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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믿음 / 히 1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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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
히브리서 11:8-10
설교자 : 김형준 (동안교회)
 


결혼주례를 할 때면 저는 주례 중에 의례히 신랑 신부에게 질문하곤 합니다. 여러 질문 중에서도 특히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머뭇거리며 잘 대답하지 못합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대답으로 ‘서로 이해하고 믿어주고 아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결혼식에서 한 형제의 대답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형제님 사랑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형제가 옆에 있는 신부를 가리키면서 ‘여기 이 사람이 사랑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게는 아주 기억에 남는 사랑의 정의였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의 정의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제가 오늘 여러분께 믿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믿음의 정의를 내림에 있어 몇 개의 단어를 나열하는 것보다 아브라함을 소개한다면 더욱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믿음은 이런 것이다’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설명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지난주까지 함께 말씀을 나눈 아벨과 에녹 그리고 노아의 삶이 믿음에 대해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면, 아브라함은 이 단편들을 모두 묶어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신약성경에서는 무려 일흔네 번에 걸쳐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셨던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첫째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말 중에서도 우리를 움직이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말은 즉시 움직이게 만듭니다. 반대로 어떤 말은 미루었다가 차후에 하게 합니다. 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쳐 움직이게도 하고, 반대로 어떤 말은 한번 하고 나면 그만두고 싶습니다. 어떤 말은 자발적이고 즐겁게 움직이도록 하는가 하면 억지로 하는 수 없이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전혀 움직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은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순종하여’라고 번역한 ‘휘페쿠센’이라는 단어는 ‘휘파쿠오’의 부정과거입니다. ‘휘파쿠오’는 ‘아래에서’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포’와 ‘듣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쿠오’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의 아래에서 듣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모습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특히 이 동사는 부정과거 능동태로 쓰였는데, 능동태는 자발성을 부정과거는 단호함을 나타냅니다. 즉 아브라함의 순종은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이며 조금도 주저함 없이 취해진 단호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그의 순종이 즉각적인 것이었음을 현재분사 ‘칼루메노스’의 부정과거동사 ‘휘파쿠센’의 관계를 살펴보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헬라어에서 부정과거동사와 현재분사가 함께 쓰일 경우 ‘-하자마자 -했다’, 또는 ‘-할 바로 그때에 -했다’ 는 즉각성의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바로 그 순간 조금도 주저함 없이 능동적으로 또한 즉각적으로 순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관념적이거나 사유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있는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고 이 세상에서 들어야 할 유일한 말씀으로 믿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믿음과 순종은 직결되고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우리가 주를 믿는 동시에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장 5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서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믿음과 순종은 같음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16장 26절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믿음과 순종은 성경이 가장 강조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믿음은 어떻습니까? 혹시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 마음속에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부담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 몇 번이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헌금할 때 가장 많은 시간 생각한다고 합니다. ‘얼마를 해야 할까?’ 생각 속에서 헌금을 더했다가 뺐다가 또 다시 집어넣었다가 결국 ‘에라, 하자!’ 는 마음으로 헌금한다고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듣는 많은 말이 있습니다. 육체의 말, 경험의 말, 욕망의 말, 권위의 말 등. 그러나 믿음은 그 많은 말 중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숨겨진 의도를 신뢰하는 믿음이었습니다. 8절을 다시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합니다. ‘갈 바를’ 이라고 번역된 ‘푸 에르케타이’는 의문문으로서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라는 뜻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좇아가면서도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에게는 어디로 무엇을 위해 가는지 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됨이 없으며 인생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으시고 약속하신 바를 분명히 이루실 분임을 믿고 동행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즉 비록 지금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에는 분명히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숨겨졌으나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나를 위한 의도가 분명히 있음을 확신했기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를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계십니다. ‘네 본토를 떠나라!’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고대문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 즉, 수메르라고 하는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도시 연맹의 일부였습니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입니다. 이곳에서는 상업과 무역, 농업 등이 삶의 기반을 이루었고, 이방 종교의 세계관이 번성하여 그 세계관이 곧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결정하였습니다. 이 시대 사고방식은 ‘운명론’이었습니다. 스스로 운명을 바꾼다든지 혹은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떠난다는 의미의 단어나 개념이 아예 없었다고 합니다. 고든 맥도날드는 아브라함의 떠남은 마치 우주 왕복선이 지구의 중력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밀어내는 힘찬 로켓의 분사력 같은 것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네 족속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에는 개인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 가운데 있어야만 삶의 방향을 갖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은 사회의 안전망과도 같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지칠 때 가족은 매우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합니다. 종합해볼 때 떠나라고 하는 말은 아브라함의 삶에서 문화의 음성,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음성, 전통의 음성 등 안전을 보장해주는 음성을 뛰어넘으라는 명령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도 아브라함이 순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게 보장된 것도 약속된 것도 없이 어쩌면 죽음과 같은 결단을 하고 떠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자신을 통해서 펼치실 하나님의 선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결단하고 떠났다 해서 하나님께 해야 할 순종을 다 채운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길에서 위기와 어려움을 수없이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희망을 얻고, 다시 시작하며, 힘을 얻을 수 있음은 ‘무슨 뜻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를 믿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사업이 부도가 납니다. 자녀가 고통스러운 일을 겪습니다. 건강에 위기를 맞기도 합니다. 때로는 감당하지 못할 일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때 희망은 사라지며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길을 걷기가 어려워집니다. 어렵다 힘들다 느낄 때 다시 시작하고 계속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와 뜻이 있음을 막연하지만 신뢰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결혼 후에 저는 첫 아이와 아버지를 동시에 잃었습니다. 정말 앞이 캄캄했습니다. 어떻게 목사의 가정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제게는 미래를 헤쳐 나갈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혼자 습관처럼 되뇌었던 말은 ‘무엇인가 뜻이 있겠지!’ 이었습니다.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허락하셨을 때는 무엇인가 계획이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10년이 지난 후, 어느 날 갑자기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네가 당한 일의 의미를 알겠느냐?’ ‘아니요!’ 너무나 긴 시간 동안 잊었던 문제를 하나님께서 물어 오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두 생명을 잃어버리고도 깨닫지 못하느냐?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생명이라는 것을......’ 여러분 생명을 잃어버리는 아픔과 그 빈자리,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의 순간을 통해서 얻은 것은 바로 한 영혼의 귀중함이었고 그 교훈을 얻지 못했다면 지금의 이 순간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려움과 이해하지 못할 고통과 아픔이 올 때 이렇게 외치십시오. ‘무슨 뜻이 있겠지!’ 바로 숨겨진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믿을 때에 우리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세 번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말씀합니다. ‘터가 있는’ 으로 번역된 ‘투스 테멜리우스 에쿠산’을 직역하면 ‘기초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성을 영어로 말할 때 ‘그’ 도시(‘the’ city)라고 정관사가 따라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기초를 놓으시고 우리가 가야할 바로 ‘그’ 성 즉, 천국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초점은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초점은 그의 삶의 자세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장막에 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머물 때에 장막에 거했습니다.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살다’라는 말은 ‘잠시 체류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은이나 금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거해야 할 곳이 어딘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며 교류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만 교제하며 살았습니다. 장막은 고대사회에서 유목민들이 주로 사용하던 이동식 거처입니다. 이러한 장막은 나뭇가지나 막대기를 세우고 측면을 지푸라기나 가죽으로 막아 쉽게 해체가 가능한 임시로 머무는 집입니다.

그의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우리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우리의 성공여부가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정말 슬퍼해야합니다. 그러나 삶의 초점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있다면 성공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며 겸손하게 그 나라를 위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것입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닥쳤을 때도 영원한 나라에 소망이 있기에 낙심하지 않고 지금 현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며 힘든 일을 이겨나갈 것입니다.

얼마 전에 튤립 수영복 회사에서 주식회사 예인으로 바꾼 수영복 회사에 갔었습니다. 전에도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제가 미국에서 목회하다가 빚진 돈 6000불을 하나님께 갚아달라고 기도하는 곤고할 때, 도움의 손길을 주셨던 박의배 장로님이 운영하는 회사입니다. 이번에 사옥을 증축하고 회사 이름도 바꾸는 기념으로 축하 행사에 참석했었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회사에 근무했던 이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박 장로님은 홀홀 단신 월남하셔서 자수성가 하신 분이십니다. 제가 근무할 때인 86년에는 300-400명 정도의 직원을 거느린 큰 회사였습니다. 회사 내 교회도 있고 부흥회도 전 직원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장로님으로부터 배운 많은 것 중에서도 자신이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태도는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분이 특히 강조하신 말씀이 정성이 빠진 제품과 일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나온 후 회사가 노사분규를 겪으면서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IMF를 겪으면서 거의 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그 많던 직원이 9명만 남고 빚도 지고 더 이상 회생 능력이 없어보였습니다. 그제야 알았지만 미국으로 제게 돈을 보내 주실 때가 정말 어려울 때였다고 합니다. 장로님은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가정의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 회사는 작고 시시해서 못 다니겠다고 무시했던 2남 1녀의 자녀들이 회사를 위해 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한 명의 직원과 같이 함께 물건을 지고 나르며 거래처를 뛰어다니는 등 최선을 다하더랍니다. 조금 회생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몇 년 사이, 작년에는 드디어 88억의 매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옥도 다시 짓게 되었습니다.

삼남매의 신앙적인 자세도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박 장로님께서 스스로 무언가 해보겠다고 할 때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바닥까지 낮추시더니, 포기하고 주님의 음성 앞에 순종함으로 그 뜻에 맡기니 직접 역사하시기 시작하셨다고 고백하십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미루지 않습니다. 단호하며 끝까지 순종합니다. 그리고 숨겨진 하나님의 의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원히 머물 곳은 이 땅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나라임을 기억하고 땅에서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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