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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중요한 일에 집중하라 누가복음 2: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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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일에 집중하라
누가복음 2:41-51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


I. 모래시계 인생

  전세계 위인들과 성인들, 소위 성공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으려 몸부림했던 스티븐 코비는 가장 기본적인 공통점 3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① 소중한 일에 집중한 일에 살더라. ② 비전과 목적에 맞게끔 살더라. ③ 환경에 끌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살아간다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세계 수많은 교회를 컨설팅한 피트 드라커라는 사람은 이 땅에 있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소중한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일을 올바로 하려 하지말고 올바른 일을 하라.

  그래서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이 「중요한 일에 집중하라 !」입니다.

  한때 장안에 대단한 인기를 모았던 「모래시계」란 연속극이 있었습니다. 깡패두목으로 무분별하게 사업을 확장해 가는 윤 사장이란 사람은 어느날 사랑하는 딸에게 “모래시계? 하나를 보여줍니다. “이게 뭔지 아니? 네 엄마가 유럽여행을 다녀오면서 아빠에게 사다준 선물이야. 그 의미가 뭘까? 이 땅엔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끝이 있다는 게지.?윤 사장의 아내는 악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고 사는 자기 남편에게 “이 세상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우리 바르게 삽시다.? 무언의 충고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생이 이만한 충고에 돌아설 수 없지요. 윤 사장은 끝까지 불의한 길을 걷다가 자신은 물론 사랑스런 딸까지도 불행하게 만들고 맙니다.

  「모래시계」의 끝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주인공 태수를 화장한 재를 안고 혜린이와 강석우 검사가 산위에 앉아 있습니다. 강석우 검사가 말합니다.  “이제, 그 친구 보내줘라.? “어디로?? “이 세상 아닌 다른 곳으로.? 혜린은 화장한 태수의 재를 날리는 것으로 이 극은 막을 내립니다.

  악을 쓰며 모았던 재산도, 그 악을 없애기 위해 악당을 죽이려는 몸부림도 모두 이 재처럼 허무한 것이란 암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2002년 또 한해의 마지막 달을 맞이했습니다. 인생은 모래시계입니다. 1월이 있으면 12월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알차고 보람찬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마냥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저도 이제 반백년 인생을 살고 나니 지금까지 뭘했는가?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걸어온 길도 되돌아 보고 가야할 길도 살펴보게 됩니다. “아, 허둥대나 끝나겠구나.” 싶었습니다. 어떻게 성공적으로 살다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까요?

  최근에 나온 신간 중에 “단순하게 살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정보 홍수시대에 인생을 의미있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단순함이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환경을 단순하게 하라. 재정을 단순하게 하라. 시간을, 건강생활을, 관계를, 가정을 그리고 자신의 생활을 단순화시키고 좋은 습관을 구체화시키는 구체적인 방법들과 정보를 제공해 주는 책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핵심가치에 집중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집중하고, 인생은 인생의 본질에 집중하고, 가정은 가정이 무엇인가? 그 본래의 의미를 찾아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핵심가치, 본질을 잃어버리고 군중속에 파묻혀 허둥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중요한 일에 집중하라!」



II. 예수 잃은 예수꾼

  오늘 우리는 대림절 절기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성탄절기입니다. 해마다 맞는 성탄절이지만 예수 없는 성탄절을 맞지나 않을지, 오늘 우리의 신앙이 예수 잃은 예수꾼! 예수 없는 예수쟁이! 노릇을 하고 있지나 않는지 돌아보고 성탄절의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구세군 창설자 부츠대장은 “인류의 마지막날이 가까워 올수록 교회마다 종교적인 형식은 있으나 성령의 능력은 없고 교회조직은 화려해져 가나 예수가 없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보스톤 근교 한 부잣집에서 유아세례를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부잣집에서 유아세례를 베풀게 되면 마을잔치를 벌이고 집안에서 유아세례를 거행했던 모양입니다. 잔치가 무르익고 절정에 다다랐을까요? 목사님께서 “이제 아이를 데리고 오십시오. 유아세례를 베풀려고 합니다.? 아이 방으로 올라갔던 어머니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놀란 가족들이 달려가 보았지요. 아이가 질식사했던 것입니다. 이유인즉, 마을 사람들이 와서 코트를 어디에 벗어둘까 이곳저곳 찾다 조그만한 침대 하나가 눈에 띄어 누군가 무심코 코트 하나를 벗어 던졌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열 번째 스무 번째 사람들이 거기가 코트 벗는 곳인가 보다하고 그곳에 코트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고 아이 위에 쌓여졌던 코트가 아이를 짓눌러 질식사 시켰던 것이지요. 그날의 주인공 아이는 질식사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파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공 없는 드라마처럼 의미도 맛도 없이 인생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신약 성경중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기록을 빼고 나면 아동기, 청소년기, 공생애 이전의 생을 기록한 유일한 본문입니다. 마치 30년간의 숨겨진 역사의 커텐을 살짝 열어 보여 주는 호기심찬 한 장면 같기도 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탄생기록들은 한결같이 아기 예수 주변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에서 처음으로 소년 예수님이 주역을 맡은 기록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울음을 터뜨린 것 말고는 성경상 처음 입을 열어 말씀하신 기록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예수 탄생 기록의 웅장한 마감이요 공생애의 서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인 즉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날 예수님께서 열두살되던 해에 그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 성에 올라갔습니다. 유월절 축제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하룻길을 내려와 예수님을 찾아보았으나 동행 가운데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을 붙들고 “예수 못 봤수!” 저 사람을 붙들고 “예수 어디서 못 봤수!” 예루살렘 성에 도착할 때까지 예수를 찾지 못했습니다. 

  사흘만에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왔더니 박사들과 더불어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부모는 “아이야 왜 부모를 이렇게 놀라게 하느냐?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 예수님의 대답 즉, 성경상 예수님이 입을 열어 토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왜 알지 못했습니까?” 자신이 누구인가? 에 대한 큰 암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부르고 있고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부릅니다.

  그 부모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모친만 이 말을 마음에 두니라는 얘기로 오늘 본문은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내 곁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예수가 나와 함께 아니 계셨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 계시다는 사실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예수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여정 가운데 예수님이 여러분과 동행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고난을 겪고 있는 고난의 현장에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고 동행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가치관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소원하는 기도속에 비전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구약 성경에 보면, 삼손이 드릴라에게 빠져서 그가 깊이 잠든 사이에 힘의 근원이었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습니다. 자기 힘의 근원이 사라졌는데도 알지 못하고 힘깨나 써보겠다고 일어섰다가 두 눈이 빠지는 비극을 맞고 기둥에 깔려 마지막을 맞게 되었지요. 

  성경은 삼손의 생애에 대하여 한 불행한 기록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난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여호와께서 이미 나를 떠난 줄을, 성령님이 우리 가정을 떠난 줄을, 여호와께서 이미 이 민족을 떠난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이건 비극중의 비극이요 불행중에 불행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잃었고 삼손은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예수를 잃고,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것 들어 붙들고 산다면 이는 분명 가장 중요한 핵심가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잃은 예수꾼, 예수 없는 예수쟁이들에게 남은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III. 예수를 잃게 된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너무나 번잡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월절 축제속에 삼백만 인파가 몰려들었고 가는 곳곳마다 축제의 마당이었을 터이니 그 속에서 예수를 잃어버릴만도 했습니다. 주위가 번잡하면 정신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바른 일에 관심을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린 예수를 잃어버리고만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얼마나 번잡한지 모릅니다. 저마다 바빠 죽겠다고 합니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습니다. 취미생활은 또 어쩌면 그렇게 많은지. 주부들도 아침 식탁을 다 정리한 다음, 커피 한잔 끓여놓고 성경책 펼쳐놓고 하루일과를 묵상하며 기도하는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손에 설거지물이 채 마르기전에 또 번잡한 일에 시달립니다. 산란하고 불안정하고 산만합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동행할 리가 없습니다.

  헛되고 헛된 것들, 신기루와 같은 것들에 너무 매이지 마십시요. 가짜만 보고 살면 진짜를 모릅니다.

  우리교회 집사님 한분이 4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올 여름에 시골에 계신 할머니 댁에 갔더니 아이가 할머니 집에 있는 돼지 마구를 보며 대뜸 그러더랍니다. “엄마 저금통 큰 거 하나 있어.?

  아이들도 세 살만 되면 번잡해요. 교육학의 ABC는 모래사장에서 아이들이 인생을 배운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교육은 모래사장에서 다 완성이 된다는 게지요. 아이들과 어울려서 놀이터 모래바닥에서 전부다 두 다리 쭉 뻗고 앉습니다. 그리고는 이 모래는 내 것! 한웅큼 움켜쥐어 봅니다. 그러나 모래는 술술 다 빠져서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 이게 인생이구나! 

  그리고 모래성을 쌓아봅니다. 쌓고 또 쌓고 한없이 키만큼 쌓고 싶지만 모래가 쌓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형아 한테 네 것, 내 것 고집을 피워봅니다. 주먹이 퍽! 날라옵니다. 아, 이거 얻어터지는게 세상이구나! 그러면서 질서를 배우는 겁니다. 

  오늘 본문 44절에 보면 허둥대고 살아가는 인생들을 향한 비극적인 한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했으나”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했으나 예수는 동행중에 아니 계시더라. 마리아는 예수가 요셉과 함께 있으려니 생각했고, 요셉은 예수가 마리아와 함께 있으려니 생각을 했던 게지요.

  옛날 예배당에 보면 마루바닥에 전부다 신발 벗고 갑니다. 가운데 시커먼 천막이 죽 앞으로 쳐져있어요. 이쪽에는 남반, 저쪽에는 여반이예요. 남자는 남반, 여자는 여반에 앉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아이를 데리고 가면 아이는 천막 밑으로 기어서 아빠한테 갔다가 엄마한테 갔다가 커텐 밑으로 왔다 갔다 합니다.

  유대인의 풍습도 그렇습니다. 유월절에 올라 갈때도 내려 올때도 여자는 여자들끼리 남자는 남자들끼리 함께 얘기하며 갑니다. 여자들은 이웃집 순이 엄마 얘기, 어제 본 랍비 얘기, 남편 자랑도 하고 흉도 보면서 내려왔겠지요.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정치 얘기, 사업 얘기, 세상 돌아가는 얘기하면서 갑니다. 그런데 아이는 엄마손 붙들었다가 아빠 손 붙들었다가 그러면서 갑니다. 그러니 내 곁에 없지만 마리아 곁에 있겠거니, 내 곁에 없지만 아버지 곁에 있겠거니. 예수가 안보이네? 지 엄마한테 있을겨. 그리고 하룻길을 내려오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둘다 예수를 잃은체 인생길을 걸아가고 있는 거지요.

  예루살렘을 떠날 때 다른 일행들 친척이나 동네사람들과 함께 동행했으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현대교회에 군중교인 속에서 예수없는 신자가 얼마나 많아지는지 모릅니다.  큰 교회를 좋아하는 현대 교인들은 군중속에 끼어서 함께 따라가다 보면 천국에 도착하려니 생각합니다. 내 아내가 열심히 기도하니 아내 손 붙들고 열심히 교회 왔다 갔다 하면 천국에 다다르려니 생각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열심히 신앙생활하니 어머니 따라가다 보면 천국에 도달하려니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현대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쾌락을 구경하며 함께 즐기는 종교 도착증 환자들이라고 날카롭게 비평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거기에 나의 문제가 있고 너의 문제가 있고 우리 모두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이들 동화책에서나 나올 만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한 마을을 지나오며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을입구에 서 있는 한 집에 교패가 붙어 있습니다. 너무 반가와서 벨을 눌렀지요.  마침 집을 지키던 새댁이 나왔습니다. 목사님께서 엉뚱한 질문을 남깁니다.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당황했던 이 새댁은 “이 가정은 장로님가정입니다. 제 남편이 집사이구요 저도 교회 집사입니다.? “아니, 교회의 직분말고 이 댁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엉뚱한 질문을 남기고 낯선 길손은 떠나갔습니다. 

  이분이 떠나고 난 다음에 새댁의 귓전에 쟁쟁거리는 소리가 남아있습니다.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정말 내속에 예수님이 계실까? 내 생각속에 예수님이 계실까? 내 언어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내가 행복해하는 이 심장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내 우선순위속에 가치판단 기준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진지하게 자기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나와 살아 주시겠거니 하는 막연한 상상이나 추측말고 내가 한소망교회 등록했으니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거니, 예수님 사진 우리집 안방에 걸어놓았으니 예수님이 우리 집에 계시겠거니, 내가 교회 다닌지 10년이 되고 20년이 되고 교회 집사가 되었으니 예수님이 계시겠거니 말고 정말 내 삶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내가 걸어가는 삶의 자국마다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십니까? 내가 몸부림하고 고통하고 힘들어하는 그 현장에 예수님이 나를 지켜주고 계십니까? 내가 기뻐하는 그 기쁨 한 가운데 예수님이 계십니까? 예수와 함께 기도하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고 사십니까?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이 곁에 있으려니 뒤에 따라오려니 앞서 갔겠거니 생각했으나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날 따라 오도록 내 뒤에 팽겨쳐 둘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방이나 안방에 모셔놓고 살아가도 좋은 그런 분이 아니더란 말이지요. 예수님을 마리아와 요셉 앞에다가 세워놓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라왔더라면 예수님을 잃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예수님보다 내가 앞장서지 말고 말씀보다 앞장서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아갔더라고 하면 예수없는 예수꾼 노릇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여행할 때 행군도를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언제나 앞장 세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앞장 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머물 때는 백성들 중심에 법궤를 갖다 놓습니다. 내 등뒤에 예수님이 계시고 내 우편에 예수님이 계시고 내 좌편에 예수님이 계시고 바로 내 앞에 예수님이 계시도록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비대해 지면서 예수를 잃어버린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과 시련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아니하고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살고 예수 때문에 죽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단 하루도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우리를 죽이는 사람 없고 예수를 믿는다고 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알곡과 쭉정이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오실 때에 예수님 영접할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기름이 바싹 말라 버리고도 신앙생활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의 구별이 모호해 지고 말았습니다. 가짜와 진짜의 구별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룻길을 다간 후에야 예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이 세상길은 돌아갈 수가 있어요. 집에다 물건을 놔두고 와도 집에 다시 들어갈 수가 있어요. 어제 갔던 길 궁금하면 다시 가 볼 수 있어요. 지난 달에 실패했던 그 일 다시 도전해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인생길은 되돌아갈 수가 없어요. 인생은 연습도 시행착오도 없습니다. 한번 걸어가는 직선이 있을 뿐입니다. 어제 실패는 영원히 실패요, 오늘의 실패는 영원히 실패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생길은 돌아갈 수가 없다. 인생은 리허설이 없다! 진리 아닙니까?

  인생의 종착점에 서 있을 때에 내 곁에 예수가 아니 계시더라!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하면 그 인생 망한 인생되는 것 아닙니까?



IV. 언제 예수님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은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났을 때였습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잃어 버리는 가장 큰 이유가 교회를 떠날 때입니다. 흙을 떠난 꽃이 살 수 없는 게고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예수 떠난 심령은 살 수가 없는 법이지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교회에 뿌리를 잘 내리는 성도가 마지막날 승리하게끔 되어있는 겁니다.

여러분, 때로 교회가 모순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요.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얘기는 여기 모이는 성도들이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보혈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에 이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얘기는 여기 모이는 성도들의 마음이 모두 하나가 되기 때문에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입니다. 

  교회가 영광스럽다는 얘기는 여기 서 있는 목사가 영광스럽기 때문에 교회가 영광스러운 것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기독교 이천년동안 모자라지만 부족하지만 거기에는 갈등이 있지만 언제나 연약함이 있지만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왔습니다.

  초대교회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장로교 신학의 창시자 요한 칼빈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는 교회를  어머니로 섬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의 중심에 성전을 두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중심에 말씀을 두고 인생살이 중심에 교회를 두고 신앙생활을 두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교회를 어머니처럼 모시고 살아간다고 하면 실패할 수가 없는 게지요. 



V. 잃어버린 예수를 어디서 찾을 수 있었습니까?

  마리아는 친척을 붙들고 “예수 못 봤수!” 요셉은 지나가는 사람들 붙들고 “이렇게 생긴 아이 못 봤수!” 아는 자 중에서 찾아보았으나 동행인 가운데 없었습니다. 어디서 찾았습니까? 성전에서. 성전은 예수 찾는 곳입니다.

  오늘 교회에 와서도 내가 왜 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교회에 왜 오셨습니까? 부자는 세상에 가야 있습니다. 쾌락과 재미도 밖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예수님 만나러 오는 겁니다. 교회는 예수를 파는 곳입니다. 예수님 보러 와야 합니다. 교회 오면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설교속에 찬송속에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왜 그렇게 낙심됩니까? 왜 불평이 생깁니까? 왜 미움이 생기고 원망이 생깁니까? 자기 인정 요구에 이글거려야 합니까? 왜 자기 왕국을 무너뜨리지 못해서 근심하며 살아야 하는 겁니까? 예수님이 안보이기 때문에!

  저는 일산 신도시에 와서 목회를 하면서, 지난 몇 년 동안 신도시 교인들이 의외로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오늘은 이 교회 내일은 저 교회, 어디 가서 신앙생활 해볼까? 몸부림을 하고 다녀요. 처음에는 그것이 못 마땅했습니다. 왜 저렇게 방황을 할까? 그런데 한 분을 만나보고 두 분을 만나보는 사이에 그게 방황이 아니고 몸부림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 가면 내 영혼을 맡길 수 있을까? 어디가면 살아 역사하는 꿈틀거리는 생동감이 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수 있을까?  Where is a good preaching. 어디에 생명수가 넘치는 말씀이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예배는 어디 있을까? 주일마다 주님 전에 찾아갈 때마다 예수 만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예배는 어디 있을까? Where is a good worship. 좋은 예배를 찾아서 좋은 말씀을 찾아서 저들이 몸부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목사로서 한편 부끄럽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가 다른 것 보여주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 보여주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제 설교가 멋있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제 설교속에 예수님이 녹아서 역사하는 그런 설교를 하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교회 예배를 통하여 찾아오는 성도들마다 상처난 심령마다 갈증난 심령마다 방황하는 심령마다 예수 만나고 예수로 충만하여 돌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에 좋은 말씀을 주시고 좋은 예배를 주시옵소서!” 그때부터 하나님 앞에 기도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외쳤던 표어가 저기 붙어 있습니다. 함께 외쳐 볼까요.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난다.」



VI. 결 론

  한소망교회 예수가 계시는 교회입니다. 한소망교회 예수님의 가치와 비전이 분명한 교회입니다. 우리 한소망교회가 다른 것 보여주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한소망교회 가면 예수 만난다더라. 할렐루야! 

  한소망교회 가서 설교 들으면 예수가 보이더라. 할렐루야! 너희 속에 참으로 예수가 함께 거하는 교회가 되었구나. 이 얘기가 가장 영광스러운 얘기요 가장 복된 얘기가 될 줄로 믿습니다.

- 예수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여기 오면 예수님 만난다고 말해 줍시다.
- 행복 잃고 허둥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만나면 행복하다고 말해 줍시다.
- 길 잃고 당황해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오시오.”라고 말해 줍시다.
- 헛된 것 붙들고 허탈해 하는 사람들에게 천국 붙들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 줍시다.

  언젠가 명절 연휴에 TV에서 본 영화입니다. 대사업가의 아들을 실은 경비행기가 사막을 지나다가 폭풍을 만나 추락했습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수색대를 조직해 며칠 동안, 사막을 샅샅이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디가 추락 지점인지, 또 아들이 생존해 있는지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오랜 후에 사고 지점을 찾았지만 거기에는 비행기 잔해와 비행사의 시체만 있고 아이의 시체는 없었습니다. 일단은 아이가 살아 있다고 가정하고 이제는 아이 구출 작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아들을 어떻게 구출할 것인가" 하고 이 아들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여러 가지로 연구했습니다. 수백만 장의 전단을 사막에 뿌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단에 무엇이라고 쓸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사막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법들을 쓸 것인가? 무엇을 잡아먹고 사나운 짐승은 어떻게 피할 것인지 등등을 써야 할 것인가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지혜로운 분이 제안을 했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면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아이의 문제는 가정과 부모와 격리된 고독감일 것입니다. 그러니 "내 아들 존아, 아빠는 너를 사랑한다. 라고만 써서 뿌리십시오." 그래서 아버지는 “My son, John, I Love you.” 라고만 써서 뿌렸습니다. 사막에서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기진맥진하고 좌절감으로 죽어 가던 그 아이가 이 전단을 받아 보게 되었습니다.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아빠는 반드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이 생각은 아이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아빠가 찾아올 때까지만 버텨보자고 다짐했습니다. 마침내 수색대에 의해서 아들은 구출되었고 생명을 건졌습니다.

  I Love You!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에게 당신은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분입니다. 그분에게 집중하여 사십시다. 헛된일에 집중하며 살면 헛된 인생이 됩니다. 산만한 일에 시달리면 산만한 인생이 됩니다. 가장 중요한 일에 집중하면 당신은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중요한 일에 집중하여 살아 가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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