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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시 5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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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1-11)
나성 영락교회 박희민 목사


오늘 봉독한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하여 망명생활을 할 때 읊은 시로 알려지고 있다. 특별히 엔게디 굴속에 숨어 피신하고 있을 때 지어 부른 그의 신앙 고백적인 시이다. 말하자면 그의 인생 행로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캄캄한 밤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은 절규요 기도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어둡고 암담한 삶의 길목에서 헤어날 길이 없고 파멸 당할 것만 같은 그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환경과 상황의 포로가 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캄캄한 밤에 새벽을 깨우리라고 고백한 것이다. 한 번 우리가 조용히 생각해 보자.

지금 다윗은 엔게디 굴속에 조바심을 갖고 피신하고 있다. 그런데 사울 왕은 3천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엔게디 평지에 다윗이 숨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그를 잡으려고 추격해 오고 있다. 그러다가 사울 왕이 몇 부하를 데리고 엔게디 굴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 얼마나 아슬아슬한 순간이요 장면인가? 아마 이젠 죽었구나 하고 가슴을 조이고 불안과 공포에 떨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그의 손에 진땀이 흐르고 그의 등엔 식은땀과 함께 소름이 끼쳤을 것이다. 제가 어려서 만주에서 해방이 되어 북한을 거쳐 밤에 38선을 안내원을 따라 넘어오던 생각을 이 장면을 생각하면서 해 보았다. 정말 그 때 식은땀이 나고 오금이 떨려 걸을 수가 없었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안내원의 인도를 따라 임진강을 건너는데 뒤에서 총소리가 난다. 총알이 옆에 떨어진다. 그러나 저는 어려서 부모님의 손을 잡고 걷고 등에 업혀서 강을 건넜기 때문에 두려움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걸으면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다윗에게도 그 엔게디 굴속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사울 왕은 다윗이 거기에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하고 피곤을 풀기 위해 누웠다가 잠시 잠이 들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사울 왕이 다윗의 밥이 된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너무나 신비한 기적이었다. 다윗의 부하들은 이 기회야말로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다윗의 손에 붙이시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사울 왕을 처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함부로 손 댈 수 없다 하면서 부하들에게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겉옷자락의 일부를 잘랐다. 그러고도 다윗은 몹시 마음이 괴로워했다.

얼마 후 사울 왕은 그 굴에서 나와 자기의 길을 걸어갔다. 그 때 다윗이 그 굴에서 나와 저 멀찍이 가는 사울 왕을 향해 "내 주 왕이시여" 하고 소리쳤다.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어찌하여 들이심이니까 오늘날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실 것입니다.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기어이 해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왕의 옷자락을 보셔도 저의 본심을 아실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제야 사울 왕이 크게 감동이 되어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너의 목소리냐?" 소리를 높여 울면서 말하기를 "나는 너를 학대하였으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하나님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지만 네가 나를 죽이지 않았구나.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너에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너는 반드시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될 것을 내가 아노라" 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장면인가? 시편 57편은 바로 이러한 배경을 가진 다윗의 신앙 고백적인 시라는데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편 57편은 [알다스헷]이란 부제가 붙은 시인 것을 읽게 된다. 그 뜻은 히브리어로 [멸하지 말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다윗이 엔게디 굴속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지만 신하들에게 죽이지 못하게 한 것을 뜻한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그 보다는 하나님께서 다윗이 사울에게 파멸 당하고 죽임을 당하도록 버려 두시지 않으셨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지만 그러나 그의 생명만은 해치지 못하게 한 계시를 정하셨다. 다윗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왕으로 세우시기 위해 제사장 사무엘을 통해 선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셨다. 그리고 이사야 65장 8절에 보면 그 안에 인류를 위한 가장 큰 축복 곧 예수를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이 그 후손에게 있었기에 그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보장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또한 모든 믿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한계선이다. 비록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시험을 당하지만 사탄의 세력이 우리의 생명만은 멸망치 못하도록 한계선을 정해 두시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자들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지상의 축복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하며 사는 크리스천들은 비록 캄캄한 밤에 산다고 할지라도 새벽을 일깨울 수 있는 창조적인 사람들이다.
다윗은 노래한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현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그는 고백처럼 다윗 왕조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황금시대를 이루어 놓게 된다. 그리고 예수가 그의 후손으로 와서 역사의 새벽을 일깨우게 된다. 어둡고 캄캄한 인생의 밤에도 신세타령이나 다른 사람과 세상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고 외칠 수 있는 자의 삶을 결코 부끄러운 삶을 살 수 없고 후회하는 생각을 기록하지 않게 된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그 얼마나 멋있는 시적 묘사인가?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본문 말씀을 좀 더 깊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시편 57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1.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었다(1-3절).

다윗은 먼저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라"고 기도했다.

주석가 매류 헨리는 이 기도를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중에서 특별히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세리의 기도에 비유했다. 다윗은 이처럼 겸손히 하나님께 자기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했으며 무엇보다도 그 어렵고도 위태로운 삶의 위기에 참으로 자기 자신이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있고 도피처가 있다면 그곳은 오직 주님의 날개 아래이며 예수의 품 안 뿐인 것을 고백한 것이다.

옛날에 유대나라에선 [도피성]이란 것이 있었다. 성전이 바로 그 도피성이 된 것이다. 이 도피성에 들어가면 아무리 세상에서 무서운 죄를 범한 죄인이라도 세상 법이 그를 체포하거나 처벌하지 못했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사죄의 은총을 상징해 주는 그림자이기도 했다. 주님 안에 참 피난처가 있고 도우심의 손길이 있는 것이다. 주님께 피할 때 아무리 주홍 같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용서받고 상처 입은 심령마저도 치유를 받게 된다(처칠의 이야기).

여기서 부르짖었다는 말은 영어로 'cry to God' 하나님께 소리내며 울부짖은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환난 날에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부르짖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바로 알고 바로 깨닫는 것이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God who accomplishes all things for me)이다. 나의 소원과 문제. 나의 필요와 아픔을 다 이루시는 하나님이 신 것을 믿어야 한다.

특별히 나를 삼키려하고 비방하는 자들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오늘 우리 주위에는 우리를 삼키려고 위협하고 공격해 오는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각종 유혹과 환난이 에워싸여 있다. 하나님의 도움과 긍휼, 그의 지켜주심과 구원 없이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 때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인도해 주신다.


2.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은총을 노래했다(4-6절).

다윗이 당하는 고난은 참 억울했고 그가 처한 상황은 마치 사자 굴속에 든 자와 같았으며 불 가운데 처한 자와 같았다. 저희 이는 창과 살 같고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았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원수들이 그를 빠뜨리기 위해 파놓은 웅덩이와 올무에 그 원수들이 빠지고 넘어지게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유익하도록 역사하시는 그의 도우심의 손길을 경험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품안에서의 도피성을 경험하고 원수의 올무에서도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능력을 체험한 다윗은 이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고 있다(예화 김진경총장).

6절 말씀만 함께 읽어보겠다.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위대함과 신묘막측함을 노래하고 찬양하는 말씀이다. 전에 하만이 모르드개를 모함해서 처형하려고 만든 함정에 자기가 빠져 처벌을 받고 자기가 영광을 누리려고 왕께 요청한 그 영광을 모르드개가 누리게 되는 것을 보지 않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는 겸손하고 진실된 자를 축복하신다.

어떤 분이 글을 썼는데 이런 글을 썼다. 노무현 대통령이 5년 후 물러설 때 '성공한 대통령'이란 말을 듣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데 이 말 뒤에는 앞서 간 대통령은 모두 실패한 대통령으로 간주하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칫하면 오만이 된다는 것이다. 김영삼대통령은 유일한 '문민정부의 대통령'이란 말을 강조했고 김대중대통령은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말을 많이 하면서 너무 자신만만한 오만과 독선이 오히려 실패케 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공한 대통령'이란 말도 오만과 독선으로 이어진다면 엄청난 국가적 재난과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일리가 있는 말인 줄 안다.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설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은혜를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이 역경 가운데서도 전화위복의 축복을 더하신다.


3. 다윗의 결단(7-11절)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다윗은 무엇보다 이 마지막 부분에서 그 어둡고 캄캄한 인생의 밤과 역사의 밤에서도 이제 마음을 결단하고 확정하였다고 고백하면서 "내가 새벽을 일깨우리라"고 다짐한다. 사실 [새벽을 깨운다]는 표현은 과학적인 표현은 아니다. 과학적인 이론으로 말한다면 새벽은 우리가 깨운다고 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밤이 가면 자연히 새벽이 동터 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이 말하는 [새벽을 깨운다]는 말은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암담한 위기 속에서 그 어두움의 세력에 삼키운 바 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한 줄기 밝은 빛을 발하며 죄악에 깊이 잠든 영혼들과 시대를 일깨우겠다는 예언자적 선언이요 영적 각성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겨레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바로 이러한 고백과 결단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청되는 그러한 시점에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줄 안다. 몇 주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 교회가 30주년을 맞이하여 이 전보다 더 큰 영광이 함께 하는 내일을 만들어가고 우리 한인사회가 보다 빛나며 영광된 제2세기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각오와 결단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100년 전 미국사회는 형편없었다. 미국의 자동차수는 8천대, 미국의 포장 도로는 고작 144마일이 전부였으며, 대부분 도시에서 시속 10마일이 최고 제한 속도였다. 그 당시 라스베가스의 인구는 30명이 전부였다. 미국의 신생아의 95%가 집에서 태어났다. 미국인구의 6%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평균 수명은 47세였다. 여자들이 한 달에 한번 정도 머리를 감았다. 1871년에 나성에서 중국인 20명이 백인 폭도들에게 맞아죽거나 목매달아 죽이는 린치를 당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너무 더럽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자기들도 한 달에 한번 머리를 감는 주제에 말이다.

그런데 지난 100년 동안 엄청나게 변화되고 발전했다. 앞으로 100년 후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 한인사회가 100년 후에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는가? 아니 우리 교회의 미래를 생각해 보셨는가?
꼭 같이 100년 전에 출발한 많은 유럽의 이민자들이 100년 후에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고 있다. 이태리. 폴란드, 독일, 영국, 아이리스 등 많은 이민자들 중에 제일 학력도 낮고 머리도 나빠서 군대도 입대 못하고 학교에도 못 가서 작은 구멍가게로 시작한 민족이 유대인 이민자들이다. 그런데 지난 100년간 그들은 시나고그를 중심으로 믿음생활하며 공동체를 이루어 상호협력하며 자녀교육에 힘쓰고 인재를 키우므로 가장 성공하고 영향력을 미치는 이민자가 되었다. 정치계에서는 차기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나오는 리부만씨를 위시해서 교육계, 경제계에는 Chase Manhatan, Bank of America, 의학계(마운트 시나이 병원 등), 영화계, 예술계, 신문 방송 등을 주름잡고 있다.

우리가 캄캄한 세대의 밤에 새벽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의 잠든 영혼을 깨워야 한다. 어떤 이가 그런 말을 했다. 어떻게 낮과 밤을 구별하는가? 저쪽에서 사람이 걸어오는데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할 수 있으면 낮이고 없으면 밤이며, 저편에 있는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구별되면 낮이고, 안 되면 밤이며, 저쪽에서 걸어오는 짐승이 소인지 말인지 구별되면 낮이고, 안 되면 밤이라고 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한 선비가 그게 아니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원수인지 친구인지 구별되면 낮이고, 안 되면 밤이며,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구별되면 낮이고, 안 되면 밤이라고 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떠한가? 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밤이 아닌가?
이 캄캄한 밤을 깨우기 위해 먼저 나 자신부터 영적 잠을 깨어야 한다. 깊은 영적 잠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다윗도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외치기 전에 먼저 "내 영광아 깰지어다"라고 외쳤다. NIV 영어 성경번역엔 "Awake my Soul" "내 영혼아 깰지어다"로 번역했다. 우리가 이 어두운 세대의 밤을 일깨우기 위해선 먼저 내 영혼이 깊은 죄의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중세기를 흔히 암흑시대라고 부른다. 중세기는 그 시대를 밝혀줄 종교마저 부패하고 깊이 잠들어 있는 시대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무지와 어두움으로 몰아간 비극의 시대였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어두운 밤에도 깊은 잠에서 깨어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에 의해 새로운 광명의 새벽이 동터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깨어 일어나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해야 하겠다. 우리가 우리 사회의 어두움을 깨우치고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광명의 새 아침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먼저 깨어나야 한다.

내가 잠들어 있으면서 새벽을 깨우겠다는 것은 잠꼬대이다.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망상이다. 그러한 망상이 있는 곳에 끊임없는 혼란과 비극이 연속될 뿐이다. 새로운 사회 혁명의 새벽은 한 영혼이 깊은 잠에서 깨어날 때 시작된다. 그 때 철통같은 사회 구조악도 무너지고 특별히 다윗처럼 사울을 죽이고 자기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마저 포기할 수 있는 그러한 용기와 큰 마음에서 어두운 역사의 밤은 지나가고 새로운 광명의 새벽이 밝아 오는 것이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다 영리하고 똑똑한데 마음만은 좀 비좁다는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중국 사람들은 역시 대륙성 기질이 있어서 우리보다 마음이 큰 데가 있다.

역사의 새벽은 다윗처럼 확정된 마음의 사람들에 의해 동트게 된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읊었다. 여기서 다윗이 고백한 확정된 마음은 자기 자신의 영광이나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이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치겠다는 그러한 확신과 신념을 말하는 것이다.

적은 이해 관계에 눈이 어두워 친구를 배반하고 중상모략하며 권력과 돈 앞에 맥을 쓰지 못하고 신의와 양심을 헌신짝처럼 팔아먹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의 새벽은 동트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져도 끄떡하지 않고 내일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의 사명을 성실히 수행해가며 나의 생명까지 정의와 진리를 위해 버리고 헌신할 수 있는 그러한 확고부동한 신념의 사람들에 의해 새 역사의 장은 언제나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명백히 기억해야 할 것은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확정된 마음은 자기 자신의 확신과 신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자기를 위해 지금까지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주어지는 확신과 신념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도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지 않았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 고백은 자기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이나 교만과는 180도로 다른 자세인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이 나의 재간이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요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의 축복이며 또 앞으로 나를 위해 예비해 주시리라는 [여호와이레]의 믿음에 근거한 확신과 신념인 것이다. 역사의 새벽은 바로 이러한 신앙의 사람들에 의해 싹트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능력과 힘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요 그의 말씀의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 속에 믿음이 들어 갈 때 우리의 얼굴이 변하고 생활이 바뀌게 된다. 믿음은 생명의 핵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은 목에 걸고 다니는 장식품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을 건 모험이요 Commitment이다. 옛날 로마에 원형극장 콜로세움이 처음 세워졌을 때 일이다. 황제는 원형극장을 건설하도록 건축가에게 명령한 후 일이 다 완성되면 그의 머리에 영광의 화관을 씌워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그곳에 굶주린 사자를 풀어놓아 기독교인들을 뜯어먹게 했다. 바로 그 잔인한 축제로 그 건축가를 축하했다. 그 때 그 건축가는 일어나 소리치기를 '나도 기독교인'이라고 외쳤다. 그 때 사람들은 그를 맹수 가운데 집어 던졌다. 그러나 그는 담대하게 순교하므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신호범장로의 간증을 소개하고 제 말을 끝내려고 한다. 이 분은 한국에서 4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힘드니까 그를 갖다버렸다. 그래서 그는 거지생활을 시작했는데 6.25때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가 되어 일하는 중에 미군장교의 도움으로 18살 때 미국에 입양되어 들어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녀보지도 못하고 독학으로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쳐서 대학에 갈 뿐 아니라 석사, 박사공부를 마치고 교수 생활을 하다가 워싱턴주 상원의원으로 두 번째 당선되어 봉사하고 있다. 그는 한국에 가서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찾아 용납하고 새어머니와 배다른 동생들까지 모두 미국으로 초청해 왔다. 얼마나 감동적인가? 그는 그 어려움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고 좋은 코리안 아메리칸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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