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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사람으로 사는 비결 / 눅 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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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눅 3:1-14
제목 / 큰 사람으로 사는 비결
설교 / 전충현 목사(영암교회)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시는 선물 중에서 <가장 귀한 선물>은 그 무엇보다도 <자녀들>일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인 자녀들 !
그 자녀들이 우리 부모님들은 이 땅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기를 원하십니까 ?

세상에는 <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
자녀들이 이 땅에서 <작은 자>로 살아가는 것 !
그것을 원하는 부모님들은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한결같은 마음은 자녀들이 <큰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
그것일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발표된 새로운 정부의 장관들도 여러분, 보셨지 않습니까 ?
저들 가운데는 젊은 나이에 <큰 사람>의 반열에 선 사람들도 다수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메스컴>마다 하는 소리가 무엇이었습니까 ?
이번 인사는 너무 <파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처럼 너무 <파격적>이라는 세인들의 평가에 대해서 대통령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
이번 인사를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적인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시대는 지금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 대통령의 생각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
<진정한 개혁>은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
<개혁>이라는 단어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
<한자어>로 개혁은 고칠 개(改), 또는 바꿀 개(改), 가죽 혁(革)입니다.
말하자면 <가죽으로 바꾸어 주는 것> !
그것이 <개혁>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뜻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
<가죽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 <개혁>이라는 말을 바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임의로 파기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은 자신들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취한 행동이 무엇이었습니까 ?
<나뭇잎>으로 저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라 부스러지고 말았습니다.
보다 못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저들에게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
그것이 바로 <가죽옷>이었지 않습니까 ?
하나님께서 저들의 옷을 <가죽옷>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 !
이것이 <최초의 개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정한 개혁>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워주기 위해서 사용하셨던 <가죽> !
그것은 <동물>을 죽여야 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
그것은 <피> !
<피>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가죽>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은 사람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  잊지 마십시오 !
<진정한 개혁>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개혁 !
그것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 없는> 큰 사람 !
그런 사람도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큰 사람>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큰 사람>으로 살 것인가 ?
여기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이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한 사람, <세례 요한> !
그를 단 한 마디로 평가한 말씀이 <눅 1:15>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주 앞에서 큰 자> !
성경은 그를 그렇게 <주 앞에서 큰 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존재 앞에서> 큰 자로 살아야 할 것인가 ?
여기 이 문제는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어떤 사람 앞에서> 내가 큰 자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내가 큰 자로 살 것인가 ?
여기 이 문제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말입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여기 이 땅에서의 우리네 삶으로 우리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고, 거기에 따르는 <또 다른 삶>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
바로 그 때에 <심판장>이 누구이신지 말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
그 분께서 <심판장>이 되시지 않습니까 ?
오늘 우리가 다른 그 어떤 곳이 아닌 <주님 앞에서 큰 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주님 앞에서 큰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인가 ?
<세례 요한의 삶>은 그것을 우리에게 <세 가지>로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비결>은 광야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
그가 지금 서 있는 땅은 어디입니까 ?
<빈들> !
<빈들>이라 하지 않습니까 ?
4절 말씀은 거기가 <광야>라고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
세례요한이라는 사람 !
이 사람이 원래 <어떤 가문의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
그는 당시 <제사장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눅 1:5> 말씀을 보십시오 !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이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

당시 제사장이라 하면 그의 남은 평생은 이미 <안락한 삶>이 보장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광야>에 서 있습니다.
왜 ?
무엇 때문에 ?

사람들은 흔히 <빈들>, <광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
무엇보다도 거기는 외롭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광야가 너무나도 적절하지 못한 곳입니다.

<모래 바람>이 휘몰아치는 땅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 한 사람도 의지할 곳이 없는 땅 !
그러기에 온갖 인생의 쓰라림과 아픔을 혼자서 다 삭혀야만 하는 땅 !
<광야>는 그런 곳이기에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광야> !
바로 거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기에 너무나도 좋은 곳 !
거기가 바로 <광야>입니다.

세례요한이 살던 시대는 악으로 가득 찬 시대였습니다.
한 마디로 <사회 전반>이 악으로 범벅이 된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면 그 삶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
세례요한이 <보장된 삶>을 뒤로하고 <광야>로 들어갔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영암의 가족 여러분 !
오늘 여러분은 어디에 서 계십니까 ?
여러분은 모두가 <천국 백성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서 있는 것이 어디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고 있는지요 ?
우리, 솔직해져야 합니다.
너무나도 <넉넉한 삶>이 지금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
너무나도 <잘 나가는 인생>이 <여러분의 귀>를 막고 있지는 않는지요 ?
너무나도 <건강>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노후가 보장된 삶>,역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의 부요함>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세계 62위입니다.
하지만 가난하기로 유명한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세계 1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도 무엇이겠습니까 ?
세상의 부요함 !
그것은 우리가 전혀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영암의 가족 여러분 !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땅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불편한 땅이라면 우리는 <일부로라도> 광야에 나가 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 내가 직면한 현실이 너무나도 초라한 것 !
그것은 우리에게 문제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그 누구와 만나서 위로 받고 싶은데 주변에 그럴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까 ?
아픔을 나눌 사람 !
그런 사람이 지금 여러분 주변에 아무도 없느냐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  기억하십시오 !
여러분께서 서 계신 지금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가장 좋은 자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직장>을 잃으셨습니까 ?
<돈>이 떨어졌습니까 ?
그러기에 지금 사람들이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습니까 ?
지금 그 순간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

<모세>도 광야로 갔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
<다윗>도 광야로 간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도 광야로 갔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까지도 광야로 가셨지 않습니까 ?
인생의 한 순간, <광야>에 섰던 사람들 !
그러기에 그곳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들 !
하나님은 그들의 인생을 그 누구의 인생보다도 아름답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광야> !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헛된 욕망>을 버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환경을 초월하여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바로 그 광야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의 것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 앞에서 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두 번째 비결>은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당당하게 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
그가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 하지 않습니까 ?
7절 말씀은 또 어떻습니까 ?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
  독사의 자식들아 !

참으로 당당한 모습 !
불의한 사람들과 전혀 타협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 !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세례요한의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어떻습니까 ?
여간해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우리가 여기에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
성경이 그를 <주 앞에서 큰 자>라고 말하는 이유는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사해 근처>에 <맛사다>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타원형의 큰 기둥처럼 생긴 <돌 언덕>인데, 높이가 450m, 폭이 250m나 되는 <천연요새>입니다.
이곳 주변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입니다.

AD70년에 로마 황제 <티투스>가 이스라엘을 점령할 때, 960여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이곳으로 피신해 왔습니다.
로마군대는 이곳 <맛사다>를 3년 동안 포위했지만 유대인들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로마 군대는 토담을 쌓아서 <맛사다 요새>를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토담이 거의 정상 지역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도자였던
<벤 야일>이 말합니다.
  항복할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
결국 그곳의 사람들은 타협하지 않고 모두가 죽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의 <소유물>을 다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땅 속에 묻었습니다.
그리고는 저들이 어찌했는지 아십니까 ?
<가장들>이 먼저 자기 가족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이제는 <남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저들은 <10명>을 뽑았습니다.
그 10명이 <다른 남자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나머지 <10명>은 다시 <한 사람>을 뽑았습니다.
마지막 그 한 사람은 <10사람>을 죽이고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여기 이 사실은 동굴 속으로 숨어 들어간 2명의 여자와 5명의 어린이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로마인들과 끝까지 타협하지 않으려고 했던 유대인들 !
저들의 그런 모습은 세상을 향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어야 할  모습이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오늘 우리네 현실이 어떻습니까 ?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모습 !
그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요 ?

우리는 흔히 <상황 윤리>를 이야기합니다.
그 때 그 상황이 나로서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내가 그 순간 말씀과는 동떨어진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고후 6:14-18>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 
거기에는 5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  그리 말씀하신 다음에 -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할 수가 있겠는가 ?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귈 수가 있겠는가 ?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될 수가 있겠는가 ?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할 수가 있겠는가 ?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되겠는가 ?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그러므로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서 있으라 !
거기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  이렇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 눈에 알아보실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한 마디로 식별이 가능한 <하나님의 사람들> !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보고 싶어하시는 우리네 모습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때로는 철저한 <세상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가 그렇게 적당히 세상을 살아가는 것 !
그것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견디지 못해 하십니다.

그러기에 <갈멜산> 위에서의 <엘리야의 외침>도 무엇이었습니까 ?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
  하나님이면 하나님 !  바알이면 바알 !
도대체 <무엇>을 섬길 것인지를 이제는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우리도 당당해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 !
그 사실을 이제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밝힐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례요한의 <당당함> !
그것이 그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큰 사람>으로 인정받게 했습니다.
엘리야의 <당당함> !
그것 역시 엘리야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큰 사람>으로 평가받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의 당당함>이 오늘 이 전을 찾은 <우리 모두의 당당함>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로 인해서 이제는 우리 모두가 세상과 환경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아 갈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앞에서 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 번째 비결>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
세례 요한에게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지 않습니까 ?
10절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서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느냐>고 자문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
12절을 보십시오 !
악명 높기로 유명했던 <세리들> !
그들이 세례 요한에게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14절 말씀도 보십시오 !
<군병들>도 그에게로 몰려들고 있지 않습니까 ?

성도 여러분 !  어떻습니까 ?
이쯤 되면 그가 충분히 <교만>해질 수 있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
그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대단히 낮추고 있지 않습니까 ?

보이십니까 ?
여기 이 사람의 <겸손함>이 말입니다.
충분히 <교만>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을 유지하는 모습 !
세례 요한의 바로 그 모습이 오늘 그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큰 자>로 평가받게 했습니다.

저는 요즘 걱정스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하여 그를 둘러싸고 있는 <젊은 장관들>과 <청와대에 입성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저들은 지금 얼마든지 <교만>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한 나라를 자기들 소신대로 마음껏 주물러댈 수 있는 상황 !
그 상황은 저들로 하여금 <교만의 늪>에 빠지게 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상황입니다.

하지만 저들 가운데 그 누구라도 그렇게 <교만의 늪>에 빠져들면 그는 <사람> 앞에서조차도 <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이제까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지 않습니까 ?
우리 국민들이 이번 정권을 통해서는 그런 불행한 결과를 결코 보지 않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도 <교만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기억하십니까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
우리 인생이 망하는 <가장 지름 길>이 <교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교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을 눈
뜨고 보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교만>은 우리 가슴에 <시기심>으로 가득 차게 합니다.

알고 계십니까 ?
<시기심>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처참하게 찢어놓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로 그 시기심으로 인해서 <정신병자>가 되어 그 생을 마감한 사람들 !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성경 안에서나, 성경 밖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을 우리, 다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
다윗을 향한 <사울왕>의 시기심 !
그것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그는 <왕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질투의 독>을 마시고 비참한 죽음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영암의 가족 여러분 !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서 큰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
이제는 <하나님>을 더 의식하며 하루하루를 사십시오 !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인생의 광야> !
그 <광야>에 서기를 이제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그 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당하십시오 !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숨기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리 <교만>해질 수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러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십시오 !
<겸손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 생명이 다하는 날 !
그 날에 우리 모두가 저 사람은 참으로 <큰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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