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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의 정상에 오르는 체험 / 막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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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조세제 목사
⊙ 설교제목 : 변화의 정상에 오르는 체험 / 막9: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한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여러분들 교회력이라고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주보에도 주현절 마지막 주일 예수 변모일이라고 적혀있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회력이란 교회가 움직여 가는 것이 일년동안 예수님의 생애를 축소하여서, 그분의 한 생애의 써클(circle)과 같이 일년동안의 교회의 절기와 행사들을 통하여 신앙적인 흐름을 우리에게 정해 놓은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절에서 출발하여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신 주현절 기간을 지나, 올해에는 3월 5일에 해당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부터 40일동안 이어지는 가운데,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사역과 은혜를 기억하며 명상하는 사순절이 이어집니다. 그 사순절의 절정이 고난주간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고 약속하셔서 주님의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두려움과 걱정속에서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하심을 받게 됩니다. 그 성령의 임하심을 기억하는 것이 성령강림절입니다. 그 이후에 오순절 기간이 계속 되어져서 성령강림이후에 은혜의 시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교회의 역사가 이어지는 오순절이 연말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교회력으로 마지막으로 추수감사주일이 있고 그 절기가 되면 일년이 마무리 되고 주님이 오심을 바라는 대강절이 이어지고 그리고 성탄절을 맞게 됩니다.

  이 한 주기가 소위 교회속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절기과 영적인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흐름을,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신앙생활을 하셔야 여러분의 신앙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위치하는 이 주일은 사순절, 예수님의 고난과 아픔이 시작되기 직전의 주일입니다. 이 주일은 주현절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하지만 또 특별한 이름이 있는 주일인데, 주님의 변모주일, 변화주일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도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과 함께 지나 가시다가 어느 산 기슭에 이르러 다른 제자들은 모두 그 산 아래에 머물게 하고 특별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위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마 조용히 기도하라 말씀하시고 예수님도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가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밤중에 갑자기 이 제자들이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데, 예수님 모습이 점점 변화되며, 놀라운 광채를 발하며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들을 제자들이 직접 보게 됩니다.

  그 변화가 오늘 본문에 잘 표현되어 있는 데, 그 첫번째가 3절을 보시면 잘 나와있습니다. 우리 다함께 읽겠습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어졌더라" 이것은 아마 예수님의 거룩하심, 예수님의 성결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죄없으심을 다시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힘없이 죽으시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자칫 잘못하여 오해할 소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생각하는 바는 모든 병이나 죽음은 죄의 결과이고 죄에서 오는 것이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극형을 당하시며 죽게 되었을 때 주님이 말못할 죄가 있었거나 우리는 모르지만 무슨 죄가 분명히 있었기에 저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시지 않냐고 생각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죄 없으심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데 이사야 53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렇습니다! 그런 우려가 있기에 예수님의 죄없으심, 주님의 성결함, 하나님의 아들로서 깨끗한 그가 그의 죄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때문에, 나의 죄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심을 분명하게 말하는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성결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의 죄, 우리의 죄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값진 은혜를 다시 만나며 믿게 되는 순간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번째 4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나타나 주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을 그들이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긴 하지만 그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아직까지도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적 지도자였던 모세와 영적 지도자였던 엘리야를 잊지 못하고 존경하고 사모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구태여 예수와 비교하여 누구를 존경하며 누가 더 위대하다가 묻거나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들의 생각에 엘리야나 모세가 차지하는 자리는 대단하였을 것입니다. 6절 말씀에 보면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3년동안 함께 따르며 기거하던 예수님이 갑자기 그렇게 무서워진 연유가 있었겠습니까? 엘리야와 모세의 나타남이 그들에게 큰 두려움이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면,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은 열왕기상 16장에 보면, 아합왕 시대에 아합왕과 많은 사람들이 바알신을 섬기게 될 때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이방신을 섬기는 그 때에, 이 엘리야는 단신으로 혼자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지키면서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선지가 400명 앞에서 즉 850명앞에서 용감하게 그들과 대결하는 장면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너희들이 믿는 바알신이나 아세라 신이 더 훌륭한지 내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 내기를 하자!' 목숨을 걸고 내기를 합니다. 각자가 다 송아지를 잡고 각을 떠 제물을 만들고 그 아래에 많은 장작개비를 쌓아 놓고 누구의 제물에 하늘의 불이 먼저 떨어지는 지를 내기하려듯이 기도하고 있을 때, 엘리야는 보란듯이 자기의 제물에 물을 잔뜩 뿌려서 양쪽 고랑에 물이 흥건할 정도로 물을 뿌리고 기도를 시작하는 데 하루종일 간절히 기도할 때, 엘리야가 기도하던 그 제단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 엘리야의 제물에 불이 붙었던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무섭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그 선지자들을 모두 다 목을 베는 무섭고 강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한 엘리야는 그후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능력이 있는 지도자가 지금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모두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더 말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려 할 때, 바로왕과 그들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430년동안 뿌리를 내리고 그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인도하여서 한두 사람이 아닌 남자만 60만명이고, 그들과 관계된 가족까지 포함해서 적어도 120만명 쯤 된다고 추정되어지는 민족을 이끌고 나오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가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들에게 10가지의 재앙을 보입니다.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첫번째의 재앙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물에 던지니 물이 피가 되고, 먹는 식수도 피가 되어 많은 애굽 사람들이 먹을 물이 없어져 허덕이는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몇가지의 재앙은 계속되고 일곱번째 재앙을 보면 하늘에서 우박이 내리는 데 요즘도 간혹 우박이 떨어지면 모든 생물들, 비닐 하우스들이 몽땅 다 쓰러지는 데, 성경에 보면 우박만이 아니라 불을 섞은 불덩이가 땅에 떨어져서 모든 생물들이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도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놓지 않아서 마지막 열번째 재앙을 보면 모든 짐승이나 사람들의 첫번째 태어나는 것들이 모두 죽게 되는 끔찍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자 그들이 비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놓게 됩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광야 40년동안 인도해내는 영도자로서 지도자로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 직전 요단강 강가까지 인도하였던 분이 모세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의 지도력, 그의 영도력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같은 정치력이 있는 사람이 그들의 지도자이기를 바라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위대한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간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미 그들보다 한수 위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찾아와 엘리야와 모세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있어 이것은 인간적으로도 예수님이 엄청난 능력과 힘을 가진 지도자임을 그들 자신이 다시 한번 깨우치는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 지라" 하나님의 아들! 인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처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에게 임하시며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들려졌던 그 장면과 같은 것입니다.

  자 이렇게 보았을 때 예수님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기가 어렸을 때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세례를 받을 때도 하늘에서 그런 소리가 있었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즈음에 새삼스럽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하는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십자가를 앞두고 있는 예수님에게도 자아의식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할 것을 깨우칠 필요가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방황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 그의 죽으심으로 실망해 빠져 있을 그리고 근심과 걱정에 휘몰릴 제자들을 위하여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도 변화되어 그들이 경험하게 될 많은 고난과 실망과 아픔을 이겨나가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 자신에게도 변모와 변화가 필요했지만, 예수를 잃음으로 제자들이 겪게 되는 실망과 아픔을 위하여 그들을 위하여 예수의 변화된 새로운 예수를 다시 경험하고 다시 만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변화됨으로 그 어려움을 그 시험을 극복해 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의 삶속에서 아픔과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에게 더욱 더 변화가 요구됩니다. 오늘 제자들이 산에 올라가 예수님의 성결하심과 거룩하심을 깨닫고 예수의 위대하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그래서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겠다는 것을 새삼 다시 예수를 만나게 되고 아니 예수를 다시 보게 됨으로 자신들의 변화를 얻게 되고 산아래 내려가 그들에게 다가올 고난과 아픔을 이길 수 있게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러하였지만 그 날에 예수님의 변화를 바라보았던 제자들의 첫 번째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제자들의 첫번째 반응은 5절에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는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산 아래에 내려가면 골치 아프고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십자가가 있고 예수가 죽어야 하고 예수가 죽으면 제자들까지도 어려움을 당하여야 하는 뻔한 현실이 있는 산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선생님! 여기가 좋습니다. 여기에서 그냥 삽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자칫 잘못하면 이와 같이 현실 도피하는 유토피아적인 신앙을 추구하게 될 위험성이 우리들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힘은, 신앙생활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나온 것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다시 만나며 나 자신이 변화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산 아래로 내려가 현실을 직면하는 새 힘을 얻으려고 산위에 올라갔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이 자리에 모여서 주님을 새삼 다시 만나며 다시 깨달으며 우리 모두가 변모된 모습으로 삶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구름속에서 소리가 있었습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었입니까? 성경을 다 읽지 않았읍니다만 그 이후에 보면 산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초막 셋을 짓고 삽시다고 하는 베드로의 말에, '그래 여기가 좋다. 나도 내려가기 싫다. 나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기에 있자.'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산 아래로 내려가자. 산 아래에 내려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읽지 않았지만 산아래로 내려가면 많은 사람들이 웅성웅성 대며 모여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면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음모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기다리고 있는 현실이 기다립니다. 그 현실속으로 주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산아래로 내려가는 주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이 사건이 교회력으로서 수난절, 사순절이 시작되기 직전에 있다는 것, 마가복음의 입장도 보면 11장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깊은 뜻이 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예기치 못하는 아픔과 고통들이 있습니다. 좋은 일, 기쁜 일, 행복하고 즐거운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우리앞에 있을 수록, 고난이 다가올 수록, 우리자신은 변모되는 변화되는 믿음의 변화가 우리에게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학생들이 시험을 쳐도 시험의 준비를 합니다. 이 사회에 큰 문제, 큰 어떤 일을 당하게 될 때 그 일을 대비하여 미리 미리 우리가 준비하듯이, 영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우리의 삶에도 고난과 아픔이 예기될때 우리는 스스로 준비해야 합니다.

  스스로 참여정부라 이름을 내걸고 시작되는 이 정부도 개혁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개혁이라고 하는 단어는 새삼스러운 단어가 아닙니다. 역사를 바라보면 로마 정치인들도 개혁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만큼 개혁은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개혁과 변화는 우리에게 아픔과 어려움이 다가올 수록, 우리는 빨리 그리고 깊이 그리고 많이 변화되고 바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의 정치적 현실이나 사회적 현실도 국가의 내외적으로 아주 정치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하여서 유가가 상승되고, 이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는 것이 뻔한 이 현실일수록, 어려움과 힘듬이 우리앞에 다가오면 올수록, 우리는 우리 스스로 변모되어지는 변화되어지는 모습이 아니고는 우리가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변화나 개혁을 말할 때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다른 사람의 변화, 환경의 변화, 세상의 변화를 먼저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정치인들과 사람들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변하기를 바라고, 환경과 제도의 변화를 먼저 꾀하였기에 개혁들이 실패한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지려면 내가 먼저 변화되고 바뀌어지고 개혁되어진 후에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오늘의 이 정치지도자들도, 종교지도자들도 그리고 우리 모두들도 분명히 명심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 앞에 실망하며 두려워할 것이 뻔한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변모된 모습을 드러내 보이며 그리고 변모된 예수님을 다시 만남으로 놀라운 새로움과 변화된 모습으로 산 아래로 내려간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서 오늘 이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우리들도 변화의 정상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변모되며, 변화되는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사회와 교회와 나라와 민족이 놀랍게 개혁될 수 있는, 그 개혁에 앞장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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