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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있는 믿음 / 마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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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믿음> 마16:13-20
새문안교회 2003. 3. 9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의 시점까지의 예수님의 사역은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한 예수님의 1단계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권위 있는 말씀을 전하시며 귀신을 내쫓으시고 병든 이들을 고치실 뿐 아니라 몇 덩어리의 떡과 두어 마리의 생선으로 수천 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두 번씩이나 행하시는 등 예수님의 갈릴리 복음사역은 그 절정에 달했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은 갈릴리 전역뿐 아니라 인근 지방과 예루살렘에까지 퍼져서 이제 예수님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가라앉히시며 물 위를 걸으시는 놀라운 광경도 가까이에서 목격했습니다. 그 정도가 되었으면 이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이해와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한번 확인해보실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께서 모처럼 제자들하고만 조용한 시간을 갖게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이 보다 더 간결하고 정확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그가 메시아 곧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구원자,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그 구원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그가 우리 모든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과의 유일독특한 관계 속에 계신 분이심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그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라는 말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함께 예수님에게 붙여질 때 의미하는 바는 오직 예수님만이 이 세상의 구원자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서 튀어나온 이 놀라운 지식과 믿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만족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짤막한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예수님께서 엄청난 약속으로 응답하신 것으로 보아서도 베드로의 대답이 얼마나 훌륭했고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말씀 속에는 우리가 그 의미를 잘 되새겨야 할 것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먼저 "바요나 시몬아" 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바"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요나" 하면 "요나의 아들"이 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시몬은 요나의 아들이 아니라 요한의 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바요나"는 "요한의 아들"이라는 말을 헬라어식으로 압축한 표기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요1:42에 보면 안드레가 그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소개시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숫가에서 고기 잡고 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실 때에도 "요한의 아들 시몬아"(요21:15)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시몬아" 하지 않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하고 부르신 것은 그만큼 그 이름을 부르시며 하신 말씀에 진지성과 무게를 더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부르신 다음에 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신 것입니다.

왜 하필 "네가 복이 있도다" 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 잘 맞추었다", "너 참 잘 알아들었구나", "너 아주 똑똑하다" 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신 것은 범상치 않은 말씀이고 따라서 우리가 그 의미를 깊이 새겨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바로 알았다는 것은 퀴즈대회에 나가서 문제 하나 잘 풀었다고 칭찬 받고 그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가져도 예수 그리스도 바로 알지 못하면 불행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식 별로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 바로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른 질문에 잘 대답했을 때에 "네가 복이 있도다" 말하면 어색하게 들릴지 몰라도, 예수님이 누구시냐는 물음에 잘 대답했을 때에는 그야말로 "네가 복이 있도다" 라는 말이 가장 적합한 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신 물으심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대답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복이 있도다" 말씀하신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이어서 하신 말씀 속에서 찾습니다. 먼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하신 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지식을 갖게 된 사람이 그저 어쩌다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그 생명의 진리의 계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른 지식들은 누구나 가질 수 있고 책을 많이 보거나 인터넷으로 검색을 많이 해서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이들에게만 주시는 믿음의 지식입니다. 다른 지식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지만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믿음을 가진 이들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복이 있도다" 말씀하신 이유는 또 있습니다. 본문 18절을 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문자대로 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런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공관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처음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물 던지고 있던 베드로에게 오셔서 "나를 따라 오라 너는 이제 물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삶이 완전히 변하게 될 것을 예고하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1:42) 말씀하심으로써 역시 베드로의 삶의 변화를 예고하셨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그 이름을 가진 이의 존재와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바"는 헬라어로 번역하면 "베드로"로서 바위 또는 반석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의 고백을 하자 그와의 만남의 초기에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셨던 그 예고대로 그 사실을 확인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너는 베드로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젠 됐다. 과연 베드로라 할 만 하다. 이제 네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가 주님의 교회의 초석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런데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신 말씀은 인간 베드로 개인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첫째는,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된 베드로에게 그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하신 18절 말씀에 이어 19절에서 하신 말씀 즉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신 말씀은 베드로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에게도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18:18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복수로 부름)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신 말씀은 주님의 교회는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이 가졌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믿음의 반석 위에 서는 것임을 가르치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은 베드로가 고백한 그 믿음 위에 서있는 교회의 견고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음부의 권세"라고 번역된 부분은 다른 곳에서는 "음부의 문들"로 되어있습니다. 성문들은 튼튼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사탄의 세력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바른 믿음 위에 선 교회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도 그러한 믿음을 가진 신자들은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9절 말씀은 베드로가 주님으로부터 "네가 복이 있도다" 하는 말씀을 들을 또 하나의 이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천국열쇠를 받는다는 것 또한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런데 천국 열쇠를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 설명은 뒤따르는 말씀이 해줍니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입니다. 열쇠라는 것은 어떤 문을 통하여 사람을 들어가게도 하고 들어가지 못하게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쇠는 권위의 행사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유대교를 그 배경에 두고 보아야 합니다. 당대의 율법사들은 그들의 율법해석으로 사람들의 행동과 삶을 얼마나 규제했는지 모릅니다. 마23:13에 보면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비난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횡포에 짓눌려있던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으로 율법의 멍에에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주어진 진리만이 유일한 참 믿음과 구원의 규범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의 판단과 구원의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할 것을 오늘 본문이 요구하고 있다는 데에 유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은 결코 베드로 자신이나 베드로의 계승자로 자칭하는 로마천주교의 교황에게 사죄와 구원의 권리가 위임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시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를 제자들 외의 사람들에게는 비밀에 붙이려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당대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메시아는 정치적 의미의 메시야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사방에 다니며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알리면 백성들 가운데는 그를 왕으로 옹립하거나 그를 중심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로마의 통치에 맞서 유혈투쟁을 벌이려 들 움직임이 일어날 것을 예수님께서는 우려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달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메시야의 사역을 조용히 감당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사람들에게 아직은 알리지 않으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로 하여금 기독교 되게 하는 가장 핵심적 믿음이고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것을 믿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무슨 다른 복을 얻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 믿음을 얻은 것, 그 믿음을 가지도록 은혜로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가장 큰 복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란 그 믿음 위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그 진리 위에 서있는 것이며 그 어떤 세상의 지식이나 인간적 요소들 위에 서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 안에서 자유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그 어떤 인간적 사고나 수단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서도 안 되고, 그 어떤 다른 법이나 힘으로 사람을 구속하거나 억압하려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시는 물으심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나 이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상관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우리 모두 주님의 이 물으심에 올바로 응답하는 복 있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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