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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교양과 훈계 / 엡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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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준식 목사 (신림교회)
  에베소서 6:4 주의 교양과 훈계


저는 설교 준비하면서 예화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은 제가 사용하는 예화는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은 제가 이미 사용했던 예화를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오늘 본문의 말씀이 해석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집에 딸이 성장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때가 되어서 아이를 갖게 되었고 또 아이를 낳았습니다. 힘들게 아이를 낳았지만 순산했습니다. 그리고 양가 어머니들이 모두 오셔서 축복해주고 격려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품에 안은 이 자매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근심이고 슬픔이었습니다. 그리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친정 어머니가 우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딸의 대답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 아이가 장애자이니 어쩜 좋아요. 놀란 어머니들이 아이의 몸을 관찰해 보았습니다. 아이는 어디하나 장애 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딸은 계속 장애라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왜 엄마가 된 이 자매는 장애가 아닌 아이를 보고 장애라고 하였을까요? 자기가 난 아이의 입에 이빨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게 울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는 태어날 때 이빨이 없습니다. 만약 태어나면서부터 아이의 입에 이빨이 있다면 엄마의 젖을 빨 때 깨물어 버릴 것입니다. 이빨이 없기에 엄마의 젖을 빠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아이의 잇몸에서는 이빨이 나옵니다. 아이는 태어날 때 이빨이 없이 태어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빨이 나올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인간을 어떤 존재라고 말합니까? 이빨 없이 태어난 아이를 보고 이빨이 없다고 흐느끼는 엄마의 시각으로 인간을 보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아름답게 보이고 선하게 보여도 그 속에는 물고 뜯을 수 있는 이빨을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부터 성경은 출발합니다. 인간은 죄인이다 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게 성경적인 인간론입니다.

이런 죄인의 출발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부모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나를 낳아주고 나를 키워주셨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받은 권위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아버지이시고 어머니라면 여러분의 그 자리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리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자리는 성스러운 자리요 그 자리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이런 부르심으로 성스러운 권위를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 부모들이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권위를 행사할 때 부모 마음대로 행사할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절제하며 부모의 권위를 행사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양육할 때 억압으로 대할 것이냐 자유 방임으로 놔둘 것이냐 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내 마음대로 행사하는 경우입니다. 당시 로마인의 아버지는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가 자식을 노예로 팔아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사슬에 묶어서 자기 농장에서 소처럼 일하도록 명령 할 수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로마의 분위기만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아버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절제하지 못한 권위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딸로 태어났다 는 이유로 아버지는 학교에 가지 못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래서 딸들은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저의 아버지와 결혼 할 때 얼굴도 모른 채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단 한번 아버지 얼굴보고 결혼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을 말하려고 하면 밤새 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부모의 권위를 자제하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사용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정 반대의 상황으로 변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의 개성을 살려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떠들어도 부모는 그냥 놔두고 있습니다. 영국 교회에서 본 광경입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를 나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어린 아이를 안고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모두 다 베이비 키퍼에게 넘겨줍니다. 우리나라처럼 자모실이 없습니다. 아이들을 돌보는 사역자들에게 넘기고 부모님들은 예배에 전념합니다. 전 개인적으로 생각하기를 자모실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과연 예배가 될까 의문스럽습니다. 예배시간에 아이와 눈마주치면서 까꿍 까꿍하는 것은 예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국의 아이들은 목사님의 설교가 마치면 교회 문을 열고 젖먹이부터 주일학교 아이들이 우루루 예배당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 때 예배당이 난장판처럼 시끌 법적 합니다. 한번은 흑인 목사님 가정이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 집에 딸아이가 전혀 통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교회 리더들이 부모에게 나가 달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새 자녀들을 꾸짖거나 강압해서는 안 된다 는 생각이 우리 머리 속에 자리잡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벌을 주어서는 안되고 아이가 나쁜 짓을 하면 부모가 대신 아이 보는 앞에서 벌을 받는 것을 보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아이는 그것을 보고 나쁜 행실을 그만 두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훈을 최초로 발표한 사람이 우리가 잘 아는 몬테소리 박사의 몬테소리 교육입니다. 이런 생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면서 학교에서 체벌이 없어 졌습니다. 가정에서도 체벌이 없어 졌습니다. 아이들은 방치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은 허약해 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들에게는 너무나 큰 문제로 보이고 이것을 이길 힘이 없어서 초등학생이 자살하는 지경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극단적인 강압과 극단적인 방임은 어느 것 하나도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양극단은 우리에게 주신 자녀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양육의 태도는 자녀가 나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부모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기울이는 배려가 애완 동물이나 화초를 기르는데 신경 쓰는 것만큼 만 되더라도 현대 가정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이 성경적인 양육입니까?--4절

오늘 본문은 큰 바운더리를 정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부정적인 영역을 말씀하시고 이어서 긍정적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부정적인 영역입니다. 그것은 부모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분노가 쌓여지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부모가 자녀로부터 받은 상처보다 우리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더 많습니다. 왜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토막내어서 버리는 것일까요? 그 안에 분노가 쌓였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훈육한다는 이유로 아이의 마음 속에 분노를 심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술 마시고 아이들을 때리는 분이 우리 가운데 없습니까? 그것은 아이의 마음에 분노를 심어놓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영역인 주님의 교양과 훈계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이 5장18절에서부터 진행되어온 말씀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술 취하면 절제할 수가 없습니다. 술 취하면 쉽게 화를 낼 수가 있습니다. 술 취하면 과격해 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기억에 옆 집 아저씨는 술만 마시고 돌아오는 날이면 잠자는 아이들을 발로 차고 때리는 것을 자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이들의 마음 속에 분노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부모는 인내와 절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사건건 트집잡고 혼내지 않습니다. 인내라고 절제 속에서 아이들을 훈육합니다. 그러나 머리카락 하나 떨어진 것을 보지 못하는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늘 불안함 속에 살아갑니다. 누워서 자려고 하면 형광등이 떨어질 것 같은 강박감에 사로잡힙니다. 자녀가 최선을 다해서 무슨 일을 해도 못했다고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성령 충만한 부모는 자녀를 내 중심으로 양육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내가 하지 못한 것을 자녀에게 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까? 내가 공부를 많이 못했으니 너라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내가 의사가 되려고 했는데 못했으니 너는 의대를 가야한다 거나 내가 법관이 되려고 했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했으니 너는 반드시 법대에 가서 법관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

성령 충만한 부모는 열매를 내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부모는 그 열매를 나누어주고 싶어합니다. 내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에는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어린 아이 취급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도 지금 성장하고 있습니다. 키도 크고 있고 지혜도 크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내 손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든 자식에게 너가 무엇을 안다고 그래 라고 면박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식으로 자녀들을 대하는 것은 자녀들의 마음에 분노를 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 여러분! 술 취한 마음으로 자녀들을 훈육하지 마십시오. 성령충만한 모습으로 성령의 열매로 자녀들을 훈육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충만한 양육은 자유 방임이 아닙니다. 강압적인 양육도 아닙니다. 성령충만한 교육방식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교양으로 양육하고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사람은 그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사생아는 때리지 않으나 자기 자식은 때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훈육은 필요 없다 고 성경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무분별한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훈육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훈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를 징계 할 줄 아는 부모가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의 본성에는 이빨이 나오려고 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은 때가 되면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마다 부모는 자식들의 욕망을 무제한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분명한 경계선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가두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무분별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가르치다가 안 들으면 매를 들어서라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이 아이가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여기에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끼는 부모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부모는 율법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담당한 기능이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기능을 몽학 선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몽학 선생이라는 말은 로마시대에 부유층 자녀 집에 있는 가정교사였습니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아침에 주인 집 아들을 데리고 학교 앞까지 데려다 주는 일이었습니다. 아이가 학교로 가지 않고 게임 방에 가려고 하면 타일러서 학교까지 데려다 주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도록 보호하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사람이 몽학 선생입니다. 그런데 몽학 선생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몽학 선생은 주인집의 아들을 때릴 권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몽학 선생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는 몽학선생이 주인집의 아들을 학교 교문 앞까지 데리고 오면 이 몽학선생은 학교 선생님에게 반드시 넘겨주어야 합니다. 몽학 선생은 절대로 교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몽학 선생의 역할은 학교 선생님에게 주인의 자녀들 전달하는 것으로 그 임무가 끝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의 역할은 바로 여기까지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부모 곁을 떠날 때까지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양육하고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몽학 선생은 주인의 아들을 학교 문 앞에서 학교 선생님에게 넘겨주듯이 부모는 내 아들이 내 딸이 배우자를 만났을 때 기꺼이 넘겨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 합하여 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부모들이 해야할 역할을 어디까지인지 아셨습니까? 우리는 우리아이들을 평생 끌어안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청소년기가 되면서부터 이미 부모의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아이들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 나이가 되면 떠날 준비를 서서히 해야만합니다. 때문에 이제 청소년이 되면서부터는 우리 아이들을 잘 지도해 주는 멘토가 필요합니다. 부모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말 할 수 있는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알려 주셔야 합니다. 우리 곁을 떠나 영원하신 신랑 예수님에게로 가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이런 축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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