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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을 바라보며 / 마 14:19, 요 11:41, 요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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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하늘을 바라보며" (마14:19,요11:41,요17:1) 


오늘 아침 무슨 제목을 가지고 설교를 할까? 많이 생각하고 많이 고심했습니다.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설교를 할까 생각을 했었습니다. 인디언들의 친구로 젊음을 모두 불태워 버렸던 데이빗 브레이너드에 대해서 설교를 할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며”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기로 정했습니다. 사실 이 제목은 3년 전 강변교회가 헌당예배를 드리던 2000년 4월 9일 주일에 제가 설교한 설교의 제목입니다.

지금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어수선합니다. 전쟁의 위기가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위기와 경제적인 위기가 여기 저기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나라당 민주당의 정치적 대결이 계속되고 반미 친미의 대결이 심화되며 기독교문명 국가들과 모슬렘문명 국가들간의 문명적 충돌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 교계를 바라보아도 탐욕과 비리와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과 강퍅과 좌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혼란과 불안에 쌓여 있는 한국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하늘을 바라보며 삽시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현실에 무책임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현실에 대한 자기의 입장과 견해에 너무 사로잡히지 말자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력으로 로마 세력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나라의 정치적 회복을 이루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실에 집착하고 있던 제자들을 향해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로부터 임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을 훈련시키면서 세상과 땅을 바라보던 그들의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을 바라보도록 훈련시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째,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늘에서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을 향해서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둘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잠간이고 하늘의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에 잇대어지는 삶을 살도록 노력합니다. 셋째, 우리의 본향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을 바라보며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와 하늘 집을 그리워하면서 삽니다. 이제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라고 가르치셨던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아침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삶의 지혜와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했습니다. 산상설교의 초점은 하늘이었습니다. 팔복의 내용은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세상의 복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늘의 복에 집착하도록 마음을 고쳐 먹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제할 때나 기도할 때나 헌금할 때에도 자기 자신이나 사람들을 의식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를 할 때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말하며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했고 돈을 벌 때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주 하늘을 바라보시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마14:19). 땅에 임하는 모든 축복이 하늘에서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실 때도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고 했습니다(요11:41). 땅에서 일어나는 생사가 모두 하늘에서 정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하루 전에도 예수님은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용17:1). 십자가를 통한 인류 구원의 사역도 하늘에서 정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근심 걱정 두려움에 쌓인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하시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1,2). 우리의 거할 처소는 강남이나 분당의 멋진 아파트가 아니라 하나님이 손으로 지으신 하늘 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도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은 마지막에는 친히 하늘로 올라가셨고 그래서 제자들은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천사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

땅만을 바라보면 마음이 복잡해지고 무거워지고 좁아지고 근심 걱정이 많아지고 답답해지고 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 대신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가벼워지고 넓어지고 평안해 지고 즐거워지고 마음과 몸이 건강해 집니다. 그래서 저는 한 평생 하늘을 나는 꿈을 꾸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강변교회의 지붕을 유리로 만든 것도 강변교회의 성도들이 땅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어디 한번 하늘을 바라보세요. 예일대학교의 자로슬라브 펠리칸 박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땅을 바라보면 비관주의자가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낙관주의자가 된다. 땅을 바라보면 우울한 사람이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밝고 즐거운 사람이 된다.


2 믿음의 선배들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서 하늘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창15:5). 야곱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꿈에 본 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창28:12).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산 꼭대기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출19:20). 다윗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한 다음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뢰기를 마치고"(왕상8:54, 대하6:13). 히스기야왕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히스기야왕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대하32:20). 느헤미야도 하늘의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느1:4).

신약에 들어와서 스데반이 순교 당할 때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7:55).

사도 바울은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을 사모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나니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5:1,2).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베드로도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11:13-16).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도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4:1).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계4:2).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책이 있으니”(계5:1). 사도 요한은 세계의 운명이 로마 황제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데 달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늘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계21:1). 사도 요한의 마지막 모습과 마지막 말은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이었고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이었습니다(계22:20). 


3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서기 410년 알래릭이 이끄는 동 고트족의 군대가 로마를 함락하고 불태웠을 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망했다고 절망에 빠졌었습니다. 대표적인 보수 신학자인 제롬도 이제는 “온 세상이 한 도성과 함께 망했다”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이란 책을 쓰면서 로마 도성이 망한다고 하나님의 도성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하늘을 바라보라고 충고했습니다. 어거스틴은 현세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이원론자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세를 잠정적이고 어둡고 덧없는 과정으로 보았고 하늘을 영원하고 밝고 복된 곳으로 보았습니다. 삼하7:10 이하에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이 솔로몬의 시대에는 물론 어떤 다른 시대에도 성취된 적이 없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렇게도 큰 축복이 현세에서 그리고 땅 위에서 성취되기를 바란다면 그의 지혜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변화무쌍한 인간 사회 안에서는 그와 같은 큰 평안과 축복이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된 평화롭고 안전한 처소는 영원한 처소인데 그것은 참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게 될 자유의 어머니인 하늘의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신국론), 17:13). 어거스틴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도성과 왕국에 대한 예언이 현세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유세비우스의 현세주의적 낙관주의를 어리석고 모순되는 것으로 일축했습니다. 현세에는 행복도 평안도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이 약속이 현세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극히 염치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 단 한명의 성도가 현세에의 비참 가운데서 눈물이나 고통 없이 살고 있거나 살아왔거나 또는 살게 될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며 주장할 만큼 어리석고 맹목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나이다’는 고백이 하늘의 도성 예루살렘의 시민의 고백이 아니었는가?”(「신국론), 20:17).

결국 어거스틴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에서 완성될 영원한 신의 도성인 천국을 바라보았습니다. 「신의 도성」 마지막 권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성화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쉬고 보며, 보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찬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이 없는 마지막에 이루어질 것이다.” (「신국론), 22:30). 어거스틴은 결코 현세에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문화와 문명을 꽃피운 기독교 최고의 신학자였고 목회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시대를 초월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땅을 바라보지 말고 땅에 집착하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라고 충고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칼빈주의 신학자요 부흥사인 요나단 에드워즈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친밀하고 달콤하게 느꼈습니다. "나는 걸으면서 하늘과 구름을 쳐다보았다. 그때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엄위와 은혜에 대한 달콤한 느낌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그것을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다. 나는 가끔 앉아서 달을 쳐다보곤 했고 낮에는 구름과 하늘을 쳐다보며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창조주와 구속주를 명상하곤했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이것이 미국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철학자요 신학자요 목회자요 부흥사였던 요나단 에드워즈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도 항상 하늘을 바라보면서 사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하나님과 천국을 친밀하게 느끼게 됩니다.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볼수록 나는 하늘과 가까워지고 하늘은 나와 가까워집니다. 그러면 나는 하늘의 뜻을 이루는 하늘의 사자가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들의 좁은 마음이 넓어집니다.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답답한 마음이 시원해 집니다. 어두운 마음이 밝아집니다. 더러운 마음이 깨끗해 집니다. 욕심과 탐욕의 마음이 변해서 너그러워집니다. 우리의 모습이 하늘처럼 아름다워지고 신비로워집니다. 우리가 하늘이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사십시다! 땅에 집착하면 망합니다. 롯의 처는 자기 집과 재산에 집착하다가 망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 재물과 돈에 집착하다가 망했습니다. 데마는 세상에 집착하다가 망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과 연결된 삶을 살도록 하십시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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