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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불살라 새롭게 하소서 / 눅12: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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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49-53
"나를 불살라 새롭게 하소서"
박근호 목사 (구미영락교회)


이제 두 달 후면 또 한번의 대선을 치루게 되겠습니다만은 우리나라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 구호가 "개혁"입니다. 지난 20년 세월을 돌이켜 볼 때 '군사정권'이라 불리웠던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는 '사회 정화', '사회정의 구현'이라며 개혁을 부르짖었고, 김영삼 정권 때는 군사독재 정권을 청산했다해서 '문민정부'라 이름하며 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김대중 정권 또한 '국민의 정부'라는 이름으로 개혁을 부르짖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개혁을 부르짖었음에도 과연 개혁이 되었는가, 이 나라가 보다 정의롭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는가, 더 이상 부정도 부패도 없는 밝고 맑은 정의 사회가 되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개혁을 부르짖었고 또 개혁을 위한 수많은 노력들을 기울였지만 정작 개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럼 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일까요? 개혁의 당위성을 외치고 개혁을 위한 갖가지 다양한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기엔 분명 몇 가지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는 문제점과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개혁이 제도나 시스템을 바꾸는데 치중되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문제는 그 어떤 제도나 시스템보다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인데 사람들의 의식과 마인드는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와 시스템을 바꾼다고 해서 그 개혁이 완성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한 동안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의약분업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도적으로는 보다 진일보한 형태로 개혁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의료인들의 의식이 바뀌지 않고, 제약회사들의 관행이 바뀌지 않고, 국민들의 마인드가 바뀌지 않다보니 더욱 불편만 가중되고 심각한 부작용만 더 불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도나 시스템 개혁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사람의 생각과 의식이 개혁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두 번째,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이 자기 개혁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개혁을 하겠다고 칼자루를 쥔 세력들이 자기들은 개혁의 주체로, 국민이나 재벌, 교사, 언론 등을 개혁의 대상으로 여기다 보니 자기들은 언제나 정당하고 옳다는 착각과 모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 제법 개혁의 물꼬를 터가는 것처럼 보였던 문민정부나 정권 초기에 금새 달라진 정의사회를 만들 것처럼 활발하던 국민의 정부의 개혁이 중단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개혁의 주체 세력들인 자신들의 비리가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엄청난 비리가 드러나면서 '몸통'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고 대통령의 아들들이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면서 개혁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저들이 연루된 이런 저런 게이트들이 불거져 나오면서 개혁은 소멸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혁에서 나는 빼고 너만 개혁하겠다고 한다면 그 개혁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나부터 개혁하는 개혁일 때 비로소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개혁이 실패하게 된 이유라면 개혁이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무슨 유행처럼 개혁을 외치다가는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가 달성되면 그 순간부터 개혁을 주장하던 목소리는 사라지곤 합니다. 개혁이 혁명과 다른 점은 꾸준히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그렇게 개혁의 지속성이 유지되지 못하다보니 결국은 개혁은 실종되고 만 것입니다.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까요?...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개혁 중의 하나가 바로 지금으로부터 485년전 독일의 마르틴 루터로부터 비롯된 종교개혁입니다. 루터의 이 종교개혁은 기독교나 종교사적으로만이 아니라 세계 역사에 분수령을 이룬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종교개혁과 더불어 세상은 큰 변화를 맞게 되고 역사의 전환점을 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역사에 큰 변혁을 물꼬를 텄던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요?
루터의 종교개혁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자신으로부터의 개혁이었습니다. 고행을 통해, 인간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추구하던 그는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구원을 얻게된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또 인정하기까지 그는 엄청난 갈등과 번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은총에 대해 눈을 떴을 때에 왜곡된 기독교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교계에 반기를 들면서 조직과 시스템만이 아니라 죄와 결부된 인간의 현실을 고발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면죄부 판매였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증축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재원이 드는 그 일을 하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 경제적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이 땅의 후손들이 구입을 하는 순간 연옥에 있던 그들 조상의 영혼이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소위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그대로 믿고 면죄부를 사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에서는 테첼이라는 사제가 이 면죄부 판매에 앞장을 섰는데 실상 그 면죄부를 판매한 액수의 절반 정도는 알베르트라는 신부가 모인츠 대주교직을 사는데 소요된 빚을 갚는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루터는 이런 카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더 이상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정치적인 방법을 쓰질 않았고 정치적인 구호를 외치지 않습니다. 그는 철저히 성경적이요 하나님 중심의 방법을 사용하여 자기가 설교하던 교회,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들 앞에 95개 조항의 성경에 기초한 반박문을 내걸고 개혁의 기치를 듭니다.
그러나 개혁이 결코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몇 번씩 개혁을 포기하려고 했었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괴로웠고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유혹과 시련을 끝끝내 물리치고 끝까지 개혁을 관철시켜 나갑니다. 물론 그것은 루터의 배후에 하나님이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선한 가족과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종교개혁 485주년을 맞으면서 여러 분야에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가까이는 나 자신의 개혁 그리고 우리 가정과 교회와 국가와 사회 등등 개혁을 필요로 하는 자리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개혁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개혁의 필요성을 압니다. 그런데 성공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개혁'이 하나님과 매우 밀접한 구호임을 증거합니다. 계21:5절에 보면 하나님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이 땅을 개혁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주님의 실존을 우리와 연계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합니다. 물론 성령님도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은 무엇보다 이 땅위에 개혁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개혁을 목적으로 오신 주님은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땅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라.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땅이 불살라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이 너무도 오염되고 더러운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방화범도 아니고 불장난을 즐기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런 주님께서 이 땅에 불을 던지기 위해 왔다고 하시는 것은 더럽고 추하고 위험한 것들이 이 세상에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머지않아 농부들이 추수 후 밭에다 불을 지르는 광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건 그 밭의 온갖 균들을 죽이는 작업이요 또 그 불탄 잿더미로 인해 땅이 더욱 기름져져서 내년 농사를 잘짓기 위함입니다. 불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걸 다 태워버리면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어제 아시아 태평양 장애인대회가 아시안 게임이 열렸던 부산에서 열렸는데 그 개막식의 절정은 바로 성화 점화였습니다. 이번 성화점화방식은 좀 독특해서 하나는 우리나라 강화도 마니산에서 채화된 '평등의 성화', 또 하나는 상하이, 시드니, 후쿠오카에서 채화된 '화합의 성화'가 서로 합쳐져 점화되면서 '평등과 화합의 성화'가 주경기장에 불타 올랐습니다. 참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불에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겁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불을 이 땅에 붙이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불이 안붙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의 안타까움이었습니다. 붙어야할 불이 안붙고 있는 겁니다. 불을 붙여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요즘이야 불붙이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가스 렌지 스위치만 올리면 점화되고, 보일러 보턴만 누르면 방이 따뜻해집니다. 그러나 옛날 연탄 때고 아궁이 불피울 때는 참 불피우기 쉽지 않았습니다. 번개탄이 나오기 전 시절에 연탄불을 피우려면 한참 애를 먹습니다. 숯불을 피우려면 머리가 멍할 정도로 입으로 바람을 거세게 불어야 됩니다. 그래도 불이 붙지 않으면 참 답답했습니다.

주님도 오늘 본문에 보면 마땅히 붙어야할 불이 붙지 않고 있음을 답답해 하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주님의 소원은 이 땅에 불을 붙이는 것인데 불이 붙고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이 불을 붙이려고 하는데 그걸 이루기까지 참 초조하고 답답하다는 심경을 토로하십니다.

그럼 주님이 어떻게 이 땅에 불을 지르시는 걸까요? 50절에서 주님은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건 바로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불을 붙이는 방법은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는 방식이 아니라 당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 땅에 불이 붙이신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림으로서 이 땅의 모든 악한 균들을 죽이고 더러운 죄를 태우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로 개혁을 이루어내겠다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제 주님은 십자가로 개혁을 이루는 방법과 그 과정을 51절 이하에서 설명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참으로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이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알고 있다면 그런 생각을 고쳐먹으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고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으로 인해서 가족들이 나뉘어져 서로 반목하고 싸우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개혁을 이루어가는 방법은 먼저 기존의 화평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이 파괴주의자거나 트러블 메이커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 깨뜨리려는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참평화를 맛보기 위해서는 거짓 평화를 송두리채 박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깨뜨리시는 평화는 거짓 평화러 타성과 관성에 사로잡힌 평화입니다. 주님은 그런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이라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예루살렘은 평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평화는 거짓 평화, 평화를 가장한 거짓 평화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타성과 관성에 젖은 왜곡된 평화가 신앙의 근본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잘 믿고있지 못하면서 잘믿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리 있으면서도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있다고 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주님은 그런 종교의 세계에 불을 지르려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 종교의 현실은 갱신되고 바뀌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평화가 아니었기에 주님은 성전을 청결케하고 율법과 전통을 상대화하며 십자가의 길을 자초하며 가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 행동은 얼핏 분열과 혼란으로 보여질 수 있었는데 주님 스스로도 그것을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당당히 '나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시도하시는 분열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창조는 분열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어떤 의도의 분열이냐가 중요한 겁니다. 벌써 시작되고 있습니다만은 대선을 앞두고 이제 곧 정치권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정상적인 수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것이냐 아니면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인 것이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혼돈을 갈라놓음으로서 빛이 생겨나고 물을 갈라놓음으로 천지가 생겨납니다. 이렇게 건전한 분열은 창조의 한 형태입니다. 생명의 성장이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세포의 분열을 의미하는 겁니다. 세포가 자꾸 분열해서 성장이 있고 성숙이 있는 겁니다. 분열이 없는 것은 죽은 겁니다. 물론 그 분열이란 창조를 위한 분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불은 창조를 위한 것입니다. 용광로에 들어가 기존의 자기 형체를 다 녹인 후 전혀 새로운 모양이 되어 나오는 것을 보셨습니까? 주님은 불을 이 땅에 던져서 그 불에 녹아지고 새로워진 새로운 세상을 희망하시는 겁니다. 그런 인간을 기대하시는 겁니다. 주님은 우상의 잡목으로 우거진 이 세상 정글에 불을 확 질러 그것들을 다 제거하고 거기에 새로운 성장과 살림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생태학자들은 태풍없이는 생태계가 유지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태풍이 불어와 만물을 뒤집어 놓아야 세상이 올바로 유지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안락과 무관심, 무기력한 타성과 관행에 젖은 신앙에 쇄신의 불을 질러 참된 평화와 새로운 비전을 열어주시려는 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뜻인 것입니다.

참된 평화와 안정이란 전통의 혼란도 불사하는 결단에서만 오는 것입니다. 분열과 칼을 주러 오신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분열과 혼란인 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와 악의 세력 간의 싸움이 더욱 날카로워지기 때문이고 또 하나님 나라 편과 악의 세력 편으로 각각 나뉘이기 때문입니다.

한 집안에서 셋이 둘과 그리고 둘이 셋과 분쟁한다는 것은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분쟁을 말합니다. 유대 가정의 한 집안 식구들은 보통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다른 편으로는 아들과 그의 아내와 딸로 구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분쟁은 옛 세대와 새 세대 간의 분열과 대립을 뜻합니다. 53절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세대간의 분쟁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결단을 위한 부름은 부름을 위한 분열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요구는 그 분열이 가장 가까운 인간 관계 즉 집안 식구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임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의 손해를 많이 보고 삽니까? 사랑이라는 것으로, 정이라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신앙의 영역을 깎아먹고 삽니까? 그러나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하나되게 하는 분이시지만 또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으로부터 갈라서게 만드는 위대한 분열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참 평화를 맛보게 하고 참된 일치를 누리게 하시는 겁니다.

종교개혁이란 하나님께서 마르틴 루터를 통해서 이 세상에 불을 지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온갖 잡것들을 다 불지르고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악에 불을 질러 태웠습니다. 그로 인해 검은 연기가 치솟고 탄내가 진동했지만 구름 속에서 새 하늘이 열리는 것처럼 그 잿더미 속에 새롭게 하나님 나라의 새싹이 돋았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도 우리 속에 불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불을 던져주시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참평화를 맛보고 진정 하나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의 자기개혁이 선행될 때에 비로소 가정과 사회와 교회와 국가의 개혁은 가능해지는 겁니다. 무슨 프로그램을 시도하고 사업을 벌인다고 해서 개혁되는 게 아니라 먼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으로 새로워질 때 개혁은 자연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종교개혁 485주년을 맞으면서 주님께 이런 기도를 드리십시다. '주님, 저를 불살라 새롭게 하소서!' 이 기도와 더불어 참으로 평화와 일치와 보람과 기쁨을 맛보며 참된 주님 안에서의 행복을 맛보며 사는 우리 영락의 모든 권속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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