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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전 공동체 / 잠 29:18, 행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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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 공동체 (잠 29:18, 행 2:17)
나성영락교회 박희민 목사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꿈을 먹고 비전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한 어린아이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무엇을 바라보느냐고 묻자 달을 바라본다고 말했다. 왜 그렇게 달을 바라보느냐고 아버지는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언젠가 저 달나라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아버지 같으면 '이 놈아 정신 나간 소리 하지마!' 꾸중하고 실망시켰을 터인데 그 아버지는 격려했다. 이 어린이가 누군지 아는가? 30년 후에 달나라를 가게 된 제임스 어윈이었다. 그는 어려서 달나라를 가는 꿈을 꾸므로 달나라를 갈 수 있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느 선교사가 제가 사는 시골에 와서 왜 자기가 선교사가 되었는지 간증하는 말을 들으면서 나도 커서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50년대 그 당시는 한국 사람으로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때였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그 선교사를 통해 제게 보여준 하나의 비전이었다. 그 꿈대로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다. 사람은 자기가 꿈꾸고 비전을 갖는 것만큼 자기 인생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인 동시에 비전 공동체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했다. 번역이 참으로 방자히 되었다. 여기서 묵시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비전을 말한다. 즉 비전이 없는 백성은 방자히 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NIV 영어성경에는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are unrestrained"라고 번역을 했다. 여기서 '방자(芳姿)'는 제멋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규모 없이 행동하는 방종의 생활을 말한다. 말하자면 self-discipline이 없는 자유 분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1. 참 비전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나 요새는 비전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참 비전이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사용할 때가 많다. 비전을 쉽게 설명하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마음으로 읽고 보는 통찰력 내지 상상력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장래성이 있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비전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무엇인가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고 그 포부를 이루기 위해 미래를 향해 자기자신을 가꾸며 준비하며 새로워지는 사람을 뜻한다.

사람들은 흔히 '아메리칸 드림'을 이야기한다. 미국은 기회의 나라이다. 이 땅에 와서 열심히 일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는 성공을 흔히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비전은 '아메리칸 드림'과는 좀 다르다. 자신의 어떤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는 꿈을 말하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자칫하면 망상이 되기 쉽다. 꿈에는 두 가지 꿈이 있다. 참된 꿈이 있고 다른 하나는 day dream 즉 망상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하나의 야망이 되기 쉽다. 야망은 비전과 비슷하면서도 좀 다르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에서 생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비전은 그러한 욕망에서 나오기보다는 오늘의 현실과 이기심을 뛰어 넘어 하나님이 참으로 나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계획과 바람을 의미한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인간적인 야망(망상)과 진정한 크리스천의 비전을 혼돈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망상과 비전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 2천년사를 돌아볼 때 기독교인들이 비전이란 미명 아래 아프리카나 남미로 가서 그들의 땅을 빼앗고 정복하며 착취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으면서 그것이 곧 비전을 이루는 삶이라고 착각을 했다. 엄청난 죄를 지으면서 야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을 가지고 비전을 이루는 삶으로 오해하고 착각했다. '착각은 자유'라는 말도 있다.

어느 여학교에서 선생님이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나르시시즘'이란 단어는 본래 희랍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어떤 십대 소년이 숲속의 아름다운 호수에 비친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자기 얼굴에 반해서 침식을 잊고 계속 들여다보다가 그만 물에 빠져 수선화가 되었다는 전설을 들려 주었다. 그래서 소위 자기를 너무 사랑하는 병, 또는 자애병에 걸린 사람을 '나르시시즘'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 여학생이 '선생님 제가 아무래도 그 병에 걸린 모양이에요'라고 말했다. 선생님이 '왜 그러니?' 묻자 그 학생은 '저는 아침에 거울을 보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너무너무 아름다워서 거울을 떠날 수가 없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얘야, 그것은 자애병이 아니라 착각이라는 병이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자기 착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여러분! 비전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하게 행한다는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가? 망상을 쫓으면 패가망신을 하게 된다는 뜻도 된다. 라스베가스에 가서 도박을 해서 일약 부자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망상이다. 야망의 노예가 되면 자신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한다.
그 점에서 우리는 참된 비전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비전이 망상이 아니고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옳은 비전인가를 물어보고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참된 비전을 가질 수 있는가?


2.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비전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상화할 때가 있다. 하나님을 하나님 방법대로 섬기지 못하고 예배하지 못하고 자기 방법대로 섬기려고 할 때 하나님을 우상화하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자기 욕심을 성취하려고 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것이고 그것이 망상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꿈이 무엇인가? 즉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그 하나님의 비전을 나의 비전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의 비전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참 비전을 보여주셨다. 그 분을 나의 비전으로 삼을 때 우리는 나의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버릴 것을 버리게 되고 취할 것을 취하게 된다. 바른 삶의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비전은 마치 북극성과 같다. 우리의 삶의 나갈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전이 없으면 그 삶은 방황하게 된다. 방자하게 된다. 1924년 영국의 학교 교장이요 사교계의 명사인 George Leigh Mallory는 아직 누구도 정복해보지 못한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오르기로 결심했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어렵고 위험한 산에 오르는 이유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산이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그 해 6월 8일 세 자녀를 둔 38세의 맬러리는 동료 앤드류 어바인과 함께 등정하는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다시 세상에 돌아오지 못했다. 75년이 지난 1999년 미국의 등산팀에 의해 산비탈에서 그의 시체가 완벽하게 보존된 것을 발견했다. 그는 분명한 목표나 비전 없이 산을 정복하려는 야망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잃었다.

우리가 비전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것과 눈앞에 어떤 것이 보이고 기회가 주어졌다고 무조건 불필요한 모험을 하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이다. 당장 눈앞에 가로 놓여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정복하기에 급급한 사람들은 왜 그 일을 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옮겨 놓는다. 그 일이 자기자신과 공동체에 가져올 장기적인 결과나 대안을 고려할 줄 모른다. 그들은 신중한 대응보다 즉흥적인 반응을 보인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앞으로 나가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충동적인 행동을 성경은 '비전이 없으면 사람이 방자히 행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남의 비전을 빌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을 흉내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성공한 것을 보고 나도 그것을 흉내낸다. 그 때 성공할 확률이 적다. 마틴 루터 킹은 장기적이고 창의적인 문제해결의 사고를 거부하는 것을 이렇게 묘사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손쉬운 답과 섣부른 해결책을 찾고 있다. 그들에게는 생각하는 것이 최고의 고통이다.'

교회 성장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교회 프로그램을 흉내낸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원리를 우리의 상황에서 독창적으로 계발해야 하는 것이다.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은 일종의 허영심이다.
제임스 콜린스와 제리 포라스는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이란 책을 썼다. 그들은 높은 공격적 목표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크고 높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리하게 힘을 합하며 죽을 힘을 다함으로 대단한 결과를 가져온다. 많은 회사들이 이런 목표를 받아들일 때 어느 정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사실이다.

많은 그리스도인 리더들도 공격적 목표를 내세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큰 꿈을 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섬기는 능하시고 위대한 하나님께 어울리는 큰 꿈과 목표를 세워야 한다'고 설교한다. 많은 성도들이 가슴 벅차하며 듣는 순간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성경적인가?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시는 비전인가를 물어볼 때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포장한 자기 자신의 야망일 때가 많다. 우리는 종종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 지식과 철학을 설교하는 것을 들을 때가 많다. 많은 기독교 강단에서 인본주의적인 요새 말하는 new age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메시지를 자기도 모르고 전하고 있는 것을 볼 때가 많다.

이사야 55장 8-9절에 보면 이렇게 경고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셨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아무리 한 때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흥왕하는 것 같아도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세워지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박태선 운동이나 레마 등 한 때는 굉장한 것 같아도 다 무너졌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일시적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거기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참 복음이 있고 하나님 방법이 비효율적이고 힘드는 것 같아도 그것이 승리한다. 열매가 있다. 가짜는 오래 가지 못한다. 사람들이 곧 싫증을 낸다.


3. 크리스천의 비전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어떤 성경에는 "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망한다"로 번역을 했다. 이 점에서 세상적인 비전과 크리스천의 비전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 비전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비전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한계를 느낄 때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며, 하나님은 종종 고난과 역경을 통해 또는 실패와 실수를 통해 우리를 더욱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평안한 자리에서보다 막다른 골목에서 오히려 우리에게 나갈 비전을 보여 주신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보면 "말세에 내가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비전)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 소망이 완전히 끊어졌을 때 비전을 보여 주셨다. 그의 후손이 하늘에 별과 같이 되고 땅의 티끌처럼 편만하며, 그를 통해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이 놀라운 비전과 축복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는 불안했다. 그는 인간적인 방법과 세상적인 방법으로 그 약속을 성취해 보려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으며, 이스마엘을 통해 그 꿈을 이루려는 유혹을 받았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오히려 실패하고 어려움을 당하게 된 이유였다. 우리도 이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 중에 기다려야 한다.

참된 비전만큼 힘있는 것이 없다. 링컨 기념관 계단의 25만 군중 앞에서 '나는 꿈이 있다'고 외친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은 청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곧 나라를 뒤흔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가 하나님께 받은 비전을 어떻게 회중에게 전해서 공유하게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도 그 비전을 보여주도록 기도해야 한다. 자기가 받은 비전에 참여하라고 다그치고 강요하기보다 성령님이 그 비전을 온 성도가 공유하도록 기도하고 도움을 구해야 한다. 그 비전을 겸손히 나누어야 한다. 그 나눔과 증거를 통해 다른 사람도 같은 비전을 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간접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직접 듣게 해야 한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계시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요 15:15).

내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이나 환상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확신시키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그들이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목숨 걸고 그 일을 수행한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면 누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그 분이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시기를 원하는 비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통해 자기가 해야 할 비전을 바라보았을 때 사람들은 흔쾌히 자기 삶을 조정하고 헌신하게 된다. 시간과 물질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치게 된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때 기꺼이 헌신하고 희생하게 된다. 잘 나가는 직업을 포기하고 선교지로 떠난다. 생활이 보장된 교수직이나 의사직이나 전문직을 포기하고 가난하고 고난 당하는 사람들과 지내는 것을 더 큰 기쁨과 보람으로 생각하게 된다.


4. 그럼 어떻게 우리의 비전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까요?

우리가 나의 비전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비전을 이루어 가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비전에 동의하고 그 비전을 함께 나누어 갖는 공유가 필요하다. 피터 센지라는 분은 '수동적 동조가 헌신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90%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비전의 공유는 그저 수동적 동조를 말하지 않는다. 그 이상으로 이 비전을 위해 자기의 시간과 물질을 바치고 열정적으로 헌신하려는 결단을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참으로 그 비전을 공유할 때만이 사람들은 자기 삶을 흔쾌히 조절하게 된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비전을 공유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나의 비전을 나눌 수 있는 것인가? 사람들에게 비전을 주입해도 안 되고 자신의 비전이 하나님께서 왔다고 입증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리더는 자신이 보고 경험하고 확신하는 비전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는 있다. 리더가 비전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방법에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생생한 비전의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상징과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란 말처럼 상징과 이미지는 조직의 가치관과 비전을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예를 들어 마하트마 간디는 상징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동원한 대표적 예다. 영국의 식민지 생활로부터 해방과 독립을 주장하던 간디는 인도 국민이 스스로 극심한 가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상징물로 물레를 활용하였다. 물레로 수제품을 만들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동시에 영국산 제품을 보이코트 하는 운동을 벌였다.

윈스턴 처칠도 상징을 사용할 줄 알았다. 영국이 가장 황량하던 시절, 결의에 찬 처칠이 들어 올린 승리의 V자는 사기가 저하된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재단합의 상징이 되었다. 이것은 2차 대전을 통해 가장 강렬한 이미지였다.

결론적으로, 비전을 실현해 가기 위해 구체적으로 목표를 세워 실천해 가야 한다.
예를 들어 500명의 평신도 소그룹 리더가 이 교회를 섬기고 목양해 가는 비전을 세웠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연차 계획을 세워 구체적으로 실천해 가야 한다.

목표를 세울 때 많은 도움이 된다. 목표는 방향 및 목적 감각을 제시해 준다. 목표는 현재에 활력소를 불어 넣어준다. 목표는 조직에 열심과 강한 생명력을 불어 넣어준다. 목표는 보다 효과있게 운영케 도와준다. 목표는 계획을 미리 수립케 한다. 목표는 조직체 안에서 의사소통을 돕는다.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이 기대되는가를 확실히 이해케 한다. 목표는 쓸데없는 갈등과 이중 노력을 덜어준다.

그러나 목표 설정 시에 유의할 것은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세우면 안 된다. 그래서 영어로는 Smart 하게 세우라는 말이 있다.

1) Specific(구체적) - 목표는 구체적으로 세워야 한다.
막연하게 주님께 영관을 돌리기 원한다면 비전 성취를 위해 큰 도움이 못 된다.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2) Measurable(측정 가능한) 목표를 세워야 한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내용과 time schedule까지 언급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2006년까지는 새 교회 건축을 완공하고 소그룹 사역을 위해 500명의 평신도 지도자를 훈련한다든가 하는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 도움이 된다.

3) Attainable(도달 가능한) 목표를 세워야 한다.
터무니 없이 불가능한 목표를 세워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비전 없이 목표를 세워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은 안에서 가능하다고 확신되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4) Realistic(현실적인) 목표를 세워야 한다.
어떤 대학생이 '나는 내년에 이 학교의 총장이 되겠다'면 현실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20-30년 후에 내가 이 학교의 총장이 되겠다고 목표를 세웠다면 그것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중간 목표를 세우고 성취해 감으로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현실성이 있는 것이다.
5) Tangible(확실하고 손에 잡히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나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겠다' 혹은 '성령 충만을 받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은 막연한 측정 불가능한 목표이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 매일 30분간 말씀 묵상하고 새벽기도회를 통해 영성 훈련을 쌓겠다는 것은 구체적인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하나하나 실천에 옮겨 나갈 때 그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한인 교회는 비전 공동체로서 요셉이나 모세나 다니엘이나 에스더 같은 미국 주류사회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러한 인물을 많이 길러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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