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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실하십시오 / 요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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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5:5 
제목 : 진실하십시오
설교 :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우리 모두 한 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시절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후에도 누구의 표현처럼 교인들의 “위선행위를 탐지하는 안테나”를 세우고 다녔습니다.

특히 원치 않는 교회 출석을 시작하게 된 경우는 더욱 안테나를 높이 세웠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위선을 발견하기만 하면 교회 출석을 거부할 수 있는 구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마음 놓고 기독교를 반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선과 기회주의, 기만의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을 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 가운데 그런 눈초리로 옆에 앉아있는 사람을살피는 분은 없습니까? 하여간 털끝만한 위선의 냄새라도 감지하면 신속히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하고 교회당에 발을 디딘분은 없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공정한 눈으로 교회를 둘러보게 되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분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교회에는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진실하지 못하면 믿음을 갖기 위해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라고 속으로 우리를 향해서 말하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쉽게 신앙을 고백하면서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나름대로 생각은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알고 있는 신앙인들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일관성을 보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함께 하려고 나서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좋은 소식을 나누기 전에 먼저 자신이 좋은 소식이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주님의 말씀도 동일한 사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 15:5)

그러면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첫 번째 해야 할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길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면, 만나자 마자 여러분이 믿는 믿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특히 여러분을 알고 있는 이웃이나 친구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입을 열자마자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서 세상의 소금으로 역할을 다 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짠 맛을 확인해야 합니다. 밝기를 확인해야 합니다. 전염성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그 병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주위 사람들에게 확신시켜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삶을 먼저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을 가지는 것이 별로 급한 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조차 우리처럼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여러분이 답하기 전에 이웃 사람들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십시오. “주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이 받는 인상은 어떻습니까? 하고 한번 물어보면 과연 그들은 무엇이라고 답할까요? 우리가 인정하고 싶은 것보다 훨씬 더 자주 부정적인 대답을 할지 모겠습니다.

“글쎄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위에 몇 명 있지요, 글쎄요, 좀 형식적이고 대체로 마음이 좁아 보입니다. 아시죠? 어떤 사람은 정말 융통성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 같아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만나지 않아요, 자기들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더 심각한 대답도 나올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잘 다니는 사람들을 알고 있어요, 아마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는 분들 같은데요, 하지만 그들을 만나보면 답답해요, 게다가 함께 가까이 하면 비난받는 느낌까지 받아요, 그들은 너무 지나치게 독선적이라구요”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말이예요? 그들은 너무 단순해요, 인생의 복잡한 문제들을 너무 쉽게 생각해요, 케케묵은 대답을 성경에서 찾아낸다구요, 어떤 때는 생각이 모자란 사람들이 아닌가 보이기도 하고 아주 위선자들 같이 보이기도 해요, 하여간 성가신 존재들이죠”

이런 반응은 여러분이 직접 알아봐도 크게 차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흥미롭기도 하지만 실망스러운 사실은 믿지 않는 사람 가운데 크리스챤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듣고 싶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요? 도덕적으로 본받을만한 성실한 사람들이지요, 다른 사람들 불쌍히 여길 줄 알고 친절하고 베풀 줄 아는 사람들이지요, 진실을 말하고 행동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지요,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사람들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보다 우리는 더 나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받는 인상가지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말것인지를 저울질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평가보다는 훨씬 더 나은 평가를 반드시 받아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미지는 모든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소금과 빛이 되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 때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그 분을 믿고 따르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과 태도가 사람들에게 아주 큰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도울 수도 있고 더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말것인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인상을 주고 있는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를 지켜보는 이웃들에게 영생의 길을 보여줄 수도 있고 그 길을 막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진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들을 벼랑끝으로 내어 몰고 있습니까?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영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간디는 한때 사우스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영적으로 심각한 갈급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백인 교회는 피부색이 검은 인도인들에 대해서 그 지역에서 하급생활을 하고 있던 인도인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간디는 뒤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은 기독교인 자신들이라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 먼저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믿는 진리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 것입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물어보십시오. 보통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제일만이 거론하는 것이 부정직함이나 진실치 못함일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 싫어요”. “약속을 하고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정말 싫습니다. 마음속에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할 때 참을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물어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매력 있는 특성이 무엇인지 질문해 보십시오. 정직함, 순수함, 진실함이 앞자리에 나올 것입니다.

“아시잖아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정말 존경스러워요” “설사 인기가 떨어지더라도 진실하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을 높이 평가해요” “자신의 실수를 숨김없이 고백하는 사람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보 노무현을 대통령 노무현으로 만들었습니다.

누구나 진실한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정상적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여러분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가 지금부터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 길은 비록 힘든 길이지만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진실하게 살 수 있을까요? 그 첫 째 단계는 진실한 자아상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냐 하는 그림을 진실하게 그리는 것입니다. 흔히들 교회라고 하면 독단적인 교리로 뭉쳐진 집단이라고 생각 하곤 합니다. 아무런 논의도 허용되지 않는 집단으로 오해합니다. 사람들을 같은 틀에 집어넣고 압력을 가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풀빵을 찍어내는 공장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교회는 정반대입니다. 그런 면에서 군화를 발에 맞추는 군대와는 아주 다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등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결코 모든 사람을 한 틀에 찍어내는 공장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분을 따르기 위해서 여러분의 정체성을 포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분이 원래 설계하셨던 그대로 여러분들을 쓰시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떤 사람으로 만드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어떤 재능을 주셨는지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분별하도록 노력하고 그 부르심을 따라서 행동 하십시오.

진실한 자아상을 가지는 것은 왜 중요합니까? 원래 우리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 지어진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여러분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됨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 그런 조크를 남겼지요, “못 생겨서 미안 합니다”라고. 영향력 있는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여러분의 모습에 대해 더 이상 미안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개성을 부정하려 들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날 때부터 성격이 화끈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서 제발 조용하게 살라고 주문하는 것을 옳지 않습니다. 타고난 열정을 억압하거나 부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기질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만화경 속에는 모든 재능과 기질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별나게 정이 많은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아무리 급한 일을 시켜놓아도 가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또 이야기를 해야만 됩니다. 절대 달려가는 법이 없습니다. 온갖 이야기 다 해야 사람 사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험을 즐기는 타고난 본성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얌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주문은 너무 혹독한 것입니다. 혹은 고독 속에서 발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억지로 무리 가운데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꼭 여러분과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꼭 여러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여러분 됨을 보고 여러분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그려갈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래 전에 대전의 어느 교회에 집회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집회가 후반으로 접어들 때쯤이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아주 기뻐하면서 말했습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 평소에 당신의 주일 설교에서 은혜를 못 받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은혜를 받는다고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일반적인 사람들은 당신의 주일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니까 집회에는 평소 당신의 사정권밖에 있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니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평소에 담임목사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특별 집회에서 은사를 받는다고 담임목사님이 감사하니까 나도 쓰일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무도 다른 사람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흉내 내어서 제대로 은혜를 끼칠 수 없습니다. 시편 139편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묘막측하게 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놀랍고 훌륭하게” 지으셨습니다. 여러분의 독특함을 드러낼 때 여러분은 영향력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긴 모습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타고난 기질에 대해서도 절대 여러분 평가절하하지 마십시오. 어젠가 그젠가 제 가까이 있는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둘째아들 녀석이 꼭 제 엄마를 닮아가지고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길레 제가 물었어요. 당신지금 누구 작품에 대해서 평가 절하하느냐고. 우린 다 하나님의 작품이잖아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무궁한 지혜로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빚어서 만들었는데 그렇게 함부로 평가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독특함을 드러낼 때에 여러분은 영향력 있는 삶을 살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넘쳐날 것입니다.

진실한 삶,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두 번째로, 여러분의 감정에 충실하십시오.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또 하나의 자석과 같은 강력한 힘은 감정적으로 진실한 삶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신자들은 이 점을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억압하려고 듭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결코 화를 내거나 슬픔을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상처를 받거나 슬퍼하는 것은 믿음이 적거나 천박한 성품의 증거라고 잘못 가르치기도 합니다. 애써 고통 중에도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하고 그것이 영적 성숙의 척도라고 여깁니다. 어떤 상황 속에도 “하나님을 찬양 합시다”라고 권합니다.

그럴 때 두 가지 잘못된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 첫 번째는 “정서의 혼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감정이 밀려오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릅니다. 너무 오랫동안 감정을 속여 왔기 때문에 속수무책인 상태가 되고 맙니다. 그 상태를 벗어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때로는 상담을 받아야 됩니다.

또 하나의 치명적인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우리가 진실하지 못하면 금방 혐오를 느끼고 물러선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부부가 아이를 낳았는데 죽었습니다. 그런 현장에서 눈물 한 방울 보이지도 않고 상투적인 말로 “어쨌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게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슬퍼해야 마땅해, 뭔가 크게 잘못됐어, 나는 이런 신앙을 가지고 싶진 않아, 신앙이고 뭐고 이런 때는 슬퍼해야 마땅해”라고 생각하면서 물러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십시오.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는 우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소리를 내어 우셨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진솔한 감정 표현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그를 사랑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와 같은 사건 당하면, 그것도 당사자라면 슬퍼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어떤 비극 앞에서도 슬픈 표정도 없이 범사에 감사한다고만 되뇌이면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종교를 멀리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정에 충실하십시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눈과 미소 띤 석고상이 되어버린 모습으로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여러분에게서 보아야 할 것은 두려움, 슬픔, 분노, 질투, 상실감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을 때 오히려마음을 열고 다가섭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숨기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우리의 진솔한 감정표현을 이웃들에게 보여주십시오. 감정은 중요한 것입니다. 없이하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신앙가운데서 승화시켜 가십시오.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자신도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유교적인 환경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공자의 가르침이고 무엇이 예수의 가르침인지 구별을 못합니다. 그래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것이 아니라 공자가 죽어야 교회가 바로 될 것 같습니다. 공자는 군자의 도를 가르치면서 군자는 얼굴에 희로애락을 그대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건 소인배의 짓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런 표정을 지어야 될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우시기도 하셨고 불의한 현실 앞에서 상과 의자를 뒤집어 엎기도 하셨던 분인 것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로 묻습니다. 진실한 삶,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실수에 대해서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어려운 상황을 만나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은 실수를 감추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이제 신앙생활을 막 시작한 어떤 사장이 회사에 20여명의 크리스천을 고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치 매와 같은 눈으로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양심적이고 상냥하고 일에 몰두하는 크리스천 일꾼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끌렸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감동적인 일이 있었어요. 갓 개종한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일이 끝난 후에 만나 줄 수 있는지 물어왔어요. 만날 수 있다고 했죠. 그런데 대답을 해놓고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그 젊고 신앙에 열심인 사람이 나를 개종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염려 되었어요

그가 머리를 숙이고 사무실에 들어와 이런 말을 할 때 놀랐어요, ‘사장님, 몇 분이면 됩니다. 용서를 구하려 왔어요. 저는 여러 해 동안 사장님을 위해 일해 왔습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몇몇 회사의 생산품을 가져다 쓰는 등 다른 사원들이 하는 것처럼 나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급해주는 물품 가운데서 남는 것이 있으면 적당히 제가 사용했었습니다. 회사에서 제 마음대로 제 개인적인 전화를 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몇 개월 전에 저는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이제 순종하게 되었고 제가 행한 잘못을 사장님과 회사 앞에서 바로잡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제 행동의 대가로 저를 해고시키셔도 됩니다. 그대로 순복하겠습니다. 그럴 만도 하죠. 아니면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는 만큼 감봉하셔도 좋습니다. 하나님과 사장님 앞에서 그저 일을 바로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이러한 진실함입니다. 이런 고백을 들은 사장은 깊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 밤에 건설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로마의 제국을 복음으로 정복한 것도 이러한 진실성 때문입니다. 다만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솔직하고도 겸허한 고백이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그저 꾸밈없는 진실한 고백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어떤 잘못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세상에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불리하면 도망치고 잡히면 모른다고 하며 오리발을 내밀면서 돈으로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는 세상 속에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 될 것입니다.

엄청난 과실을 범하고도 무조건 발뺌하는 세상에서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감화만이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잘못을 고백함으로서 누리는 해방감을 여러분은 맛보셔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잃게 될지라도 진실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손해 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강력한 도구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진솔한 사과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아직도 사람 살만한 곳으로 남아 있도록 지탱하는 힘은 바로 이런데서 나옵니다. 그 때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감명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고백해야 할 무언인가가 없습니까?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모르기를 바라고 계속 덮어 버리려고 하는 뭔가가 여러분의 삶에는 없습니까?
어쩌면 성령님은 여러분에게 말씀 하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실해지고 사람들과 관계에서 바로 잡으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을 도 있습니다.”

아무도 여러분이 신앙인이라고 해서 완벽해지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실수를 고백하고 그것을 바로 잡는 용기가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겸손과 참회, 심지어는 책임 있는 배상을 보고 싶어 합니다. 진지하게 삶을 사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누군가 역할 모델이 되어야만 합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배상하려 들지 않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주님이 보여주셨던 것처럼 어떤 것이 바른 삶인지를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처형과정을 지켜본 백부장은 소리쳤습니다. “분명히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 이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고백을 하게 했습니까?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오르시면서 수없이 쓰러진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군중들의 조롱거리가 되신 모든 현장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세상의 구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동시에 어머니를 걱정하면서 미래를 부탁하실 때, 뉘우치는 강도에게 아량을 베푸실 때 그 목소리를 현장에서 들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당당하게 말씀하시던 주님,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실 때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로마군대 조직의 근간을 이루는 백부장으로서 그 모든 희생과 자신의 임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철저한 헌신, 거기에 감동했던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포기하는 일에 자원하는 모습이 그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로마의 백부장들의 헌신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거리가 될만큼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고 있는 주님에게 감동하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자신의 깊은 곳에서부터 소리쳤습니다. “분명히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태신자들은 나약한 신앙인들에게 별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따라서 살고 있는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두려워 말고 진실해지기로 결단하십시오.그때 여러분은 여러분과 함께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적당히 타협해 버리는 성도들을 통해서는 강력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 나타나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타협해 버리고 꽁무니를 감추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진실하게 결단하는, 댓가를 지불하겠다는 생명이라도 지불하겠다는 각오로 나오면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 보여 주실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끼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보고 사람들은 새로운 길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학교에서 직업전선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신실하고 담대하게 살아갑시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진실한 신앙인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진실하십시오. 신실한 모습으로 살아가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나님께서 본래 만들어 주신 대로 살아갑시다. 감정적으로 진실하십시오. 미소 띤 석고상이 아니라 일희일비하는 진솔한 모습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혹 살다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 보십시오.

담대하게 우리가 믿는 것을 위해서 싸워갑시다. 백부장처럼 용기 있는 고백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갑시다. 체면치레에 얽매이지 말고 믿음을 나타내고 믿음대로 살아갑시다. 그것이 신앙인의 힘이고 매력이며 신실한 크리스천의 삶이 가지는 잠재력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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