 한편으로 돌려져 놓여 있었으며 머리 왼쪽에서 나오는 피가 얼굴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두 일본인 경관에 의해 끌려갔다. 그의 머리에는 맞은 자국이 역력히 드러났고 왼쪽 얼굴의 맞은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왼쪽 다리도 또한 다쳐서 절름거렸고 고통 때문에 신음했다. 이 사람은 50살 가량 된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이름은 채학성이다. 목격한 바로는 한국인들은 한 사람도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어하기 위해 막대기를 들거나 돌을 던지지도 않았으며 일본인에 대해 욕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미국의 선교사들이 써 보낸 편지에 보면 이런 내용도 있다.
한국의 많은 대도시에서 3월1일 토요일 오후에 혁명이 시작되어 전국에 등불과 같이 번져갔다.

1) 그날 아침에 평양에 막 도착한 신학교 학생 다섯 명이 자신들의 방안에 있거나 잠자코 서있었는데도 오후에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들은 완전한 무죄를 주장했지만 강하게 치는 태형을 29 대씩 맞았다.

2) 두 소녀가 선교병원에서 가까운 한 집에서 머리채가 잡혀서 끌려나와 머리카락을 전봇대에 묶이고 경찰 대신 나선 소방대원들에게 무섭게 구타당했다. 그리고 나서 투옥되었다.

3) 65세 가량의 한 노인이 무리들에게 잡혀서 걷지 못하게 될 때까지 다리를 차이고 구타당했다. 그리고 나
서 감옥으로 끌려갔다. 끌려 가다가 200 야드도 채 못 가서 다른 분대소속의 군인들과 마주쳐서 똑같이 당하고 감옥에서도 다시 이 짓을 당했다. 그 사람이 쇠약해졌기 때문에 인력거로 집으로 보내졌다.

4) 도청 앞에서 무방비의 한국인 한 명이 쇠갈고리를 단 긴 막대기를 가진 두 소방대원에게 쫓기다가 살해되었다. 그들은 갈고리를 시체의 몸통에다 박아 끌어 당겨 땅에 질질 끌고 다녔다.

5)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무차별로 모욕 받고 구타당하고 칼로 베이고 소방대원들의 갈고리로 맞았다. 경찰서에서는 공식적으로 때렸으며, 어떤 때는 칼로 베어버리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한사람도 결코 군대에 항거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무저항의 저항이 여기에서 실천되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심지어는 제암리교회에서는 교인들을 교회에다 불러 가두어놓고 불을 질러 몽땅 태워 죽인 일도 있다.

이러한 처참한 수난과 잔인한 박해 속에서도 한국 크리스천들은 민족의 희망과 신념을 굽히지 않고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 그리고 겨레의 구원을 위해 과감히 일어났다.
조선 총독부는 그「소요진상」이란 글에서 기독교인들을 '조선의 장래에 대하여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 사실 우리의 선열들은 낙심치 않는 불굴의 정신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매어 달렸다.

한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금식하며 아침에 기도하고 밤에 기도합시다. 우리가 외치는 독립과 자유가 당장 실현되지 않더라도 10년, 50년, 100년 후의 후손들에게는 찾아올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여유가 있고 희망을 버리지 않은 끈질긴 신앙의 자세인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작사한 남궁억선생이 1919년 1월에「기러기」를 작사했는데 3절에 보면 이런 겨레적인 희망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곡간 없이 나는 새도 기를 자 뉜가 하늘 위에 한 분 계셔 네 길 인도하신다 너 낙심 말고 목적지 가라 엄동 후엔 난풍이요 고생 후엔 낙이라'
홍난파선생이 작곡하고 김인식선생이 작사한「울밑에선 봉선화」가 1919년 가을에 지어졌다. 우리는 이 노래에서도 3.1 운동의 얼을 읽을 수 있고 민족적 결의와 희망을 생생히 읽을 수 있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제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영혼에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이 얼마나 끈질긴 희망인가?

민족적 비전과 정열이 교회 안과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만큼 그 당시 뜨겁게 불타고 있던 곳이 없었다. 교회는 애국의 온실이었고 애족의 훈련장이었다. 그럼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는 것이 애국의 길인가를 생각해 보므로 제 말씀을 끝맺고자 한다.
3.1 정신에서 보여준 우리의 선배 신앙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살고 모세가 보여준 애국적인 삶을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가?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인가? 이 물음을 함께 물어 보았으면 한다.


첫째로, 자기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 삶에서 애국이 시작된다.

한국인의 뿌리를 모르고서는 한국인다운 삶을 살 수 없고 한국인의 얼과 긍지를 갖고 살 수 없는 것이다. 미국 ABC-TV로 헤일리의 Roots(뿌리)가 방영되자 미국 사회에 태풍과 같은 큰 돌풍이 일어났다.

이 프로가 방영된 후 3일만에 75만 부의 책이 팔렸고 8일 후에는 300만 부가 팔려 1936년이래 2천만 부를 돌파한「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기록을 깨뜨리고 말았다. 8회에 걸쳐 연 10억의 청취자를 동원시켰다. 왜 그렇게 그 작품이 미국 사회에 놀라운 선풍을 불러 일으켰는가? 한 마디로 자기들의 역사와 뿌리를 잃어버리고 살아온 흑인들에게 뿌리를 되찾게 한 까닭이었다. 역사를 배우고 연구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과거를 모르고서는 현재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고 현재를 모르고서는 미래를 또한 바로 살아갈 수 없는 까닭이다.

시인 롱페로우는「인생찬가」에서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는 믿지 말라. 흘러간 과거일랑 죽은 채 묻어두고 활동하게 활동해. 살아있는 현재를.' 이렇게 읊었다. 아주 아름다운 시이다. 그러나 사실은 과거 없는 현재가 없고 현재 없는 미래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를 배우고 연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에드워드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 보다 새롭고 창조적인 오늘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인으로서의 얼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려면 우리의 뿌리를 알아야 한다.


둘째로, 민족공동체의 유익과 발전을 위해 개인의 안일과 영화까지 포기할 수 있는 용기에 애국이 있는 것이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더 좋아했다"고 했다. 이러한 자기 한 사람의 출세와 성공을 생각하기보다는 민족공동체의 유익을 앞세울 수 있는 삶이 있는 곳에 애국이 있고 위대한 사회가 약속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가 일본에 합병된 이유가 다른 데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몇몇 부패한 정치인들의 사리사욕 때문에 주권을 빼앗기는 굴욕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3.1 정신에서 보여준 위대한 민족정신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민족 공동체를 위한 단결과 총화에 있었으며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용기와 희생정신에 있었다. 인간은 본래 타고 날 때부터 이기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를 버리고 민족과 겨레를 위해 산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도 모세나 에스더나 바울처럼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셋째로, 자기가 하는 일에 충성과 최선을 다할 때 그것이 곧 애국이 된다.

민족을 위해 내가 큰 일을 못한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다. 농부는 자기가 짓는 농사를 성실과 근면으로 씨를 뿌리고 가꾸며 열매를 거둬 드릴 때, 학생은 자기가 맡은 학업에 최선을 다해서 좋은 성적을 내고 훌륭한 연구를 할 때 그것이 곧 애국이 된다.

오래 전에 미국 유타 대학병원에서 세계 최초로 인공심장 이식수술을 해서 화제의 대상이 된 일이 있다. 그런데 그 인공심장의 특수 플라스틱 재료가 유타대학교의 한인 의료공학자 김성완교수에 의해서 개발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마 여러분도 읽었을 줄 안다. 그는 자기의 연구의 사명을 최선을 다해 하므로 한국인의 얼과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증언한 셈이다.
스포츠맨은 운동을 통해서, 음악인이나 예술인은 예술에 열중하고 최선을 다하므로 그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고 빛내며 애족할 수 있는 것이다.

독일의 유명한 설교학 교수 루돌프보렌이 그의 대작「설교학」한국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이 책이 하나님의 침묵을 깨뜨리고 한국민족의 발전을 위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로 그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런 말을 한다. '한 나라의 장래는 결국 그 땅에 있는 설교자의 성실성에 좌우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참된 신앙생활이 있는 곳에 애국이 있다.

오늘 읽은 본문 23-31절까지 보면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보통 아이가 아닌 것을 알았고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더 즐거워하였으며,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떠났으며,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고 믿음으로 저희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할 수 있었다고 기록해 주고 있다.
특별히 27절에 보면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했다"고 말했다. 그의 위대한 애국 애족의 원천이 바로 신앙에 있었다. 1620년 102명의 청교도들이 처음으로 북미에 도착한 풀리마우스에 가면 그들의 상륙을 기념하는 기념탑이 세워져있다. 높은 대 위에 네 사람이 서 있다. 네 사람은 법, 교육, 자유 그리고 도덕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위에는 한 여자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종교적 신앙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있는 곳에 법을 존중하고 교육을 귀히 여기며 자유를 사랑하고 도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복지사회가 건설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은 한 국가와 겨레의 초석인 것이다. 모세의 위대한 애국 애족의 행위도 3.1 정신에서 보여준 우리 선열들의 갸륵한 독립정신도 모두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우러나온 행위였다.

믿음이 있는 곳에 자기의 역사와 뿌리를 사랑하는 마음과 개인을 초월한 민족공동체를 의식하는 애국심과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곳에 민족지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통찰력과 어떤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비전과 용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 33편 12절에서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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