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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 / 살전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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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
본 문 살전 2:7-9
설교자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이번 대구지하철 참사로 인한 희생자 유골 수습 작업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면서 전체 사망자 수에 대한 윤곽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국립과학 수사연구소와 경북대 법의학팀의 유골 발굴 작업 결과 전동차 내의 유골은 142구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공식 사망자로 분류된 54명을 포함하면 이번 참사 희생자는 196명으로 늘었습니다. 여기에다 현재 수습중인 전동차 객차에서 일부 유골이 추가될 것으로 보여서 총 사망자 수는 200여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온 국민들이 이들 200여명의 사망자의 안타까운 희생에 큰 애도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비롯한 전국 교회도 추모의 안타까운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주 기도하기 위해서 기도원을 다녀왔는데 대구에서 오신 목사님 한 분을 만나서 담소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대구 참사 희생자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 크게 회개 기도를 드리고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0여명 중에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에 대한 큰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고로 희생된 그 자체에도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예수 믿지 않고 죽은 그 영혼들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구의 교인들이, 목사들이 저들을 구원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정말 하나님 앞에 크게 회개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셨습니다.

정말 듣고 보니 목사가 가져야 할 당연한 마음이었습니다. 교인들이 마땅히 품어야 할 당연한 마음이었습니다.
전도는 마음에서 시작이 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불신자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불붙는 마음 여기에서 전도는 시작이 됩니다.

전도는 은사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전도는 은사 받은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치부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전도하지 않는 것은 전도의 은사가 없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댑니다. 스스로 합리화하고 위로를 받습니다. 물론 전도 열매의 과다는 은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명입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은사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신자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불붙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

우리가 전도할 마음을 갖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가장 바라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 마음 속에 전도할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눅 15:11-32에 소위 '탕자의 비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돌아오라'는 소원

눅 15:2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탕자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간신히 저 멀리 겨우 집이 보일 정도의 거리까지 왔습니다. 면목도 없고,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발걸음이 초라하고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 눈에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멀리서도 그 늘어진 어깨, 형편없는 몰골을 보고 불쌍한 마음에 목이 매입니다. 더 이상 거기서 그렇게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 숨에 달려가 그 품에 그 자식을 안았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울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매일처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눅15:22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깨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한 마디로 큰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크게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원했는데 지금 그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아버지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그 영혼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 구원받기를 정말 간절히 소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는 이것보다 더 절절한 소원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눅 4:43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아버지의 소원을 아시고 그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주님의 뒤를 이어 베드로도 이런 하나님의 소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벧후 3:9을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위해 오래 참고 계시다는 사실을 베드로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딤전 2:4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런 간절한 소원을 잘 압니다. 우리 주변에 아직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들 중에 있습니다. 친구들 중에 있습니다. 이웃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직장 동료들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탕자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저들을 지금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애타는 하나님의 심정, 주님의 간절한 소원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데려오라'는 소원

눅 15:25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지금 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맏아들이 전혀 몰랐습니다. 맏아들이 자기와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는 집안 일에 당황했습니다. 가만히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화가 납니다. 동생은 자기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갔고, 거기서 방탕하게 다 써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야단을 치고 책임을 물어도 시원치 않을 텐데 그 녀석이 뭐를 잘했다고 잔치를 벌이고 저렇게 즐거워하시는가?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도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집안 일을 해왔는데 이런 나를 위해서는 한 번도 잔치를 열어준 일이 없으시지 않는가? 생각할수록 화가 났습니다.

일견 그의 말이 타당해 보입니다. 인간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는 당연히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늘 집 나간 자기 동생 생각뿐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자기가 잘 알았습니다. 틈만 나면 동구 밖을 내다보며 이제나저제나 동생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계시는 것을 하루 이틀 보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주 자기에게 동생의 안부를 물었을 것입니다.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동생을 찾아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동생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과 무관한 삶을 살았습니다. 게다가 자기를 향한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았습니다. 그 소원이 바로 동생을 데려오라는 소원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소원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6:15을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제자들이 맏아들처럼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드리는 일에 실패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바울도 이런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전 9:16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을 알았기에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내게 크게 화를 내실 것임을 그가 절실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어머니처럼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 자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내게 맡기신 한 영혼을 사랑해야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다 주듯이 전도 대상자를 위해 다 줄 수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10달 동안 불편한 몸으로 지내다가 정말 감당키 힘든 해산의 고통으로 아이를 출산합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면서 '네가 나를 이렇게 고생시켰구나 너는 나의 원수다 너만 없었다면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텐데'라고 말하는 엄마가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갖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저들이 구원받기를 정말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믿는 우리가 가서 죽어 가는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해 데려오기를 정말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소원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소원

빌 2:13은 우리가 가슴에 새기지 않으면 안 될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간절한 소원을 우리에게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소원이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되어 우리로 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원을 우리의 소원 삼고 사역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정말 하나님의 소원처럼 그 마음의 소원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그들을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 저들을 주 앞으로 데려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을 내 소원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그들을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민족이 어려서부터 불러왔던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그런데 오늘 젊은이들은 이 노래를 부르긴 불러도 통일이 정말 그들의 소원이 아닙니다. 머리로는 통일이 소원이라고 말하지만 가슴에는 통일이 소원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서 전도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로 알뿐입니다. 정말 절실하게 그 마음에 간절한 소원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정말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지난 20일부터 25일까지 금강산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실현됐습니다. 육로로 금강산에 가서 꿈에도 그리던 이산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짧은 2박 3일간의 만남을 마치면서 또 다시 작별을 하면서 저들은 통곡의 울부짖음으로 외쳤습니다. "아버지 부디 오래 사셔야 돼요... 형님 통일돼서 다시 만납시다..."

아마도 이들처럼 남북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요? 이들처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을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우리가 그렇습니다. 정말 한 영혼이 구원받고 주께로 나오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최우선적인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목회하던 리차드 백스터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전도할 때 마치 막 숨을 거두려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애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를 일상 대화하듯이 태연스럽게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아직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돌아와서 태연스럽게 잘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 백스터 목사님이야말로 주님의 소원을 자신의 소원으로 삼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고 계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 소원 안에 주님의 소원이 담겨져 있습니까? 그저 돈 많이 벌고, 출세하고, 자식들 잘 살고, 평안하게 교회생활하고, 이 땅에서 천수를 누리다가 아무런 고통 없이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 이것이 우리의 소원입니까?

오래 전에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보았습니다. 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점령한 폴란드의 어느 마을. 시류에 맞춰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 쉰들러는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게 됩니다. 그는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찌 당원이 되고 독일군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냉혹한 기회주의자였던 쉰들러는 유태인 회계사인 스턴과 친분을 맺으면서 냉혹한 유태인 학살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게될 유태인들을 구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독일군 장교에게 빼내는 사람 숫자대로 뇌물을 주는 방법으로 유태인들을 구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스턴과 함께 구해낼 유태인들의 명단,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1100명의 유태인을 구해내게 됩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이 구해내지 못한 유태인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내게 돈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한 사람은 더 구할 수 있었을텐데...

쉰들러는 자기 개인의 삶에 몰두하다가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 전 재산을 바쳐가며 유대인 하나라도 더 구하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래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에 몰두했다면 이제 우리 양심에 들려오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깨닫고 그 소원을 내 소원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몸부림을 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금년에도 우리 교회는 태신자 전도 운동을 시작합니다. 먼저 한 달 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소원이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통해 누구를 주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쉰들러 리스트처럼 나의 리스트를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먼저 한 영혼을 리스트에 담아 보자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을 깨닫게 하옵소서.

내 안에 간절한 소원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태신자를 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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