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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라 / 겔 33:10 ~ 11, 갈 2:1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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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살아라
설교 : 강원용 목사 (경동교회)

구약의 말씀: 에스겔서 33:10 ~ 11

  "그러므로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여라.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온갖 허물과 우리의 모든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서, 우리가 그 속에서 기진하여 죽어 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한다. 너희는 돌이켜라. 너희는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거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하여라.


서신서의 말씀: 갈라디아서 2:19~ 21

  나는 율법 앞에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게 하여 주심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9:57 ~ 62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기를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또 예수께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은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하였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을 하셨다.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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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지, 33년 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기독교방송에서 와서 우리의 예배를 중계하던 시간이었는데, “살아라” 하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설교하기 직전에 당국의 명령에 의해서 중계가 중지되었습니다. 그때에 이 제목으로 우리나라, 우리 사회의 문제를 가지고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방향을 완전히 바꿔서 나 자신의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요새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제가 얘기를 하고나면 사람들이 제게 인사하는 말이 “아이고 그 연세에 그렇게 정정하게 말씀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목사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기쁘라고 하는 말인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정말 그럴 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렇게 나이 많을 때까지 살아 있는 것이 과연 복인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려서부터 생래적으로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는 성품이어서, 십대 때부터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이제 별로 활동도 못하는 그런 상태입니다. 내가 사랑하던 후배들도 보면, 이제 이미 60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바빠서이기도 하겠지만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만나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산다는 게 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새로 나온 잡지를 보다보면, 요사이 생명공학, 유전공학이 발달되어서 오래지 않아 뇌세포의 노화세포를 정지시키고, 못 고치는 병이 없게 되어서, 적게 살아도 아마 130살까지는 살다 죽는 때가 10년 안으로 온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은 간사스러워서, 그것을 보면서 “10년? 나도 10년 늦게 태어났다면 나도 그런 혜택을 받아 가지고 130살까지 살아볼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튼 산다는 것이 무어고, 살았다는 것이 무언지, 죽었다는 것이 뭔가 하는 문제를 자연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에스겔서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이 점점 죽을 짓만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가 살기를 원하는데 왜 자꾸 죽고자 하느냐? 내 진심으로 말하는데 너희 좀 살아라.”고 하십니다. 신약성서로 가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사람이 온 천하를 얻을지라도 제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온 천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자기 목숨이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는 것이 참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래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가만히 하늘에서 기다리다가 죽은 다음에 자기 앞에 온 사람을 천당 보내는 일이나 하지, 왜 세상에 왔는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육신으로 태어났는지, 그것도 이상하지만,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던 양반이 왜 서른세 살에, 얼마든지 더 살 수 있었는데 죽을 줄 알면서 그렇게 살아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었는가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오늘 읽은 누가복음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를 따르라.” 할 때 “선생님, 제가 따르겠습니다.” 하면 되는데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만 치르고 와서 따르겠습니다.” 합니다. 그런데 “아, 그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어? 그것 참 안됐구먼. 가서 장례를 잘 지내. 내 조문도 좀 전하고.” 하면 될 것을,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들이 장례를 지내면 되지, 왜 살아있는 사람이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라고 하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천하와 바꿀 수 없는 것이 생명이라고 해놓고는 자기 생명을 던지고, 또 이렇게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이 하라고 하니,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제가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데, 대부분의 영화는 다 잊어버렸습니다만 잊히지 않는 영화가 여러 편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수십 년 전에 일본에서 본 스웨덴의 베르히만 감독이 만든 영화입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 이삭뽀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의학을 전공해서 스물여덟 살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일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세상을 가장 불행하지 않게 사는 방법은 사람을 안 만나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남의 욕이나 하고 가십이나 하고 헐뜯게 되는 게 다반산데, 그럴 바에야 뭐 하러 만날 것인가? 그리고 서로 알게 되면 누구 아느냐 묻고, 아 그 사람 잘 안다 하면서 그 사람 성격이 고약하고 이렇고 저렇고, 그따위 소리나 하고 그렇게 사람들 만나서 무엇 할 것인가? 그래서 사람을 아예 안 만나는 것이 제일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서, 이 사람은 완전히 의학 연구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다가 오십 년 세월이 지나서 나이가 일흔여덟 살이 되었는데, 78세 되던 때에 그의 학문이 높이 평가받아서 스웨덴에서 제일 명예스러운 명예박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머리에 비단으로 만든 실크 모자를 씌어주는 것이 스웨덴에서는 최고의 명예입니다. 그것을 이 사람이 받게 되었습니다. 실크 모자를 받으러 가기 전날 밤에, 자기는 참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아주 즐거운 맘으로 자리에 누웠는데, 밤에 꿈을 꿉니다. 이때부터 베르히만의 영화는 화면이 없어지고 나레이션만 쫘악 나옵니다. 이 사람이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가는데 거리가 아주 컴컴합니다. 이렇듯 컴컴한 거리를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몇 시나 되었는지가 궁금해서 길거리의 큰 시계를 보는데 이 시계에 바늘이 없습니다. 몇 시인지 몇 초인지 알 수가 없어요. 저 시계가 고장 났구나 생각하면서, 자기한테 있던 시계를 꺼내보았더니 그 시계에도 바늘이 없습니다. 바늘 없는 시계를 보며 걷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힙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넘어지는데 부딪힌 사람이 갑자기 검은 액체로 화해서 흘러가버립니다. 몇 발작 걸으니 저쪽에서 시체를 실은 영구차가 옵니다. 영구차가 오다가 큰 나무에 탁 부딪혀서 관이 떨어지고 관 뚜껑이 열리면서 시체가 떨어져 나옵니다. 엉겹결에 자기 손으로 잡습니다. 그는 끔찍스러워 하면서 시체의 얼굴을 보는데, 바로 자기 얼굴입니다.

이런 꿈을 꾸고 깹니다. 깨니까 새벽 3시쯤 되었습니다. 꿈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나서 조반을 먹습니다. 그에게는 자기 아들과 이혼한 며느리가 있는데 그녀만 데리고 삽니다. 실크 모자를 받으러 가는 차에 며느리를 데리고 갑니다. 이 며느리가 차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님, 곁에서 아버님의 생활을 지켜보면, 정열적으로 바쁘게 한 초를 아끼면서 사시는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아버님의 관심 속에는 아버님만 있을 뿐, 다른 사람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이기주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서 베르히만이 무엇을 말하려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르히만은 자신이 본 현대인을 그렇게 그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영화를 오십대 때 보았으니까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헌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이삭뽀하고는 정 반대로 산 사람입니다. 첫째로 이삭뽀는 사람을 싫어하고 사람 만나는 것을 꺼리고 혼자 살았습니다만, 나는 사람이 좋아서 어디서든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왔으니 이삭뽀하고 반대가 아니냐? 그런데 과연 그런가?

소위 여러해 전에 유행하던 언어,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 물결 속에 밀려다니며 살지만은 사람들은 이런 군중 속에서 홀로 고독하게 사는 존재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과연 내 곁에 누가 있느냐? 내가 그처럼 사랑하고 가까이 한 그 사람들이 과연 누구들이냐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나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시간에 대해서 굉장히 엄격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아마 제 주례를 받은 사람이 있을 겁니다. 제가 주례를 한 중에 예식에 1분도 늦게 한 적이 없습니다. 신랑 신부가 정각에 나타나면 난 가버리는 사람입니다. 한국일보에 한번은 “주례하다가 도망치는 목사” 하고 기사가 나왔습니다. 시간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면 결혼식 하지 말라 그겁니다. 미국에 있을 때 워싱턴에서 목회를 했는데, 사람들이 도무지 제 시간에 안 옵니다. 그래서 시간이 되면 저 혼자서 기도하고, 혼자서 찬송했습니다. 그렇게 엄격하게 1분, 10분을 따지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수첩에 스케줄이 꽉 채워져 있는 채로 살았습니다. 근데 내 시계 바늘이 도대체 있긴 있었던 건가? 무척 바쁜 속에서 살았지만, 쳇바퀴 속에 집어넣은 다람쥐처럼 굉장히 분주하게 돌아가지만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도는 생활이었습니다.

요사이 살아온 이야기를 가지고 책을 한 권 쓰는데, 80년도, 90년도 초까지는 스케줄을 적은 수첩이 없어서 그냥 94년도에 무엇을 했었지, 95년도에 뭘 했나 회상해보면 생각나는 것이 두세 가지밖에 없어요. 그렇게 바쁘게 살았는데 말입니다. 과연 내 시계는 바늘이 있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삭뽀는 박사학위증을 받고 실크 모자를 머리에 쓰는 곳으로 가지만, 자기를 향해 오는 것은 사실은 영구차입니다. 그 영구차에서 떨어지는 시체가 자기 얼굴입니다. 사실은 내가 지금 실크 모자를 받으러 가는 그런 기쁜 생활을 사는 것 같지만, 나를 향해 오는 것은 영구차 속의 시체입니다. 이삭뽀의 얘기는 바로 내 얘기인 것입니다. 베르히만이 이 작품을 쓸 때에는 나나 그 영화에 나오는 이삭뽀란 사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결국 현대의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렇게 그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분주하게 살아 박사학위도 받고 실크 모자도 받지만, 며느리 눈에 비친 시아버지는 철두철미 자기만을 위해 산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염두에 두지 않고, 내가 어떻게 되는가만 생각한 사람입니다. 얼른 보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도 교회를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국내뿐 아니라 세계에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분주히 돌아다녔습니다. 근데 그게 정말 남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그래서 나를 희생하면서 산 것이 분명한가 묻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믿으면 살리라.” 하는 성서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태초에 카오스 속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한 분입니다. 창조한 천지만물이란은 엄청난 것입니다. 천억 개의 별이 모여서 한 은하를 만드는데, 우주에는 그런 은하가 천억 개 이상이라니까 상상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그것과는 정반대로 우리 몸속에는 육십조, 칠십조 개의 세포가 있습니다. 그 속에 있는 유전인자 그것까지 다 질서정연하게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너무 거룩하고 높은 분이어서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아빠 하고 친근하게 불렀으므로, 우리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기도도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누구냐? 어마어마하게 숫자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이 우주를 창조하고, 내 몸 속의 세포 하나하나를 다 만드시고, 그것을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게 하는 바로 그분이 누구냐? 이것을 나는 10년 전부터 집중적으로 생각해옵니다만, 결국 미스터리입니다. 신비라 그 말입니다.

그럼 신비란 말은 그럼 모르겠다는 말이냐?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박사는 그 신비는 사랑의 신비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곧 사랑인데 그 사랑 자체가 신비라고 합니다. 그 사랑 자체가 신비인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세포까지 들여다보는 그 신비한 사랑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났다. 한 비천한 육신의 몸으로 태어났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태어나도 지극히 작은 식민지 베들레헴 말구유에 태어났다.

그런데 바로 그분이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왜 서른세 살에 십자가에 내어주었느냐? 그분은 생명을 말할 적에 “자기 목숨을 아끼는 자는 그 목숨을 잃을 것이요, 목숨을 사랑을 위해서 던지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 했어요. 그런 패러독스를 얘기했어요. 바로 예수는 그 패러독스를 실지로 자기 몸으로 실천한 분이지요. 그러니까 사랑 때문에, 모든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그분은 젊은 육체를 십자가에 내어주고 붉은 피를 쏟아 버립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생겼느냐? 부활이 생겼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지 않으면서 부활을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뭐냐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진짜 사랑입니다. 신비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죽음을 정복해버렸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한 예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승천했단 말은 없어졌단 말입니다. 저 어느 별나라에 갔단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까?

갈라디아서 2장 19절, 21절은 정말 사도바울이 기가 막힌 얘기를 합니다. 나를, 내 목숨은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나는 이미 죽었단 말이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있다. 내 육체는 살아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 죽은 나의 속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계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아있는 것이다. 이 사도바울의 말을 우리가 정말로 믿느냐? 정말 죄 많은 나, 실크 모자를 받은 성공한 사람 같지만 결국 영구차에서 떨어지는 시체인 나, 이러한 나에게 그분이 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컴컴한 길을 터벅터벅 외롭게 걸어가는 고독한 너 곁에서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 세상 끝날까지 나는 너와 항상 함께 있겠다.” 그 말입니다.
길에서 툭 부딪히자 와르르 무너지고 검은 피가 흘러버리는 그 모습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인간 해체를 보여줍니다. 그 해체는 어느 시대에도 있었지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오래 살면서 살 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만, 요사이처럼 사람이 완전히 해체되어가는 그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로또 광풍 보세요. 그 복권을 뽑겠다고 온 사회가 난리를 치니, 이거 인간이 해체되어 버린 겁니다.

저도 지식인 축에 들어가는데, 몇 년 전에 텔레비전을 보면서 생애 처음 들어본 말이 있어요. 요새 우리나라에 인격장애증 환자가 많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나는 정신장애증이란 말은 들었지만, 인격장애증이란 말은 처음 들었어요. 근데 인격장애증 환자가 40퍼센트 이상이라고 해요. 이건 뭐냐? 인간은 인간인데 인격에 장애가 생겨버린 인간이라는 겁니다. 과연 40 퍼센트만 되겠느냐? 그러나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쫘악 흘러가는 검은 피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붉은 피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떨어지는 이 땅 위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아니겠느냐? 그건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사건이 아니라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서울거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입니다.

내손을 잡아줄 사람은 나뿐인데, 그 나는 시체가 된 나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나에게 와서, 이런 해체되어버린 인간에게 와서 손을 잡아주시는 그분의 손길, 그것을 내가 살아서 현재 체험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살아라 하며 내 손을 잡아주는 그분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이 우리의 구주라는 것을 우리 삶 속에서 느끼며 사는 것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은 오늘 이 순간의 사건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자기 모습을 살펴서, 살아 있기는 하나 실상은 죽은 자가 아닌가, 나의 시계는 바늘이 없는 시계가 아닌가, 나의 손을 만져주는 나는 바로 죽은 시체가 아닌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때에, 내 손이 아닌 다른 손, 바로 십자가에 못박힌, 못 자국이 그대로 있는, 도마를 만져주던 그 손이 나를 만져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숨쉬고 있는 이 시간의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인격적인 공동체가 되어버리는, 동일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있다는 것, 나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그분을 정말로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4장 16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의 뜻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살아납니다. 내 육체는 날이 갈수록 늙어가고 쇠잔해가지만, 그러나 내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날이 갈수록 새로워지고 활기가 있게 된다는 것, 그것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우리는 사실 이삭뽀가 맞아요. 사람을 만나고 나면 뭔가 골치 아파요. 좋은 이야기가 뭐 있나요? 세상에서 아는 사람 없는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에요. 근데 그게 사람 사는 거냐? 그건 바로 며느리가 말한 것처럼 자기 하나밖에 모르는 삶이지요. 저는 여러분에게 진실한 고백을 하나 하면, 제가 제일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불공평하게 대해올 때이죠. 저놈의 자식, 내가 중학교 때부터 저에게 어떻게 해주었는데 저가 내게 이럴 수 있어? 그럼 화가 치밀지요. 그럴 때 내가 믿는 주님께 내가 한 일은 과연 뭘까? 나는 정말 그분의 사랑에 얼마나 응답을 하며 살았는가?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나는 네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너는 살아야 한다. 그 주님의 음성을 생각하면, 그까짓 일을 가지고 분개하고 섭섭해 하는 것, 참 우스운 일입니다.

전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솔직하게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얼마나 믿음이 부족한 사람인 줄 압니다. 제가 믿음이 있다면 주님께 받은 은총이 얼마나 큰지 깨달아야 하는데 그걸 못 깨달았기 때문에, 내가 내 이웃에, 형제에게 베풀어준 일을 가지고 섭섭해 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이것이 정직하게 요사이 나의 생활입니다.

우리는 정말 살맛이 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신문을 보고 방송을 듣고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 정보들이 뭡니까? 바로 이삭뽀의 현실 같은 것 아닙니까? 소음만이 들리고 파괴적인 미움만이 들려져 나오고 욕심들만이 흘러나오는 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러한 정보의 흐리고 탁한 홍수 속에, 그 속에 이미 생명의 산파가 솟아올라오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사건 속에서 봅니다. 수가의 우물가에서 “내가 주는 물은 생명의 물이다.” 하시던 그 물을 마시고 또 일어나 살아가는 것,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이 아니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게 한번 “살아라”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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