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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택하심을 받은 자의 삶] 창 25: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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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하심을 받은 자의 삶> 창25:21-26
새문안교회 2003. 3.16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야곱은 이스라엘의 족장들 가운데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아버지 이삭에게 넘어와 재확인된 언약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이라 불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창32:28). 그의 이름으로 주어진 "이스라엘"이 곧 언약의 백성의 이름이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야곱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형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산 일과, 어머니 리브가와 짜고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에게 줄 축복을 가로챈 일일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이란 무엇입니까? 당대의 사고로는 처음 난 것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이나 곡식에 있어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 것이라"(출22:29) 하실 만큼 장자의 위치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장자는 가문을 이어갈 책임과 함께 자동적으로 가문의 수장이 되고 유산을 물려받을 때에 남들보다 두 배를 받는 특권(신2:15-17)을 누렸습니다. 야곱은 아우였지만 이 장자의 명분과 권리에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산 이야기는 오늘 본문 바로 뒤인 창25:29-34에 나옵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던 에서가 매우 지치고 배고픈 채로 돌아오다가 야곱이 죽을 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야곱에게 그 죽을 좀 먹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대신 "형의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에서는 "내가 배고파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하며 야곱에게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어 먹게 했습니다.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와 짜고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에게 줄 축복을 가로챈 일은 창세기 27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던 이삭은(창25:28) 어느 날 에서를 불러 그가 사냥한 고기로 만들어주는 별미를 마지막으로 먹고 죽기 전에 마음껏 그를 축복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리브가가 엿듣고는 에서가 사냥하러 들로 나간 사이에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아버지 이삭이 그가 맏아들 에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손으로 야곱을 쓰다듬어보려 할 경우에 살갗이 매끈한 야곱을 털이 수북히 난 에서로 착각하도록 염소 새끼의 가죽을 야곱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힌 후, 자기가 염소 새끼로 만든 별미를 야곱의 손에 들려 아버지 이삭에게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삭은 속아서 야곱에게 축복하고 말았고, 야곱은 형 에서에게 돌아갈 장자의 축복을 도적질한 것입니다.

이 두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형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야곱의 악랄함을 봅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서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얻어낸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속임수를 통해서였지만, 형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넘겨받은 것은 강탈이나 속임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잃은 근본원인이 창25:34에서 언급하듯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에 있었다 하드라도 야곱은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야곱은 동생으로서 마땅히 배고픈 형 에서에게 조건 없이 선뜻 팥죽을 먹게 했어야 했고, 설사 형이 그 대가로 장자의 명분을 넘겨주겠다고 하드라도 그럴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말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정반대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이 과연 어쩌다가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인지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삭에게는 수많은 가솔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가솔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이미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하인들을 놔두고 족장의 아들이 부엌에서 팥죽을 끓이고 있었다고 보기는 힙듭니다. 게다가 어머니 리브가가 특별히 사랑했던 야곱을 하인들처럼 팥죽을 끓이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팥죽을 끓인 곳은 그의 집이 아니라 집에서 떨어진 어떤 곳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집이 아닌, 그의 형 에서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올 길목 어딘가에 자리잡고는 팥죽을 끓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냥에서 돌아오느라 배고플 형이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도록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야곱은 형 에서의 인간적 약점을 최대한 악용하여 장자의 몫을 차지하려는 그의 뜻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상호계약이고 자발적인 합의하에 이루어진 거래였다고 아무리 강변한다 하드라도 한 마디로 악랄한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야곱의 치사함과 교활한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차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예정에 따른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로 우리의 눈을 돌립니다.

본문 바로 앞 절에 보면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다"(창25:20)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26절에 보면 리브가가 에서와 야곱 쌍둥이 형제를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삭과 리브가는 혼인하고 20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임신을 하게 되었으니 이삭과 리브가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리브가의 기쁨은 그녀의 몸 속의 태아가 자랄수록 근심거리로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태 속에는 쌍둥이가 들어섰는데 그 둘이 태 속에서 심히 싸웠기 때문입니다. 본문 22절을 봅니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그 둘이 얼마나 심각하게 싸웠으면 나기도 전에 벌써 그 어미가 "어찌할꼬?" 하며 탄식했겠습니까? 이 둘이 왜 싸웠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먼저 나갈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느라고 싸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먼저 나온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따라나왔을 것입니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웠다"는 말 가운데 "싸운다"는 동사는 주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압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에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아마도 에서는 어머니 태 속에서부터 힘에 있어서 야곱보다 우위에 있었고, 야곱은 비록 힘은 에서에 딸려도 꾀와 악착스러움에 있어서는 그를 능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힘으로 억누르는 에서에게 야곱은 지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쳤던 것이고, 비록 간발의 차이로 형에게 앞자리를 뺏기기는 했으나 막판 뒤집기라도 시도할 양으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여 악착같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따라나왔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머니 뱃속에서의 앞자리 다툼에서 진 야곱이 그 패배를 만회한 것이 바로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넘겨받은 일이고 완전한 역전승을 거둔 것이 아버지로부터 장자에게 갈 축복을 받아낸 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리브가가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 아들들 때문에 너무 근심이 되어서 어찌해야 할지를 하나님께 여쭈웠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 23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여기서 우리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머니 태 속에서의 싸움이나 에서의 경박함과 야곱의 교활함 등과 상관없이 아우 야곱이 형 에서 위에 서게 되는 것은 태 중에서부터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아무리 싸우고 다투어도 만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에서가 아무리 치열한 싸움 끝에 힘으로 야곱을 누르고 먼저 태어나 장자가 되었어도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야곱이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얻게 된 사실이 그것을 실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대로 택하심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그의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결과적으로 보면 야곱이 치사함과 교활함과 악랄함을 동원하여 얻고자 한 것이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정하신 일과 같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하드라도, 그의 비열한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고 그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엄연한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일생을 통해서 야곱이 처절히 겪으며 깨닫게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온실의 풀처럼 자란 야곱은 교활함과 속임수로 장자의 축복을 훔친 바로 그 순간부터 평생 험난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훗날 야곱이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던 애굽으로 내려가 바로 앞에 서게 되고 바로가 야곱의 나이가 얼마인지 물었을 때 야곱은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했습니다. 야곱은 스스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회상할 만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실로 야곱의 일생은 불행목록과도 같았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은 직후부터 그를 죽이겠다는 형 에서의 분노(창27:41)를 피해 부모 곁을 떠나 도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로 가서 지냈는데 자신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악랄한 외삼촌에게서 20년간을 노동력의 착취를 당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인 것과 꼭같은 방법으로 속아 사랑하는 여인을 바꿔치기 당하는 기가 막히는 일도 겪어야 했습니다(창29:14-30). 식구들을 많이 거느리게 된 야곱은 삼촌 라반과 결별하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무섭게 엄습해오는 형 에서의 복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크게 떨어야 했습니다(창32:7-11). 새롭게 가나안에 정착했지만 거기서 야곱은 그의 딸 디나가 그곳의 이방족속의 추장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억류당하는 비극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에 격분한 야곱의 아들들이 누이동생을 성폭행한 자와 그의 아비와 그 온 족속을 도륙하는 무자비한 보복을 감행함으로써 주위로부터 추악한 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창34:1-31).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야곱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은 줄로 알고 말년에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위로 받을 길 없는, 지옥에서의 삶과 같은, 슬픈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창37:12-35).

이 야곱의 모든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특권과 행복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것도 비열한 방법으로 쟁취하려고 한 대가는 너무나 크고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고 그 백성의 모든 행동이 합리화되고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랑하시는 백성이라고 그들의 거짓과 죄악을 눈감아주시고 모른 척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면서 죄 짓는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험한 연단의 세월을 그릇되게 행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살게 하십니다. 물론 택하신 백성에 대한 궁극적인 사랑과 구원의 계획은 변함이 없으시지만 사랑하시는 이에 대한 채찍은 더욱 매서움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만들며 세상사람들처럼, 아니 세상사람들보다도 더, 온갖 거짓과 불의를 행하면서 스스로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쉽게 다 덮어버리려는 어리석은 자, 그래서 야곱과 같은 험악한 세월을 자초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택하심을 받은 자의 삶은 더욱 더 성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안 자일수록 더욱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하여 날마다 진리로 더욱 거룩하여지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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