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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살리사 / 시 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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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강성찬 목사 (전주동부교회)
시85:6 다시 살리사


선민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보살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아는 시인은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이러한 시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구원과 평강으로 응답하시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풍성하신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길자연 목사)와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회장 최해일 목사)는 3월 2일 주일을 나라를 위한 기도 주일로 선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기도제목은

△신사참배 회개와 사신우상 타파

△도덕성 회복과 부정부패 청산

△국가 발전과 경제성장

△북한 인권 개선과 탈북난민 인정

△미군철수 반대와 북핵 포기

△평화통일과 민족 복음화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 위로 등으로 정했습니다.

또 자유 평화 수호와 국민 대화합, 한국교회 갱신과 연합 등을 구호로 설정했습니다. 준비위원회 관계자는 “나라의 위기 때마다 한국교회는 기도와 금식으로 위기 극복의 선봉에 섰다”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주전 605년에서부터 시작하여 세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하여 가나안 땅에는 노동력을 상실한 일부의 사람들만 남게 되었으므로 그 땅은 거의 폐허가 되고 말았습디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를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이는 바벨론에 끌려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예언대로 70년 만에 바벨론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시인은 이전에 이스라엘에 베푸신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다시 살리실 것을 믿고 기도드립니다.

하나님께 품었던 소망이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은 여호와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구원을 베푸실 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우리는 죽었거나 죽어 가고 있으며, 혼절했거나 약한 자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새 힘을 주시고 새롭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시 사랑을 반복하여 나타내실 줄 믿습니다.

나라의 위기에 시인과 함께 다시 살리사 라고 기도합시다.



  죄악을 사하시고 다시 살리사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된 자로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셀라) (시 85:1,2) 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을 구원코자 하였으나 저들은 그 약속을 위반하고 배약하여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잃고 이국에 포로가 되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악을 덮어 주셨습니다. 그들의 죄는 그 죄의 값만큼 보응 받은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의 복을 받은 역사입니다.

시편 130편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누가 주 앞에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 주께 있음이니다'(3, 4절)고 함과 같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따진다면 누가 감히 주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지우시고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서 그 죄악을 사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조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 1:15)고 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를 받은 성도는 찬송과 감사를 주 앞에 돌리며 용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들 중에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생이 죄악 중에 잉태하여 출생한 죄인이며 그것은 더 큰 죄로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필요함은 하나님의 용서만이 죄악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모든 허물을 덮어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부르셔서 그들의 모든 죄를 없다 하시고 의인으로 인쳐 주시는 것입니다.

사막을 연구 조사하는 특수 전문팀이 촬영을 해 온 것으로부터 아주 기가 막힌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사막에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물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막에는 여우와 다른 짐승들뿐만 아니라 뱀이나 개구리 풍뎅이까지도 삽니다.

그러면 이런 짐승들이 어디에서 물을 구해서 먹고 사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을 특수 전문팀이 풀어주었습니다. 사막에는 뜨거운 낮 기온과 차가운 밤 기온으로 인하여 밤과 새벽에 이슬이 맺힙니다. 그래서 여우같은 짐승은 바위에 낀 이슬을 매일 받아먹습니다. 개구리는 자기 머리와 눈 근처에 내린 이슬을 두 손으로 씻어서 핥아먹습니다. 뱀은 제 몸을 굽혀 돌려서 등에 내린 이슬을 그 혀로 핥아먹습니다. 그런데 풍뎅이는 어떻게 이슬을 먹겠습니까? 풍뎅이는 자기 몸에 내린 이슬을 먹기 위해서 머리를 땅으로 최대한 낮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등에 있던 이슬이 머리 쪽으로 흘러 내려오면 그것을 빨아먹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이 풍뎅이의 모습을 보면서 성도의 진정한 삶의 자세는 이 풍뎅이처럼 하나님 앞에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높은 자세 교만한 자세를 가지고 서 있는 것처럼 미련한 것은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결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죄를 고백하며 침상이 뜨도록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도 좌악을 사하시고 다시 살려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진노와 분노를 돌이키시고 다시 살리사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셨나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그치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발분하시겠나이까 (3-5)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싫어하시는 분이요, 범죄한 자에게는 진노하시고 징계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지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며 그 무엇도 그분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그분은 나라들을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시며 성하게도 하시고 쇠하게도 하십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뜻에 따라 진행됩니다. 어떤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시사 그의 모든 죄악을 없다고 선포해 주십니다.

죄는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분노하심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시인은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분노를 그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4절).

분노를 그치소서는 분노를 부러뜨리소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분노의 증거와 효과를 없애 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부러뜨리다"(파라르)는 갈라진 틈을 이용하여 날카로운 면을 부러뜨리고, 전혀 쓸모가 없게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분노란 맹렬하고 날카로운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꿰뚫고 상처를 줄 만큼 날카롭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못할 때는 이것이 무뎌지고 깨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분노가 이렇게 될 것을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분노를 거두셨고, 이 분노를 그분의 아들 위에 쏟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분노가 성도들에게는 이제부터 영원토록 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용서하실 때에는 이 분노를 거두어 가셨기에, 성도들은 율법 아래서 느꼈던 분노를 이제는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셨으므로, 앞으로도 이렇게 행하실 줄 믿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 1:10)고 합니다.

환난을 당하여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이기도 합니다. 한편 우리는 이러한 간구를 목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구로 삼는 데 그치지 말고 더욱 깊고 넓은 신앙 세계로 나가는 디딤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하며 사랑을 베풀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시다.


아동문학가인 소파 방정환 선생을 잘 아실 줄 압니다. 어느 날 방정환 선생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선생은 부드러운 얼굴로 서랍에서 당시 적지 않은 돈 390원을 내주었습니다. 강도가 급히 돌아서 뛰쳐 나가려하자 선생은 그를 불러 세운 후 "이보오. 돈을 가져가면서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사람의 도리가 아니요?" 하고 점잖게 꾸짖었습니다. 강도는 어이가 없었는지 "그래, 고맙다, 퉤!"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그 강도를 붙잡아 방정환 선생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이 자가 댁의 돈을 훔쳤지요?"라고 경찰이 말하자 고개를 숙인 채 사색이 다 된 강도를 내려다보며 방정환 선생은 말했습니다.  "나는 돈을 뺏긴 일이 없소." "아니 이 녀석이 제 입으로 390원 훔친 것을 다 불었단 말이요?" 그러자 방선생은 웃으면서 강도에게 말합니다. "이봐, 자네가 나한테 돈을 빌려 갈 때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지 않았나?"  선생의 말에 경찰은 도둑을 풀어주었습니다. 이에 도둑은 크게 뉘우치고 선생을 흠모하게 됩니다. 얼마 후 다시금 찾아와서는 선생댁의 심부름꾼으로 오래도록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진노와 분노로 멸할 수 밖에 없었으나 돌이키시고 다시 살리시는 은혜를 입었으니 더욱 그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며 또한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하소서(6)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용서하심이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변동되지 않음은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히 변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인자하심으로 백성들을 구원하시어 찬양하고 기뻐하는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죽은 자와 같고, 무덤에서 썩어 가는 시체와 같이 되었을 때에 은혜주시고 살리셨던 하나님은 다시 한번 살려 주시는 줄 믿습니다. 자비를 베푸사 하나님의 능한 손으로 다시 한번 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다시 살림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가장 자연스럽고 또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은 즐거움의 샘이 되시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샘에서 나는 물로 풍족히 채워 주고자 하시는 줄 믿습니다.

백성들이 샘물을 마시고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이처럼 기뻐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사망과 포로에서 돌이키시고 살려 주시므로 이 놀라운 역사가 함께 하는 줄 믿습니다. 기도를 들으시고 살리시는 기뻐하시는 역사는 지금도 계속 되는 줄 믿습니다.


한국 교회사에서 기도는 죽느냐  사느냐를 가름하는 투쟁의 문제였습니다.

  1900년대에 대각성 운동과 뜨거운 기도운동이 일어났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양한 이유가 제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명한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 민족이 경험한 고난과 절망' 때문이었습니다.

  불행과 절망의 상태를 영적운동이 일어나게 된 원인으로 지적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들이 슬퍼하는 것을 볼  때, 건장한 남자들이 망국(亡國)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때, 참으로 동정을 금할 수가 없다. 그들은 내게 와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같이 가난하고  비참한 민족이 또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최소한 그들이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바로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화살이 한국 민족의 영혼을 뚫고 들어갔다. 그들의 심령은 갈기갈기 찢기었다. 수년 동안 그들은 재 가운데 앉아 그들이 당하는  불행과 지난날의 죄악을 슬퍼하고 있다. 그토록 절망에 처한 민족 위에 하나님은 때때로 그분의 축복의 손을 펴신다. 상한 심령으로 한국 민족은 복음을 위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블레어)




한국교회는 1900년대 이후 수십 년 동안 심지어 지금까지도 당시의 부흥운동 및 기도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경험을 해왔으며, 초기 기도의 특징들이 여전할 뿐 아니라 견고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가진 모습입니다.

  큰 환난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곤고는 정신적인 고통이고 궁핍은 경제적인 고통을 가리킨다고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것은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기다리는 자세, 하나님 앞에 거지처럼 서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도 그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지처럼 도우심을 기다리는 상태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그의 인생을 거의 끝낼 무렵 고백한 것은 '나는 하나님 앞에 거지이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거지로 엎드릴 수 있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스펄전은 '한 방울의 긍휼의 단비를 맞고 나면 우리는 억수 같은 축복의 소나기를 퍼부어 달라고 부르짖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는 더 큰 은혜를 받고자 해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주일날 집회에만 참여하던 성도가 주일 밤과 수요일 집회에도 참여하게 되고, 나아가 새벽 기도회와 특별 집회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또는 그것마저 부족하여 더 깊은 은혜를 갈구하며 기도원이나 한적한 기도처에서 하나님과의 단독 대화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무시하는 자를 그 백성 가운데서 끊으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얻음은 당연합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이전처럼 회복시켜 달라는 시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화평을 주시겠다고 응답하셨습니다.

죄악을 사하시고 진노와 본노를 돌이키시고 다시 살리사 기뻐하게 하심을 믿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통성으로 기도 하겠습니다.

△신사참배 회개와 사신우상 타파

△도덕성 회복과 부정부패 청산

△국가 발전과 경제성장

△북한 인권 개선과 탈북난민 인정

△미군철수 반대와 북핵 포기

△평화통일과 민족 복음화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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