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변화 하심의 뜻은? / 눅 9:28-36

  • 잡초 잡초
  • 704
  • 0

첨부 1


변화 하심의 뜻은?  (눅 9:28-36 )
김영태  (청북교회)


예수님이 어느 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기도하러 가시는데 혼자 가시지 않고 베드로와 요한 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그의 전 생애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식사하는 것은 더러 거르셨지만 기도하는 것은 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하러 가실 때 성경의 기자들은 습관대로 하고 기록을 합니다. 그분의 기도는 몸에 베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시간은 주로 새벽미명이나 밤에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낮에는 주님이 여러 가지 사역을 하시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낮에는 너무 뜨거워서 기도하기에 적절한 시간이 아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 사람들이다 떠나간 한가한 시간에 기도하시고 아침 일찍 새벽 고요한 시간에 아무도 만나기 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어느 때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마는 예수님의 평소 습관대로라면 새벽이나 저녁일텐데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것을 보면 저녁때라고 생각이듭니다.

예수님의 기도하신 곳은 어느 특별한 장소가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가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를 변화산 이라고 합니다마는 사실은 그때는 무명의 산이지요. 기도한 장소가 귀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신 것이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시다가 변화하셨더니 변화산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특별한 장소가 없습니다. 산에서도 들에서도 골방에서도 기도 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이면 어디든지 기도의 장소입니다. 오늘 날 기도 할 장소가 없어서 기도를 못한 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사는 모든 공간 이 기도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늘 출장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남들처럼 새벽에 교회에 와서 기도 할 수가 없어서 고민을 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어디든지 출장지에 도착해서 몇 일을 묵든 도착하고 나면 가장 먼저 기도하기 좋은 장소를 찾는 것입니다. 가까운 교회를 찾던지 아니면 기도할만한 가장 좋은 장소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유하는 동안은 그 장소를 기도 장소로 알고 가서 기도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실은 기도할 수 없게 하는 많은 요소 속에서 우리를 지키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기도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곤하여 졸았다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오래 동안 기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오래 동안 기도하는 동안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용모가 변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데 그 내용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는 동안에 변화 되셨습니다. 그리고 졸던 제자들이 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변화되심의 뜻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에게 그것을 보여 주시면서 성경에 기록한 뜻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몇 가지 교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세상에 오셔야 할 분이 아니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보통사람처럼 격식 없이 행동하는 것에 대하여 감동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나가지 않아도 될 것을 스스로 나가고 말로만 해도 될 것을 친히 찾아가는 모습에 사람들이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하거늘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세상에 오셨습니다. 감히 그 앞에 서지도 못할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하며 그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그렇게 귀한 분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온몸이 변하고 광채가 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놀랐습니다. 여기 초막 집을 집시다.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여기가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광 가운데 구름가운데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변화하심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분이 메시야 이시다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 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나눈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서 죽으심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온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는 메시야 그는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입니다.

예수는 세상에 죽으러오셨습니다. 세상에 죽으러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두가 살기 위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살기 위하여 온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또 앞으로도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죽으러 오신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사셨습니다. 그분이 말씀 하셨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 그분은 죽고자 오셨기에 다시 살아나셔서 온 인류의 메시야가 되셨습니다.

셋째는 그분 안에 모든 영광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변화하신 사실에 대해서 벧후 1:16절에서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고 말하고 요한 도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변화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난 받으시지만 장차는 이 영광에 주님이 들어가게 될 것이요 그와 접붙임을 당한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안에서 이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 후에 영광이 있습니다. 에수님은 그 고난을 이야기 하고있고 고난 후에 있을 영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다릅니다. 고난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말합니다. 주님의 뜻을 모릅니다. 고난을 모릅니다. 고난 후에 영광을 모릅니다. 고난 뒤에 오는 수고 뒤에 오는 열매를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제자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고난은 보이지 않습니다. 영광만 보입니다. 오늘 날 그 대표적인 모습이 로또 복권에 사람들이 정신 없이 매달리는 것입니다 땀 흘리는 것을 모릅니다. 거저 얻어지는 것보다도 수고의 열매가 귀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땀흘린 빵 한 조각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땀흘림을 모를 때 사회는 썩어 들어갑니다.  고난이 보여야 합니다. 고난 받기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고난 뒤에 오는 영광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여기 초막 셋을 짓고 살자 할 때 예수님이 내려가자고 합니다. 내려가자는 것은 고난 받으러가자는 것 아닙니까? 여기 에 초막 셋을 짓고 살려면 그런 영광을 얻으려면 고난의 현장으로 가서 고난 받고 와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아니나 다를까 산아래 내려오니 당장 고난이 잇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간청을 하지 않아요, 세상은 고난이 잇습니다. 우리가 죄 값으로 받는 고난도 있지만 우리는 죄 값으로 받는 고난이 아니라 스스로 지는 고난 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모두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지는 고난이 있어야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천국 에 들어가 영광을 얻을 수 잇습니다.

19세기 스코틀랜드의 대학에는 명예 학위수여 자를 야유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발코니에 걸터앉아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으려는 사람이 광부출신이래 하면서 야유하곤 했습니다. 이 학교에 리빙스턴이 학위를 받기 위해 오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오늘도 명예학위를 받으러 오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가 하고 야유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리빙스턴이 나타나는 모습을 본 모든 학생은 그 자리에서 동시에 일어나 마치 굳은 사람처럼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의 팔은 축 늘어져있었고 그의 얼굴은 온갖 상처투성이요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은 백인이라기보다는 흑인에 가까 왔습니다. 복음을 가지고 오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사자에게 어깨를 물려 찢겨나간 팔을 축 늘어뜨리고 오는 이 노 선교사 앞에 모든 학생들은 기립하여 존경의 경의를 표했습니다. 봉사의 결과로 얻은 상처, 그리스도로 인한 욕됨을 당한 그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보내는 영광이 있었습니다. 어찌 사람들의 영광뿐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의로운  상급이 준비된 줄로 믿습니다.

롬8:17절은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였고 벧전 4:13절에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나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했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데 고난의 길이 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광과 통하는 길입니다. 고난주간의 문턱에와 있습니다. 주를 위해 당하는 고난을 영광으로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하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변화하심의 뜻은?
눅 9:28-36
2003. 03. 02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