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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귀히 쓰이는 일꾼이 되라 / 왕하 2: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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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귀히 쓰이는 일꾼이 되라
본문 : 열왕기하 2: 5-9 
설교 : 황광민 목사 (석교교회)


얼마 전에 미국의 유명한 TV설교자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TV 설교자들은 TV채널을 사서 매스컴으로 설교를 방송하는 목회자들입니다. 인기도 좋습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옳지 못한 일로 온 세계의 이목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음의 이야기는 그 즈음에 나돌던 이야기입니다.

힌두교 사제, 유대교 랍비, 그리고 기독교TV설교자 세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심한 폭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가까운 농가를 찾아가 폭풍을 피해 쉬어 가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의 집은 너무 협소하여 두 사람은 방에서 자고 한 사람은 헛간에서 자야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힌두교 사제가 헛간에서 자겠다고 하여 헛간에 가고 유대교 랍비와 TV설교자가 방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누가 방문을 두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힌두교 사제였습니다. 힌두교 사제는 "미안합니다. 제가 헛간에 가보니 거기에 소가 있는데, 아시다시피 우리 힌두교에서는 소를 신성시 여기고 소를 방해해서는 안되므로 헛간에서 잘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유대교 랍비가 헛간에서 자겠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또 방문을 두드리기에 내다보니 유대교 랍비 였습니다. 유대교 랍비도 "미안합니다. 제가 그곳에서 자려고 했는데 헛간에 돼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유대교에서는 돼지를 불결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곳에서 잘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할 수 없이 기독교 TV 설교자가 헛간에서 자기로 하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방문을 열어보니 그곳에는 소와 돼지가 서 있더랍니다. 이번에는 기독교TV설교자가 피해온 것이 아니라 소와 돼지가 피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의 지도자들, 또 성도들이 깊이 반성하며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모두 다 그렇지는 않지만 기독교인들이 성실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낙심만 할 것이 아니라 빨리 회개하고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은 봉독한 열왕기하 2장 5∼9절의 말씀을 중심 하여 <귀히 쓰이는 일꾼이 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겠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엘리야가 승천하면서 새로운 선지자인 엘리사를 세우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습니다. 성경에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려진 분이 세 분 있습니다. 에녹과 엘리야와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이는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아무튼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엘리사를 시험하면서 자신을 대신하는 선지자로 세웠습니다. 오늘의 이 이야기 속에 나타난 참 귀하게 쓰이는 지도자의 비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으로 생명의 양식을 삼고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육체의 안일을 초월해야 합니다.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려면 육체의 안일을 초월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길갈에서 출발하여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으로 옮겨가며 세 번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 머물라"고 하였습니다. 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이런 말씀이 4절에도 있고, 6절에도 있습니다. 여기서 엘리야가 세 번씩이나 "너는 여기 머물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의 안일을 초월하는지를 보려는 시험이었습니다. 즉 육체의 안일을 초월해야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엘리사의 답변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엘리야가 세 번 "너는 여기 머물라"고 하였을 때 엘리사는 한결같이 대답하기를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육체의 안일에 빠지지 않고 스승과 함께 하는 사명자의 길을 끝까지 걸었습니다. 이것이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의 자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모세의 이야기는 아름답습니다. 23-25절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바로의 공주 아들이라 불림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이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아멘. 모세가 동족의 고통을 보고도 눈을 감고 못 본 체 하였더라면 공주의 아들로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육체의 안일을 초월하여 동족을 위해, 동족과 함께 고난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이것이 귀히 쓰임 받는 비결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을 되려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여리고에서도 왔었고 그때마다 엘리사는 잠잠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엘리사는 선생의 종말을 걱정하는 생도들에게 잠잠하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선생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생도들의 동요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존경하는 큰 스승을 잃는 슬픔은 매우 크고 큰 충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달랐습니다. 엘리사는 선생보다 더 큰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에 요동하지 않습니다. 선생을 떠나 보내는 것은 섭섭한 일이지만 요동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는 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다를 곳은 호구와도 같았습니다. 왼쪽은 바다가 가로막았습니다. 앞과 오른쪽은 큰 산맥이 앞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군대가 뒤를 쫓아옵니다. 이제는 피할 곳이 없습니다. 이제는 항복하고 끌려가든지, 아니면 싸우다 죽든지 그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요동했습니다. 모세를 죽이고 항복하자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땅을 치면서 통곡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의 사람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다시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어다." 아멘.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동요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어떠한 상황에서나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 훌륭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려면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흔들리고 요동한다면 귀한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환란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셋째, 성숙한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을 중심해서 보면 몇 개의 지명이 나옵니다. 길갈, 벧엘, 여리고, 그리고 요단강이 나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그곳을 지나갔습니다. 엘리사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장소의 이동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몇 동네를 지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지명들은 이스라엘의 신앙고백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네 이름을 지을 때는 저들의 신앙고백이 따랐습니다. 또 그렇지 않더라도 특수 지명이 갖는 의미가 있습니다. 길갈은 요단강을 육지와 같이 건넌 뒤에 요단강에서 취한 12개의 돌로 기념비를 세운 곳입니다. 그러므로 길갈이 주는 의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다음으로 벧엘은 능력의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신 곳입니다. 원래는 루스 광야였으나 야곱이 꿈에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함께 하심을 약속하므로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으로 벧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벧엘이 주는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벧엘을 통과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확실히 깨닫게 하셨습니다.

다음 여리고로 지나게 하신 것은 말씀에 순종할 때 나타났던 역사를 다시 생각나게 하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때 여리고가 큰 장벽이었습니다. 당시에 큰 성이었고 전략적인 요충지였습니다. 여리고를 점령하지 않고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곳에서 성을 공개적으로 7일간 도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백성들이 믿음으로 순종하여 성을 무너뜨리고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여리고를 지나게 하심으로 말씀에의 순종의 능력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두 사람을 요단강 저편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세상과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요즘도 우리는 사후의 만남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으로 약속합니다. 엘리사가 길갈에서 벧엘로, 여리고로, 그리고 요단강 저편까지 따라간 것은 죽음의 자리까지 같이 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엘리사의 성숙한 신앙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순교의 자리까지 따라가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귀히 쓰임 받으려면 이런 성숙한 신앙의 단계로 나가야 합니다.

넷째, 겸손히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려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요단강을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아멘. 엘리사는 참으로 어려운 것을 구했습니다. 엘리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큰 은혜를 구하는 것은 귀한 일꾼의 자세입니다.

여기서 엘리사가 선생 엘리야의 능력보다 두 배를 구한 것이 교만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선생보다 두 배 잘난 선지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가 선생처럼 일을 하려면 두 배의 영감과 능력을 받아야 감당할 수 있겠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의 부족을 알고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훌륭한 일꾼이 되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엘리사보다 훨씬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엘리사보다 7배의 영감을 받아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잘난 줄 알고 자신의 힘으로 하려는 사람들은 실패합니다. 이제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허영에서 구하지 말고 진정 겸손한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그래야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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