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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십자가 / 마 16: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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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
이필재 목사 (갈보리교회)


교회력으로 예수님의 부활 전 40일을 사순절이라고 하는 절기로 지켜오고 있는데 요즈음 세상의 문화가 사순절을 지키는데 장애 요인이 너무 많아서 매우 어렵습니다. 이 절기는 다른 때보다도 이때에 주님의 고난을 더 많이 기억하며 살자는 뜻으로 A. D 325년부터 지켜온 교회가 정한 절기 중에 하나가 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21절부터 읽었는데 그 바로 윗부분을 보면 그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훈련을 받은 제자들은 시간적으로 약 3년째로 접어들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심각하고도 본질적 질문을 해서 영적 시험을 한번 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시험지를 내셨습니다. 제자들이 답안지를 제출했는데 모두 낙제 점수가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이라 합니다. 더러는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또는 많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의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좀 실망하신 예수님은 "너희들이 직접 대답해 보라"고, "세상 사람들이 아닌 너희들의 고백은 무엇이냐?" 그때 정답이 하나 나왔습니다.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주 100점 짜리 정답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아주 우등생 상을 주십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메면 하늘에서도 메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큰 상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때 예수님은 안심하셨습니다. '이만하면 제자 훈련이 훌륭하게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본질적 사명을 말해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라고 판단하시고 오늘 말씀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첫 절에 "이때로부터" 이런 말이 시작이 되는데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후" 그런 말이 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깊이 깊이 간직하고 계셨던 속에 있는 말씀을 하셨는데 여기 보면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이런 단어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는 이제 처음으로 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이때 주님의 마음은 이제는 제자들도 고난에 대비할 마음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반응은 아주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바로 조금 전에 그렇게 훌륭한 100점 짜리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돌변을 합니다.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약간의 신경과민 같은 현상이 나타나서 아주 험악스러운 책망을 또 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러십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이 1 : 1로 사람에게 사단이라고 말씀하신 때는 이때 밖에 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군인들을 데리고 예수를 잡으러 왔을 때에도 예수님은 유다를 보고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그런 부드러운 말씀을 하셨지 이렇게 험악한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그래도 베드로가 제자들 가운데 제일 모범생이요 예수님 마음에 들던 제자임에 틀림이 없고, 조금 전만 해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마음에 가장 큰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정확한 대답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베드로의 말 때문에 넘어질지도 모르는 위험이 찾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물리치고 안 넘어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넘어지려 하시는가? 사실상 예수님의 마음에도 십자가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가장 고민이 되고 피했으면 좋은 십자가를 자신이 제일 신뢰하는 베드로가 말하니까 마음이 흔들리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베드로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기 때문에 넘어질 듯한 느낌이 지금 있으신 것입니다. 가장 강력하고 극단적 방법이 아니면 이 위험한 상황을 예수님도 극복하기 어려운 상태로 되었기 때문에 가장 측근의 고백자, 이미 천국 열쇠를 선물로 받아 쥔 베드로를 타고 들어오는 사단의 유혹을 예수님은 지금 단호하게 물리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베드로는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는가? 자기도 그 길만은 가고싶지 않아서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지금 출세의 꿈이 있습니다. 갈릴리를 떠나본 일이 없는 가난한 어부가 조상이 물려준 낡은 조각 배 한 척에 수십 군데 찢어진 그물 하나로 고기를 잡아서 생계 유지를 하는 어촌 영세민이 예수님을 따라 나선 후 그래도 그의 눈에 뭐가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된다는 소문도 무성하고, 자기에 대한 신뢰도도 매우 충분한 것 같이 보이고, 이대로 가면 보장된 출세 자리라 보였습니다. 그런 희망찬 베드로 앞에 예수님이 이제 나는 고난을 당하고 죽어버린다니 그러면 나도 죽으란 말인가?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실제적으로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내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내게 허락해 주신 권위로 유대인의 왕이 되겠다. 그리고 이 민족이 그토록 소원하고 있는 로마로부터 국권 회복을 내가 이룩할 것이며 이제 너희들은 나의 이 위대한 민족적 거사에 적극 동참해 주기 바란다. 내가 통치자의 자리에 앉을 때는 너희는 이 나라의 열두 국무회원이 될 것이다. 약속하겠다." 이런 말입니다. 그걸 기대하고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온갖 고생을 했는데 이제 남은 일이 지금까지 그렇게 괴로운 신경전을 벌리면서 투쟁하여 오던 그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인 그들이 가장 미워하고 있는 장로들과 대제사장, 서기관들에게 잡혀 고통을 당하고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여 죽어버린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슬픈 패배가 또 있단 말인가? 그럼 우리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것만은 안되겠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베드로의 마음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항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더욱 괴로운 order를 또 하나 내리고 있습니다. 24절에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은 것이니라. 나를 말릴 것이 아니라 너희들도 나와 같이 죽으러 함께 가자"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것이고 베드로가 져야 할 십자가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든지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신의 십자가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사순절의 의미는 바로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십자가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는 시간으로서 역사화된 절기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에 십자가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18장 11절에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이것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 하나님의 자녀들은 평생을 통해서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십자가, 아버지가 주신 의무적 사명이 있다는 것을 지금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그 십자가를 물리치지 말고 네가 지고 가라"고, "나도 지겠다"고 그렇게 교훈 하시는 것입니다.

아주 모습이 초라한 차림을 한 30대 후반의 여인이 제가 몸담고 있던 미국 장로교 노회 사무실에 찾아왔습니다. "누구십니까?" "네, PCUSA 교단에서는 나 같은 여자가 목사가 될 수 있다고 해서 그 길을 알아보기 위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네, 저는 제 남편이 목사이고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어찌나 사명감이 불이 타는지 이렇게 우리 나라와 같은 환경이나 미국 같은 환경에서 조용히 목회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이 지구상에서 가장 못사는 민족을 찾아가겠다고 나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방글라데시 미얀마, 그 중에서도 가장 빈민들이 살고 있는 열악한 환경의 지역을 찾아가서 열심히 선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 사람이 견디기가 힘든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하지 못하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제 남편이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너무 무리하게 선교 활동을 하다가 그만 죽었습니다." 자녀를 거느린 이 엄마는 캄캄한 절망의 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원망스럽고 하나님도 원망스러웠습니다. 남편을 생각하면 자신은 하나님 앞에 죽도록 충성을 하다가 순교자처럼 갔다고 하자. 나와 이 어린아이들의 인생은 무엇인가? 아무 대책이 없는,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말 한마디도 통하지 아니하는 지구상의 가장 열악한 환경의 이 빈민굴에다가 우리들을 갖다놓고 이렇게 죽어버리니 그 부인은 이제 하나님이고 선교고 사명이고 다 귀찮고 당장 울며 매달리는 몇 어린아이들이 불쌍하고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 절망의 한을 가슴에 앉고 할 수 없이 그 곳에다가 남편 무덤을 만들고 어린아이들 셋을 데리고 그 남편 무덤 옆에서 쥐여 뜯으면서 한없는 통곡을 하고 있을 때, 나의 귀에 무엇인가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을 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지금 믿고 있습니다. "너도 이 땅에서 죽어 네 남편 곁에 묻히라" 이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깨어나서 생각해 보니까 그 말이 옳게 여겨지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깨닫게 되어서 남편의 뒤를 이어서 이 일을 이곳에서 계속 하려면 자기가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목사가 될 수 있고, 선교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찾고 찾아서 PCUSA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그런 소리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주신 것이 그것이라고 믿게 되어서 그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바울 선생은 자기 사명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했습니까? "만약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으며 이것을 위해서 죽어야 할 것이다." 때로 우리는 이 주어진 십자가 의미의 나의 고난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갈등을 하고 '이것만은 벗어야지!' 하고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십자가를 주실 때에는 감당할 수 있는 힘도 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나의 사명이라고 자원적 응답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인간 예수의 입장으로 보면 하나님의 인간 구원이 반드시 십자가 죽음이라고 하는 이 끔찍한 사건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것인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가장 쉬운 방법과 그런 능력으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실상 예수님도 그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나님은 할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못하시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만약 못하시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나를 반드시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 인간의 구원의 성취를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들의 신앙 갈등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서 평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까지 헌신적 수고를 하는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 고난의 십자가를 주시는 것일까?' 이런 신앙적 갈등이 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우리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 네 마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나의 생각과 너희 생각은 다르니라. 고난스러워도 그 십자가를 벗지 말고 가보라!" 그게 하나님의 생각으로 나타납니다.

교회 건축을 시작해서 헌금이 수없이 필요한데 목사가 좀 헌금 강조를 할 것 아닙니까? "교회 여러분들! 이런 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헌신을 해야 합니다. 헌금을 해서 교회 건축을 완성합시다." 설교를 마쳤더니 집사님 한 분이 오셔서 "목사님, 나를 위해서 일주일 동안 기도를 해주세요. 내가 큰마음을 먹고 길을 떠납니다." "무슨 큰마음인가요?" "건축 헌금을 한번 크게 해보려고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어딜 가시는데요?" 그랬더니 라스베가스에 가신다고 하세요. "만약에 잭 팟이 터지면 내가 일 불도 빼지 않고 몽땅 건축헌금으로 드릴 거예요." 제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집사님! 하나님은 땀 흘리지 않은 헌금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노름장 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라스베가스 갔다오실 경비 그냥 헌금하시고 가지 마세요. 그걸 하나님이 더 기뻐하십니다." 갔다 오셨어요. 돈 잃고 오셨어요. "그것 봐요. 그 잃은 돈하고 차비,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헌금이 되지 않아요?" 그런데, 이 집사님은 이해를 못하시는 거예요. 나는 정말 그렇게 기도했고, 정말 드릴텐데 왜 하나님은 나를 믿지 않느냐고... 믿지 않으시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 없는 헌신은 헛것이에요. 만약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합시다. 집사님은 일주일에 한번씩 가려고 하실 겁니다.

우리 모두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헌신을 해야 합니다. 각기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여러분이 성경에서 보십시오. 십자가에 죽게 흉계를 꾸민 것은 유대 나라의 지도급 인사들 서기관, 제사장, 장로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흉계에 놀아난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공개적 고소를 한 사람들은 유대 백성이고, 그 민중 데모가 두려워서 공개 처형을 시킨 사람은 빌라도였습니다. 현장에서 못을 박은 사람은 로마 군인이었고, 영문도 모르는 군중은 군중 심리에 휘말려 박수를 쳤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그 중에 누구를 상대해서 싸움을 하셔야 되겠습니까? 빌라도는 실제로 예수를 놓아줄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그 시간에 예수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만일 네가 여기서 정의의 말이나 옳은 말을 하면,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넉넉한 논리를 제공한다면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죽일 권세도 있느니라."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 한 마디 하지 않으셨어요. 왜 그러셨는가 말입니다. "이 일은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이다." 그는 그 시간에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것은 여기 있는 모든 군중들의 흉악한,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니까, 빌라도여! 내가 이 시간 구차한 변명을 해서 네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치사한 말을 하겠느냐? 어서 말하라! 선언하라! 나는 십자가를 지도록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길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는 굳은 결심과 약속을 평소에 합니다. 그러나 정말 십자가를 져야할 시간이 닥치면 십자가는 버리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직계 제자 12명도 똑같은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그 길을 올라가실 때 그 제자들이 했으면 좋았던 일이 있습니다. 로마 군사들이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어깨에 메우게 하고 갈보리 산을 채찍질하면서 올라가게 했을 때 신체적으로 사실 그 일이 너무 힘에 벅차고 무거워서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전설에 의하면 14번 쓰러졌다는 기록이 있고 쓰러진 장소마다 기념하는 어떤 표시를 했습니다. 상황이 너무 안 좋으니까 로마 군인들이 "이 예수는 몸이 약해서 갈보리 골고다까지 도저히 올라가지 못하겠다! 그러면 이 약속에 차질이 빚어지는데 …" 그래서 구경하러 나온 구레네 시몬을 현장 징발해서 "네가 좀 대신 지고 가라!" 그래서 예수님은 잠시 고통을 구레네 시몬 때문에 잊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렇게 용감하게 나서기를 좋아했던 베드로가 나타나서 "주님, 제가 지겠습니다." 하고 그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올라갔다면 …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가장 나이가 젊은 요한이 덤벼들어서 "예수님, 비키세요. 내가 질게요." 그런다면 그 광경이 얼마나 아름답고 또 주님은 기뻤겠습니까? "아, 그래도 내 제자들이다." 그런데 그 현장에 제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눈을 뜬,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라든가,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 때문에 다시 살아난 나사로라든가, 온갖 질병에 시달리다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 혹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 남자가 먹었다고 했는데 5,000명 남자 중에 단 한 사람만 그 시간에 십자가를 졌어도 그 이야기는 영원히 빛날 뻔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몇 가지의 십자가 표시 문화가 생겼습니다. 무덤 앞에 꽂혀 있는 십자가! 영생을 약속하는 뜻입니다. 푸른 색깔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병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질병에서의 구원입니다. 붉은 색깔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인간 고난에 동참한다는 적십자입니다. 교회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하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이 목걸이나 옷에 달고 다니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나는 예수의 제자"라는 뜻입니다. 북유럽 4개국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은 국기가 다 십자가입니다. 네 나라가 똑같습니다. 색깔만 다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나라의 주인이란 뜻입니다.

십자가란 희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성취되고 이루어지는데 내가 어떤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인가? 약삭빠르게 십자가를 피해가며 내가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 마옵소서. 십자가만은 안되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몇 번의 실수를 통해서 예수님께 실망을 드렸는데, 그런 일이 다 지나간 후에 주님 곁으로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때는 로마 황제 가운데 가장 악명이 높은 네로가 미치광이처럼 자기 어머니와 아내까지 모두 죽여버리고 로마시의 모든 기독교인들을 절대 핍박하던 그 시절, 그 험악한 상황에서 베드로는 버리고 갔던 십자가를 향해서 달려옵니다. "베드로의 시" 라고 제목을 붙인 시(詩)가 하나 있습니다.
"오! 나의 십자가여! 내가 버렸던 십자가여! 내 그토록 다시 보고싶던 나의 십자가여!
주께서 달려 돌아가신 그 십자가에 오늘 나 또한 죽게되니 감격으로 그대를 맞노라.
나 얼마나 그대를 그리워했던가! 나 얼마나 그대를 사랑했던가!
그대는 오늘 나를 주님의 곁으로 인도하니 나 이제 그대의 품에 오늘 달리겠노라."

오늘날에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죽이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신앙 생활을 한다고 사회적으로 왕따가 될 염려도 사실 없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진리는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영원히 주님은 우리에게 "이것만은 네가..." 그것이 곧 십자가입니다. "너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저 같은 사람은 하늘나라 갈 때가지 이 목회를 해야 되는 것이 나의 십자가입니다. 각양 각색의 은사 따라 하나님은 십자가를 주십니다. 베드로의 시처럼 "오! 나의 십자가여! 나 그대를 사랑하노라! 내가 지고 순례의 길 가다가 함께 주님 곁으로 갈 나의 십자가여! 십자가 없는 나의 인생의 존재는 의미가 없노라. 사랑의 나의 십자가여!"
주님이 부탁하신 그 십자가를 손에 잡고 믿음의 승리자가 될 것을 이 사순절 기간 동안에 기도의 제목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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