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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달란트 비유 / 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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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14-30 달란트 비유
벅웅섭 목사 (남성교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병이 있다면 그것은 열등감일 것입니다. 이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나는 못생겼을까?  왜 나는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가? 왜 이렇게 나는 못 생겼는가? 우리 집은 왜 평수가 작은데서 살아가는가? 수도 없는 열등감속에 살아가면서 평안과 기쁨을 상실해 버린 채 우리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열등감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의식에서부터 비롯되어 집니다. 옆집 아들은 좋은 직장을 구하고 결혼도 잘 하는데 너는 이게 뭐니?  옆집 남편은 돈도 잘 벌고 부인한테 잘해 주는데 당신은 왜 그러냐고? 옆집 여자는 얼굴도 잘 생기고 남편한테 고분 고분잘하는데 당신은 왜 그러냐고 비교하면서 상대적인 열등 속에서 우린 자유하지 못하고 감사를 잃어버리고 우리가 해야될 일도 잊어버린 채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운 우리의 모습입니다.
열등감으로 인하여 남이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라는 속담이 있듯이 다른 사람을 향하여 원망과 적대 감정까지 만드는 것입니다.
질투의 원어가 '악한 눈'이란 뜻은 상당히 의미롭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나 아닌 '타인'은 서로 돕고 어려움을 나누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겨 왔습니다. 그리고 경쟁에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항상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나보다 앞선 사람, 나보다 나은 사람에 대하여는 순수한 축복의 눈길보다 시기와 질투의 눈길을 보내 왔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경건한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사탄들은 회의를 열어 수도자를 타락시키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방법으로 사탄은 수도자에게 커다란 금덩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수도자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내 눈앞에서 교태를 부리게 했습니다. 수도자는 마치 돌을 보듯 무표정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강력한 무기를 동원했습니다. 수도자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심으며 속삭였습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금욕생활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당장 포기하라" 그러나 수도자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습니다. 결국 사탄의 우두머리가 나섰습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수도자를 유혹할 수 없다. 내가 최후의 방법을 동원하겠다." 사탄의 우두머리는 수도자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당신의 경쟁자가 방금 종단의 총재로 피선됐다는 소식입니다." 수도자는 이 말을 듣고 벌컥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인간이 가장 큰 약점 중 하나는 경쟁에서 한없이 나약해진다는 것입니다. 경쟁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진정한 성자입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고 상대적으로 자신을 비관하는 것은 큰 병중에 병인 것입니다.

특별히 이 열등감은 교회 안에서 독버섯처럼 퍼져 있는 것을 봅니다.
세상과는 달리 교회에서 만큼은 열등감이 없을 것 같아도 어쩌면 세상보다도 더 많은 열등감으로 힘들어하고 자기가 열등감의 병이 들어있다는 인식조차도 못하고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성도들이 태만인 것 같습니다.
이 열등감은 세상이 창조되고 죄로인해 타락되어진후 사단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열등감에 한 번 사로잡히게 되면은 나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게 되어지고 날마다 감사는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속에 허송세월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달란트 비유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을 불러 놓고 각각 그 재능대로 어떤 이에게는 5달란트를 어떤 이에게는 2달란트를 또 어떤 이에게는 1달란트를 주고 떠납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 5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10달란트를 가지고 주인께 돌려 드릴 때 주인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겠다고 칭찬을 듣습니다.
2달란트를 받았던 종도 똑같이 4달란트를 주인께 바치고 똑같은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1달란트를 받았던 종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1달란트를 받았던 종을 살펴 보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나는 혹시 1달란트를 받은 종 같지는 않는지 한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1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아예 그 달란트를 가지고 일해 보려는 시도도 안한 채 달란트를 땅에 묻어놓고 그 기나긴 시간을 보내 버리는 안타까운 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도리어 주인에게 불평 불만을 토로하면서 변명하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왜 이1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일도 하지 않은 채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았을까요?

첫 번째 그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열등감은 바로 비교의식에서 비롯 되어집니다.다른 종은 5달란트를 주고 또 2달란트를 주는데 왜 나만 1달란트를 주느냐 그래서 1달란트를 소중히 생각지 않고 주인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시간을 낭비해 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종들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1달란트 받은 종은 아예 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것을 땅에 묻어 놓고 허송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열등감의 시초는 바로 사단에게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사단이 타락하기전 그는 최고의 능력과 지혜를 갖춘  천사장 루시퍼였습니다. 그런 그가 교만하여 자기의 위치를 높여 하나님과 비교하려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진노하시고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뜨려 마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마귀 사단은 아담을 꾀어 그에게 비교의식을 불어넣고 하나님처럼 되게하려 하여 죄를 짓고 타락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이후 태어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리고 온갖 비교의식의 포로가 되고 만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살벌한 경쟁의 사회 속에 살아갑니다. 이 경쟁이 있는 곳에는 바로 비교의식이 함께 있고 비교의식이 있는 곳에는 열등감이 항상 함께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두가지기 있는데 하나는 “너 공부해” 이고 또하나는 “너는 걔만도 못하니” 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린이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봅니다.
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남과의 비교로 인해 상대적으로 열등감에 사로 잡히게 되고 열등감이 생기게 되면 우린 무력하게 되어지고 그 무력함이 오늘 1달란트 받았던 사람처럼 기나긴 시간을 허송세월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의 친구중에 친한 친구 한명이 있습니다. 유치부때부터 함께 교회에서 자라온 친구이고 지금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그 친구는 비록  지방대학을 나왔지만 졸업하자 마자 아시아 자동차에 입사해서 직장을 잘 다니다가 어느날 고시공부를 한다고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서 신림동 고시촌에서 고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대학을 나와도 취직을 못해 힘들어하는데 왜 직장까지 포기하고 이러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 친구의 고민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집이 아버지가 장로님이시고 어머님이 권사님이신데 어머니가 열심히 기도를 하십니다.자녀가 5남 2녀이고 그중에 친구가 차남입니다.그런데 모두 공부를 잘했습니다.

형이 지방대학이지만 의과를 졸업해서 지금 봉천동에서 병원을 하고 계시고 누나는 이대를 졸업해서 매형이 교수이고 밑에 동생이 고대 의대를 졸업해서 삼성병원 정형외과 과장으로 있다가 지금은 법의학 고시가 있다던데 의학 계통에서는 제일 어렵다고 한던데 그것을 준비하고 있고 그 밑에 동생이 서울대를 졸업하여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또 그 밑에 동생이 서울대를 졸업하고 모두가 다 공부를 잘해서 나름대로 기를 펴고 사는데 자신만 명암이 회사원이란 사실이 도저히 형제들 사이에서 위치가 서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고시를 패스해서 자신의 위치를 높여야 되겠다고 솔찍히 고백하는 애기를 들었습니다.
지금은 결혼해서 개인 장사를 하고 있지만 그 친구를 볼 때 마다 지난날 좋은 직장을 버리고 고생한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형제들이 자신보다 좋은 위치에 있으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칭찬을 보내야지요
왜 그것을 자신과 비교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시간을 낭비하고 얻어지는 것은 고통과 아쉬움 밖에는 남지 않는 것입니다.
과연 제 친구만 그러는 걸까요
비교하지 맙시다.
내게 준 그 달란트를 소중히 여기십시다. 그것 감당하기도 힘이 듭니다.


둘째는 이 사람의 잘못된 점은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는 사명을 몰랐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종이고 종은 당연히 주인의 뜻을 따라야하고 주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종은 종 다와야 됩니다. 종이 주인처럼 함부로 생각하고 결정한다면 그것은 종이 할 일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각각 그 재능대로 달란트를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린 우리가 우리를 생각할 때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의 분수와는 상관없는 과대 망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에게 있는 1달란트의 소중함을 모르고 나에게 필요 없는 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허왕된 달란트만을 고집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인은 누구보다도 종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압니다.
우리는 주관적인 나를 아는 것으로 자신을 잘 안다고 하지만 주인은 개관적인 나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능력과 나의 자질을 그 누구보다 잘 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맞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달란트를 맡기셨건만 그 달란트를 감당할 노력은 안한 채 다른 사람의 달란트만을 흠모하고 상대적인 자신의 달란트를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것은 종이 해야 될 모습이 아닙니다.

1달란트의 가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1달란트가 어느  정도의  가치가  되느냐 하는 것은 쉽게 우리가 계산  할 수 있습니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 이라고 합니다. 6000데 나리온이면, 이 데나리온은 1데나리온 할 때는 보통 일꾼들이 남의  집에 가서 일 해가지고 얻을 수  있는  일당 수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말하면 5만원 정도,  일당 수입이라고 잡으면 됩니다. 그렇 다면  1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이니까, 1달란트는 우리나라 돈으로 3억 정도 되는 돈입니다.
작은 돈이 아닙니다. 장사할 수 있는 충분한 돈입니다.
그것만을 가지고도 머리를 짜매며 분주히 일해도 부족할 형편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1달란트의 소중함을 묻어놓고 귀한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종으로서 겁없는 행동입니다.  또한 교만의 극치입니다.
열등감의 이면에는 사실 이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열등감으로 인해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하여 피해를 끼치는 사실을 우리는 대구 지하철 사건을 보면서 느낍니다.
생각하기도 실은 일이지만 한사람의 열등감이 사회에서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건강하지 않는 신체의 열등감이 결국은 엄청난 아픔과 충격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정도로 열등감은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를 파과하는 암적인 병임을 알아야합니다.

자신의 처지와 자신의 달란트를 겸허하게 인정하려는 마음은 제쳐놓고 자신이 인정받기를 나아가서는 극단의 방법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불행한 일을 낫게 만드는 것입니다.
1달란트를 받은 종의 행동을 보십시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봅니다.

1달란트를 차라리 은행에 맡겨두면 이자라도 얻을 수 있을 터인데 그것을 고스란히 땅에 묻어놓는 겁없는 행동은 교만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이 종은 절대로 자기가 잘 못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무슨 할말이 많다고 5달란트 나 2달란트를 받았던 종보다도 길게 변명하며 주인에게 말하는 모습은 분명 정신이 하나 없는 사람 같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잘못했다고 말해도 부족할 형편에 도리어 주인 당신은 굳은 사람입니다 라고 주인께 불평하고 항변하는 모습을 봅니다.

항상 일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 말이 많습니다. 뭐가 안좋아서 일을 잘 못했느니 상황이 안좋아서 일이 잘 아되었느니 구절 구절한 변명을 많이 합니다.
잘 못했으면 그냥 잘 못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다음에는 잘 해 보겠습니다라고 인정하면 될터인데 도리어 말을 많이 ㅎ바니다.
주인은 이사람을 향하여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게으르다는 것은 인정이 가지만 악하다는 표현은 좀 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 도 있겠습니다만 앞 뒤 정황을 보았을 때 분명 이 사람은 악한 종 이었습니다. 본전 그대로 가지고 왔지만 그리고 자신은 당당한 것 처럼 행동하고 살아왔지만 주인의 기준에서는 악한 자 였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게으름은 둘째 문제이고 먼저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달란트는 우리의 사명이라고 말해도 될 듯 싶습니다.
사명 감당하지 않는 것은 주인의 관점에서는 악한 것입니다.
주인은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오랜 후에 돌아와서 회계 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오랜 시간은 분명 기회의 시간이었습니다.
주인은 분명 똑같은 기회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 기나긴 시간동안 1달란트 받은 종은 이래서는 안되겠지?

만약 주인이 오시면 어떻게 하지? 주인이 기뻐 하실까?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그는 묻어놓은 달란트를 다시 찾아 일 할 수 있는 기회는 몇 번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종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면서 도전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종은 그 많은 시간동안 일하지 않고 허송세월 보내고 만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가 좋아하는 오락과 필요없는데 정력과 시간을 낭비했는지도 모릅니다. 19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주인이 돌아오는데 성경은 오랜  후 에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혹시 한 달란트 맡았던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주인이 떠나간 후에  오랜 동 안 돌아오지 않으니까 아마도  주인 은 영 돌아오지 않을지  몰라. 그리 고 맡겨주신 것에 관해서 전혀 책임 의식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마태 복음 24장과 25장은 한 중요한 신학 적인 주제,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주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사건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서  우리는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말은 세상이 끝난다  그래서 아우성을 치고  뭐 집을  떠나고  가정을 떠나고 직장을 등지고  산으로 올라가든지 기도원으로 올라간다든지 그것이 종말론적 신앙이 아닙니다. 이 종말론적 신앙의 본질은  언제나 역사 속에 다시 오실 수  있는 그 분, 그리고 역사를 마침내 심판하고 결산할 그분 앞에서  종말이 와도 내 개인의 종말이 언제 와도 그분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되어져야 할 삶,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그 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내 삶은 심판된다, 회계의 날은 온다 ,그 날은 반드시 온다 이  사실 을 참으로 믿는다면 오늘  하루하루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겨 주셨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주인이 종들에게 맡기듯 저와  여러분들에게 우리 주님을 많은 것을 맡겨 주셨습니다. 무얼 맡기셨습니까? 시간도 맡겨 주시고, 돈도 맡겨 주시고,  재능도 맡겨 주시고, 은사도 맡겨  주시고, 또 우리의 몸도  맡겨 주시고, 우리의 목숨, 인생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갖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맡겨 주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돈이 얼마나 많으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맡겨진 돈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재능과 달란트를 갖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달란트, 탁월한 재능을 갖고도 별로  볼 품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 있습니다. 아주 적은  재능을 갖고도 그것을 아주 유익하게  이웃들에게 기쁨을 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몸을 가지고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느냐?  나의  인생에서 얼마나 기회가 주어졌느냐  출세할 수 있는 기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인생에서 얼마나 좋은  기회가  주어졌느냐 그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사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삶을 다 살고  맡겨  주신 모든 것들을  다 관리한  후에  마지막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들은 모두 둘  중에 하나로  결정될  것입니다.
하나는  착하고 충성된  종 하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나는 어느 편에 속할까요? 우리  인생이 결산되는 그날 착하고 성실한  종, 충성 된 종으로 결산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의식이 있다면 맡은 자 의식  입니다. 청지기 의식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종입니다.
종은 마땅히 주인이 하라는 대로 순종만 하면 종의 할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마음을 끼쁘게 하는 것이 종이 할입니다.
그러나 종이 주인처럼 사명을 주셨는데도 사명을 무시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셋쩨 .주인의 마음을 의도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결과를 보기보다는 과정을 보십니다.
최선을 다 했는가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주인은 5달란트를 받았던자나 2달란트를 받았던 자나 상관없이 그들이 열심히 일했던 그 과장을 보시고 그들을 칭친하시는 것이고 많이 남겼다고 더 칭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두려워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변명입니다.
정말 두려워했다면 행동을 이같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그가 주인을 대면하여 주인이 나쁘다고 감히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달란트는 나의것이 아닙니다. 달란트는 주인의 것이고 주인은 달란트를 나에게 맡겨 두시고 또 때가 되면 그것을 찾으십니다.
주인이 원하시는 것은 종이 그 주인의 맡겨두신 달란트를 얼마나 최선을 다 해 감당하는 지 그것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주인은 부족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달란트를 맡겨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달란트를 남겼는가에 관심이 없습니다.
얼마나 노력했는가 그것을 보십니다.
만약 1달란트 받은 종이 그것을 묻어 놓지 않고 열심히 일하였지만 앞에 두 종들처럼 2배의 결과를 가지고 오지 못했더라도 주인은 이렇게 나무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인의 마음은 주인의 그 의도를 알고 다만 주인을 기쁘게 하기위해서 종으로서 최선을 다 하는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린 하나님의 생각과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호세아 6;3에서“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했습니다.  또 호세아서 에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 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와 생각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롬12:1 너희는 이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린 안다고 하지만 잘 알지 못합니다. 잘 알기 위해서는 늘 하나님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행동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말이 아닙니다. 형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동입니다. 믿음이 있고 행동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는 그대로 묻어 놓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가지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최선을 통해 열심히 일하면 반드시 배의 축복을 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의 방법대로만  한다면 오늘 5달란트 받았던 자와 2달란트 받았던 자처럼 배의 축복을 받으심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중심이고 과연 그것을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했는가를 보십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의 자서전 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지미 카터는 미 해군 원자력 부대의 책임자였던 하이만 리오 제독과 면담했던 내용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이만 리오 장군은 여러 해 동안 그 분야의 책임자로 있었습니다. 핵 잠수함 부대에서 일하려면 반드시 리오 장군과의 면담을 통해서 배속승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 중에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도 있었습니다. 지미 카터가 제독과 인터뷰하는 동안에 제독은 여러 질문들을 하였습니다. 시사문제,해군생활,음악,문학,해군전략,전자,사격술 등의 질문들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대답을 하였지만은 제독은 ‘나는 자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네’라는 듯이 부연을 덧붙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질문들이 오가는 동안에 카터는 옴 몸을 땀으로 적시고 긴장된 모습으로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질문이 던져 졌습니다.

카터는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는데 그때 “해군 사관 학교에서는 몇등이나 했나?”라고 제독이 물었습니다. 그는 해군 사관학교에 들어오기전에 죠지아 공대에서 4년을 마치고 들어갔기에 비교적 우수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있게 “820명중에서 59등을 하였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는 잘했다는 칭찬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독은 “그것이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라는 뜻밖의 물음에 “네”라고 했다가 “아닙니다”항상 최선을 다하지는 못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때 지미 카터에게 평생 잊을수 없는 결정적인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나” .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최선을 다 했는가?
달란트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1달란트를 받았던 많은 사람들도 인생의 위대한 업적을 남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아인슈타인 이후의 최고의 두뇌로 알려진 스티븐 호킹 박사는 대학원 1학년때 ‘근육 위수축성 경화증’이란 불치병에 걸려서 3년밖에 못살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지만 얼마후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좋다 시한부 삶이라면 어떤가? 내 인생이 짧은 인생이라면 더 값지게 시간을 활용해야지
나에게 부여된 삶의 시간이 얼마 되든지 알 수 없지만 계속 일을 하자 어쩌면 생각보다 연구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의사들의 진단과는 달리 3년이라는 시한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살아있고 세계 물리학계에 엄청난 업적을 남겨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학자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관 32세의 나이에 사상 최연소 영국 왕립협회 회원이 되어씁니다. 그의 건강은 지금도 계속 악화 되어 가고 있으며 지금도 시한부인생을 살고 있지만 스티븐 호킹은 지금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달란트 또는 재능의 달란트 직분의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달란트를 그것이 작은 젓이라고 땅에 묻어 놓을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해 잘 감당하셔서 하나님이 찾으실 때 기쁨으로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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