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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 / 히 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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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준식 목사 (신림교회)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
  히브리서 3장 7절 -11절


참담한 주일 아침입니다. 비록 힘든 역사를 지닌 조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며 살았던 이 땅이 한없이 원망스럽기만 한 한 주간이었습니다. 안전 불감증이란 단어로 이 문제를 해석하고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좁은 소견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건들이 반복하면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사건을 안전 불감증으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불감증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1달 동안 우리나라 백성들은 다 미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권에 미친 민족이었습니다. 복권을 사기 위하여 긴 줄을 늘어서 있었습니다. 불우이웃을 위한 성금을 내라고 하면 아까워하던 사람들이 아낌없이 복권을 사들였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당첨 확률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행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복권을 사 들였습니다. 한 두 장 산 것도 아닙니다. 마치 전쟁이 일어나서 물건을 사재기하는 사람처럼 수십 장에서 수 백장씩 복권을 사재기했습니다. 이렇게 헛되이 버린 돈을 쌓아 올린다면 그야말로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보다 더 높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음 속에 바벨탑 보다 더 높은 탑을 쌓고 있었지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심으로 당첨만 되면 내가 감사 헌금을 얼마 하리라 계산도 해봤을 것입니다. 이렇게 복권에 미친 세상에서 대구 사건은 당연히 터질 수 있는 예고 된 사건이었습니다. 혹시 모르겠어요. 전동차 종합 상황실 직원들이 업무에 충실하지 않고 노닥거리면서 로또 복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그리고 사고 관계자들은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찰들은 거짓말 탐지기를 동원합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얼마나 거짓말이 심한지 이제는 거짓말 탐지기도 작동이 안 된다는 거예요. 때문에 이런 사건이 단순히 안전 불감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붕괴된 사회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이렇게 붕괴된 우리 현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해 주십니다. 7절 말씀에 보면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시편95편 7-11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꿈을 통하여 성령께서 저자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하면서 고백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오늘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은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7-8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왜 마음이 강퍅하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다시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가 봐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한 때는 홍해 바다를 건너기 직전이었습니다. 아무 훈련을 받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곧 바로 잘 훈련된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 왔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광야에서 이렇게 죽기보다는 차리라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좋겠다 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불평이 아니라 떼거지로 몰려와 데모하면서 항의하였습니다.

여러분!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라고 믿어지십니까? 10가지 재앙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목격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라고 믿어지십니까? 그러나 이 말은 이방인들이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서 하나님의 심판이 건너간 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아직도 강퍅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아직도 다듬어져야 할 것들과 고침 받아야 할 것들이 내 안에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분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분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을 떠난 후에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마음을 분노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떠나고 보자. 그래서 상황이 좋아지면 계속 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리턴 하면 될 거 아니냐?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해 보자 였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어렵게 되자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살고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는데 시험 보는 것도 없어요. 보증금도 내지 않아요. 내 좋으면 오고 내 싫으면 안 오면 되는 게 교회입니다. 항상 양다리 정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내가 유익한 쪽으로 도망 갈 수 있는 길을 우리 스스로 확보 해 놓고 있습니다. 저는 믿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마다 너무나도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현대는 정보사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 저기서 들은 이야기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 결과 진리가 사라진 것처럼 생각합니다. 진리를 절대화시키지 않습니다. 진리는 늘 상대적이요 내가 좋으면 진리라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선택한 길에 어려움이 생기면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가정에 아이가 없어서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갖기로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인공 수정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부가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남편에게 문제가 있어서 아이가 생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술하는 방법도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부부가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생기지 않을 때에는 남편의 것을 아내에게 옮겨 주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문제가 있을 때에는 달리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아이를 낳고 싶을 때에는 변칙적인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남자의 것을 아내의 몸에 옮김으로 아이를 갖게 하는 방법입니다. 앞사람의 상황은 우리가 충분히 이해가 가고 또한 그렇게 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후자인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할지 복잡해지지 시작합니다. 이럴 때 그리스도인과 세상사람들이 분명하게 나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직면하면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를 갖는 게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남의 남자의 것을 내 아내의 몸에서 자라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입양을 해서 아이를 키우는 게 백번 천번 옳은 일이지요. 지금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에 순종하면 절대로 분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는 절대적인 진리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순종하고 타협했기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주인공 카라마죠프는 이런 독백을 합니다. “ 만약 신이 계시지 않다면 나는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을 텐데...그렇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틀렸다고 누구도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의 규범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절대자의 규범을 제거할 때 우리의 삶은 허무함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번 대구 참사를 보십시오. 지하철을 운행하는 절대적인 규범이 내규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직원들은 절대적인 규범을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불이 났으면 당연히 열차를 정지시켜야 하는 것이 기본이지요. 그런데 종합 상황실은 규범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규범보다는 자기 견해로 사건을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저는 여러 해 전에 제 몸에 당뇨 증세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께서 당뇨를 체크 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주시면서 늘 체크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시험지로 당을 체크해 보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을 빌어서 여러분에게 도전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리트머스 시험지를 지니고 있습니까? 내 영적인 상태와 이 시대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시험지를 소유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상대화 되어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만이라도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함으로 세상을 진리로 판단하고 진리대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출애굽으로 돌아가 보도록 합시다. 홍해 바다 앞에서 우왕 좌왕하던 이스라엘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옵니다. 앞은 홍해 바다입니다. 그리고 좌우에는 높은 산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애굽을 탈출해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돌아 갈 길이 막혔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뒤로 돌아 갈 수 없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이 편지를 읽는 독자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지금 이들 뒤에는 유대교가 추격하고 있습니다. 죽이려고 덤벼듭니다.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습니다. 환란을 겪습니다. 그러자 홍해 바다 앞에서 불평불만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뒤로 돌아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길은 죽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 살 길이 있습니까? 모세는 이 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민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그렇습니다. 모세는 이 때 우왕좌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눈은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눈은 여론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흙먼지를 일으키고 무섭게 달려오는 애굽 군사의 막강한 파워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눈은 행하시는 여호와를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믿음이요 충성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홍해 바다 밑에 길 하나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죽음처럼 보이는 홍해바다, 파도가 넘실거리면서 순식간에 우리를 삼켜 버릴 것 같은 그 바다 밑에 하나님께서는 마른 길을 예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로 돌아 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과거의 상처가 나를 붙잡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손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옆길로도 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타협 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오직 앞으로 나가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홍해 바다 앞으로 나가야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뒤를 돌아 봐야 무서움 밖에 없습니다. 옆을 봐야 한숨이요 낙망입니다. 그러나 앞을 보십시오. 넘실거리는 홍해바다를 바라보십시오. 그 안에서 지금 우리를 위하여 길을 만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길은 질퍽거리는 길도 아닙니다. 빠지지 않는 길입니다. 마른 길입니다. 애굽 군사를 위한 길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위한 길입니다. 이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음처럼 보이는 바다에 있습니다. 죽음의 십자가에 생명의 길이 예비 되어 있는 것입니다.
9절을 읽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뒤에서 우리를 몰고 다니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행하시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에게도 40년 동안 행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이런 하나님을 40년 동안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붙들고 살면 행복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붙잡는 사람은 절대로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이 180도로 달라집니다.

대구 참사로 인하여 절망하고 있는 분들 가운데 자포자기한 인생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죽음을 의식하면서도 전혀 다른 삶을 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절대적인 기분으로 인생을 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10-11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미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은 늘 어긋나 있었습니다. 그 결과 1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승리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미혹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이 몰려 올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 몰리면 어느 누구도 굴복하고 싶어합니다. 옛 습관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승리하십니다. 때문에 연약한 우리가 주님을 붙들면 승리하신 주님 때문에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모세처럼 주님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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