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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께 용서받고 사랑받는 길! /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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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님께 용서받고 사랑받는 길!  (성완석 목사)
본문 : 마태복음 18장 21~35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장 21~35절


  사람이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기도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알게 모르게 안 되면 함께 죽자는 심리가 깊게 깔려 있습니다. 특히 상처받고 응어리진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지배합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고 해결받지 못하는 상처의 결과가 참으로 무서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을 봅니다. 이번 대구 참사는 눈물겨운 사연이 많았는데, 왜 불을 질렀느냐는 말에 범인의 대답은 "혼자 죽기 싫어서" 한 사람의 잘못된 생각이 많은 생명을 죽게 하고 많은 가정들을 무너지게 한 것입니다. 누적된 상처들, 쌓이고 쌓인 한과 응어리가 자신의 인생도 망가지게 하고,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한 것입니다. 마음속의 상처나 응어리는 오래도록 묻어 둘수록 자꾸자꾸 더해지고 강해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망가지게 하고 함께 있는 사람을 불행하게 합니다.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자라기 전에, 너무 크기 전에, 마음에 상처나 응어리가 남아있어 용서하지 못하면 피차 불행해 집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같이 망해 가는 거예요.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변화는 한 순간에 저절로 오지 않아요. 


  당시 랍비들은 두 번까지는 용서하되 세 번은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고 가르치기도 했고,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치기도 했는데,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 용서할까요? 이렇게 물어 본 것은 대단히 큰마음으로 칭찬 받을만한 질문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이 문제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 살아라!" 이 말씀은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비유를 주신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빚을 진 사람이 그 큰 빚을 탕감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한 달란트가 얼마나 되느냐? 6천 데나리온에 해당되는 것이었는데, 한 데나리온은 당시 일군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나간 그 사람이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한 사람에게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참아달라고 사정했는데 안 들어주었다는 거예요. 이 사실을 안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한 말이 바로 32절부터 34절입니다. 같이 봉독합니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그러면서 주시는 교훈이 35절인데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문제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알면서도 용서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좋은 것 알고, 믿는 자는 당연히 용서해야 하는 것인 줄은 압니다. 그러나 용서가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그것이 그대로 있지 아니하고 응어리로 남고, 그 응어리는 점점 커 가더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처들이 쌓이고, 미움과 분노가 쌓이면 그것들은 서로 얽혀서 점점 자라나고 커가서 나중에는 큰 나무가 되어버려 더 이상 감당 못할 괴로움을 주게 되고, 비뚤어진 인생을 살게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상처나 괴로움, 좌절과 열등감은 크기 전에 잡아 버려야 합니다. 


  한 자매가 암으로 가망 없다는 선고를 받고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죽는 것보다 더욱 더 괴롭고 두려움을 주는 것이 있었는데, 그녀가 어렸을 적에 양아버지에 의해서 성적학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양아버지에 대한 경멸과 증오를 가지고 평생을 크게 한 번 울어 보지도 웃어 보지도 못하고 억 눌린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씀 앞에 마음의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쓴 뿌리가 녹아집니다. 생각하기도 싫고 기억조차 하기 싫은 양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의 감정들을 하나님께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양아버지를 용서합니다" 고백하게 됩니다. 수많은 날들을 증오하던 양아버지를 용서하는 그 순간부터 실로 35년 간 울어보지 못했던 그녀는 통곡하기 시작합니다. 무너진 댐처럼 한없이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난 후 그녀의 육체를 사로잡고 괴롭히던 무거운 감정에서 해방됩니다. 그리고는 암에서 치료받고 깨끗해집니다. 


  내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자기를 잘못을 깨닫고 뉘우쳐도 용서하기가 어려운데, 깨닫고 뉘우치기는커녕 더욱 의기 양양할 때는 용서할 마음이 사라져 버려요. 그러나 용서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과 응어리가 나에게 있는 한, 내가 건강하게 살 수 없어요. 정서적으로도 그러하고, 몸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심장마비를 일으킬 위험이 두 배나 많다고 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50대 사망률이 무려 다섯 배나 더 한다고 합니다. 상처받은 것도 억울한데 몸까지 아파서야 되겠습니까? 나를 아프게 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을 내 마음속에 품고 사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에게 해롭습니다. 힘들어도 용서하십시오. 용서하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유익하게 하는 일입니다. 


  복받는 길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아브라함은 어떻게 복을 받았어요? 말씀에 순종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은 어떻게 복 받았어요? 이삭은 화해하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이 우물을 파 놓았더니 그랄 목자들이 우물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목자들끼리 서로 싸우는 거에요. 이스라엘 땅에서 물의 근원을 찾는다는 것이 참 힘든 일이에요. 아무 곳이나 판다고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힘들게 우물을 파서 빼앗으러 오면 싸우지 않고 이삭이 뭐라고 합니까? "가져" 또 옮겨가서 우물을 팝니다. 물이 나오는데, 또 빼앗으러 옵니다. "가져" 또 옮겨서 우물을 팝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빼앗으러 안 오더라는 거예요.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이삭이 믿은 대로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고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다투지 않아서 복을 받은 거예요. 그렇게 살면 당장 손해보고 망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더라는 거예요. 


  사람이 모여서 사는 일에 전혀 갈등이 없을 수는 없어요, 예수님이 직접 기도하시고 뽑은 12제자들마저도 성령충만하기 전에는, 그들이 서로 갈등하고 화목하지 못했어요. 서로 높아지려고 싸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해 지니까, 사도들은 물론이고 온 교회가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하나 되었다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성령으로 충만하면 갈등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욕심부리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화해할 수 있습니다. 나눠줄 수 있습니다. 함께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 못합니까? 내 마음 속에 있는 욕심이 그것을 못하게 하는 거예요. 육의 생각이 못하게 가로막는 거예요. 


  내 마음에 용서가 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게 해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에 비하면 우리의 용서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우즈벡에서 선교 사역을 하다가 추방당하여 한국에 있는 어느 선교사님의 간증입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했는데,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피가 터지도록 맞기까지 했고, 선교사님의 어머니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누워있는 어머니에게 커다란 랜턴을 집어던져 이마가 찢어져서 응급실로 실려가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선교사님이 우즈벡으로 떠나기 전날 어머니는 이제 떠나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를 딸을 위하여 정성을 당하여 저녁상을 차렸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 앞에서 기도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기에 기도를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버지가 잠깐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아 감사의 기도를 했는데, 그것을 본 아버지가 밥상을 발로 차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그래도 내가 자식인데 아버지가 이렇게 대할 수가 있는가?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분노를 억누르고 아버지 앞에 "아버지 잘못했어요. 아버지가 하지 말라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그렇게 했던 것 용서해 주세요" 밥상을 차 버리던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핑 돌더니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핍박하던 아버님이 얼마 전부터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멘! 


  골로새서 3:13-14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생각해 보면 우리가 먼저 용서함 받았어요. 우리의 죄를 생각해 보면 엄청난 죄를 지었어요. 죽음으로도 보상 할 수 없는 큰 죄를 용서받은 거예요. "다 용서해 주겠다. 기억도 하지 않겠다" 그러면서 한가지 부탁의 말씀 "내가 용서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용서해 주라" 


  사람이 살면서 관계는 참 중요합니다. 초등학생까지 따돌림을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습니다. 왕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은따도 있어요.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 영따가 무엇인지 아세요? 영원히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 전따는 무엇인지 아세요? 전교생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 다른 사람은 재미로 하는 일이지만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다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왕따를 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알아보니까, 3척 때문인데, 잘난 척, 예쁜 척, 착한척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아이가 왕따 당하는데, 내가 나서게되면 내가 착한 척하게 되어서 나도 같이 왕따를 당한다고 합니다. 원치 않으면서도 그 친구를 멀리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아이들의 이야기만은 아니에요. 직장에서도 이런 일들이 있고, 심지어는 군대에서도 기합이나 얼차려 대신 왕따를 시켜서 괴롭히는 일들이 있다는 거예요. 교회에서도 이런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 바라보고 살지요. 그러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믿음 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몰라요.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교회에 나오기 싫어지기도 하고, 믿음 생활을 포기해 버리는 그런 일들도 있더라는 거예요. 불편한 관계 때문에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차라리 먼 사람은 괜찮아요. 같은 교회, 같은 구역, 같은 기관에서 서로 불편하면 그것이 그렇게도 힘들고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하기에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 대제사장적인 중보 기도를 하시던 가운데, 끝 부분에 보면 대부분의 기도를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이 하나되는 것을 위해 거듭 거듭 기도하고 계시더라는 거예요. 당연한 것이면서도 어려운 일이기에 집중해서 기도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경우에 내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까? 용서하는 마음에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인생 살아가면서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가듯이 상처도 늘어갑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세상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받는 상처, 겪는 아픔 있습니다. 지상 교회는 어디나 다 그래요.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사는 곳에는 늘 이런 저런 문제나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주님 닮아 가는 용서의 사람, 내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까지도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성숙한 직분자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용서하면 큰 사람됩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주변에 자기보다 훨씬 탁월한 인재들을 수없이 많이 두었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처럼 마음이 큰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하여 "용서의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20대 초반이었을 때, 회사의 공금을 가방에 넣어 전달하는 일을 맡았는데, 한번은 엄청난 거금이 든 가방을 가지고 기차를 탔는데, 너무나 피곤하여 난간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을 차려 깨어보니 가방이 없어진 거예요. 졸다가 차창 밖으로 가방을 떨어뜨린 거예요. 큰 충격을 받은 카네기가 이것 저것 가릴 것 없이 기관사에게로 뛰어가 사정을 설명하고 열차를 후진시켜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카네기를 딱하게 여긴 기관사는 몇 킬로미터 정도 열차를 후진시켜 주었는데, 개울가에 가방이 떨어져 있더라는 거예요. 그 아찔했던 경험을 통하여, 평생 실천에 옮길 중요한 결심을 했는데 "나는 젊은 사람이 아주 결정적인 큰 실수를 해도, 그가 사기성을 가지고 일부러 한 일이 아닌 이상 용서하고 품어주자. 사람이 살다보면,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해도 돌연히 당하는 일이 일어나는 법인데, 그것 때문에 평생의 꿈이 좌절되는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


  많이 가지지 않아도 서로 서로가 하나 되면 행복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래요. 부부가 그렇고, 자녀와 부모의 마음이 하나가 되면, 그 가정은 행복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목회자와 중직자들이, 제직과 온 성도들이, 마음이 합해지면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고 행복한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죄가 사람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그래서 서로를 찌르게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합니다. 우리 성격도 환경도 직업도 배경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십니다.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전 세계에서 성령의 역사가 제일 강하게 나타나는 교회가 한국교회라고 하면서, 전 세계에서 마귀의 역사가 제일 강하게 나타나는 나라도 한국이라고 했어요. 지금 이 지구촌에서 같은 나라가, 같은 민족이 나누어진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거예요. 우리 나라 작은 땅이에요. 그런데 우리 나라처럼 지역간 갈등이 많은 나라가 없다는 거예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간에도 그렇고, 세대간의 갈등도 많더라는 거예요. 


  죄는 사람들을 나누어지게 합니다. 서로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에베소서 4:3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주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거예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해야 될 일이 있다면 뭐예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깨뜨리지 말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유달리 끼리끼리가 강한 사람, 어찌보면 인간 관계가 좋은 것 같고, 잘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분열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교회 안에는 계모임이나 사적인 그룹이 없어야합니다. 몇몇 사람은 친해지니 좋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끼리끼리가 형성되어 교회에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46-47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개인적으로든, 관계적으로든 갈등에 빠지면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어요. 갈라디아서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생사를 함께 했던 아브라함과 조카 롯도 갈등 때문에 헤어지게 됩니다. 사람과의 갈등은 결국 미움을 가져오고, 결국은 그것이 주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게 됩니다. 


  우리를 나누어지게 하고 갈등하게 하는 악한 역사들이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악한 역사를 물리치는 가장 큰 비결이 무엇일까요?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합시다 용서하며 삽시다" 그렇습니다. 부모의 허물도 용서하며 살고, 자녀의 잘못도 용서하며 살고, 형제나 이웃의 잘못도 용서하며 살면 그 곳에 악한 역사가 우리 가정을 넘보지 못하고, 우리 교회를 흔들지 못하고 물러갈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이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에베소서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 왜 화날 일이 없겠어요? 왜 속상한 일이 없겠어요? 왜 미운 사람이 없겠어요? 이것 때문에 더 큰 것을 잃지 말자는 거예요. "넘어설 것 넘어섭시다 더 큰 것을 봅시다" 


  당장 잃은 것, 빼앗긴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원망하지 말아야합니다.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 환경 때문이 아니에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결국 선한 결과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어떤 랍비가 나귀를 타고 닭 한 마리와 등불과 천막을 싣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가도 가도 집은 없고, 해는 저물어 하는 수 없이 길옆에다 천막을 치고 나귀와 닭은 천막에다 묶었습니다. 왜 닭을 가지고 다니는지 아세요? 아침이면 닭이 울어서 알람 시계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랍비가 천막 속에서 등불을 켜고 성경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 등잔대가 넘어지고 그만 불이 꺼져서 성경을 덮고 기도를 하고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 맹수들에게 나귀와 닭을 잡아가 버린 거예요. 밤이라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동네 가까이 에서 잔 거예요. 동네에 들어가 보니 온 동네가 난리가 난 거예요. 어제 밤에 강도 떼가 이곳을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약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랍비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를 했어요. 만일에 등불이 켜 있었거나, 닭이나 나귀가 살아서 울었더라면 자기도 틀림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랍비는 이 세 가지를 미리 잃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가 잃어버린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 감당하기에 힘들었어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 도와주셨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주님과의 관계가 가로막히지 않고, 기도의 문이 가로막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화목하고 살아야합니다. 마태복음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제일 귀하고 복된 일입니다. 그것보다 먼저 할 일은 가족이든지, 이웃이든지, 성도간에든지 서로 용서하고 화목하는 일이라는 거예요. 그래야 주님과의 관계가 가로막히지 않고, 기도의 문이 가로막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 못지 아니하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용서하면서도 자신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누구나 실수합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였고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한 자였고, 바울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용서하셨고, 자기 자신도 용서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의식 속에서 사는 것이 믿음 좋은 것이 아니에요. 같이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나를 용서하며 삽시다" 용서하는 것은 지난날을 청산하는 것이고, 마음과 정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살인범이 재판정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는데, 그의 형이 고위 공직에 있으면서 나라를 위해서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동생이 죄를 짓고 사형장으로 나가게 된 것이 너무 마음 아파서 체면 불구하고 대통령을 찾아가게 되고, 동생을 사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대통령은 그 형의 나라를 위한 공훈을 생각해서 사면을 허락했는데, 형은 사면장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감옥을 찾아갑니다. 동생에게 물어보기를, "만일 네가 이 어려운 가운데서 사면을 당해서 자유를 얻는다면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겠느냐? 무엇을 하겠느냐?" 동생은 살기 등등한 목소리로 "내게 사형 언도를 한 판사를 먼저 죽이고, 내가 이렇게 사형을 받도록 불리하게 증언한 증인들을 모조리 죽일 것입니다" 형은 너무 마음이 아팠지마는 아무 말 없이 감옥을 나와서 사면장을 찢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잘 모릅니다. 나를 배신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어요? 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어요? 그 사람 때문에 지금도 피 눈물을 흘리고 살아가는데 용서할 수 있겠어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용서하라! 내가 너를 용서했던 것처럼 서로 용서하며 살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어요. 내 본성으로는 안 되는 일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했기에 용서하며 살아야합니다. 힘들어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며 살고, 나 자신을 용서하며 삽시다!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며 살면, 나도 어둡고 다른 사람도 어두워집니다. 나도 괴롭고 다른 사람도 괴롭게됩니다. 기도하고 은혜 받아 용서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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