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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 조만식 장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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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 수요강해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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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3/23 (10:13) from 218.237.249.139' of 218.237.249.139'  Article Number : 230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31)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 조만식 장로로
벧전1:18-23


우리는 주일 아침마다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죽음을 되돌아 보면서 많은 도전과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한국민족의 지도자요 한국교회의 지도자인 조만식 장로님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한국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고 한국교회를 사랑한 봉사자였습니다. 그는 주기철 목사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한경직 목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과 김화식 목사님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기독교의 중심 사상인 사랑과 평화를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고당 조만식 장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조만식 장로는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스승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큰 것임을 우리는 조만식 장로의 삶에서 발견합니다. 오산 학교의 선생이었고 교장이었던 조만식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한국민족과 한국교회의 지도자가 된 사람들 중에는 주기철 목사와 한경직 목사와 함석헌 목사와 백인제와 주기용과 김항복과 김홍일이 등이 있었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이들 지도자들의 스승이요 지도자였습니다. 조만식 선생이 어떻게 지도자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이제 조만식 선생이 지도자들의 스승과 지도자가 되기까지의 삶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한경직 목사가 태어나기 20년 전인 1882년 12월 24일(양력 1883년 2월 1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났던 1882년은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이 맺어져 한국이 서양에 대해 문호를 처음 개방한 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조만식은 어릴 때부터 자연히 미국 선교사와 기독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가 열한 두 살 되었을 때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내가 서양인을 처음으로 보기는 열한 두 살 되었을 때라고 생각되며, 보았던 곳은 대동문 안 한석진 목사 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목사의 맏 자제 갑손이는 나의 글동무였는데 이 집에 서양인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놀 겸 구경 겸 자주 가서 서양인을 보았습니다. 그 때는 서양인이 아니고 양귀자였지요. 이 양귀자가 마포 삼열목사였는지 혹 다른 목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커먼 옷, 커다란 눈, 높은 코, 참말로 모든 것이 놀랍고 이상스러운 눈으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양귀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약을 먹여서 미치게 하는데, 약 먹이는 방법은, 몰래 얼른 입에다 슬쩍 스치기만 하면 곧 미쳐서 양귀자가 하라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말 때문에 자주 구경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때마다, 양귀자 냄새가 나는 책자를 줍디다. 지금 생각하니 이 책자는 한문으로 번역하여 인쇄한 쪽 복음 즉 마태복음 누가복음 기타 부속 서류인 인가귀도 덕혜입문 등과 같은 조그마한 전도 서류였는데 양지 냄새와 인쇄 묵 냄새들이 양귀자 냄새로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냄새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인가 하여 좀 맡아보고는 내어버리던 것이 어제와 같은데, 벌써 40여년 전 옛날 묵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 한 사람에 의하여 길선주 목사가 복음을 듣게 되었고 이기풍 목사가 회개하게 되었고 한경직 목사가 복음의 씨앗을 받게 되었고 조만식 장로가 복음에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전도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게 됩니다. 조만식은 어린 시절 한석진의 아들을 글동무로 삼아 그의 집에 드나들면서 선교사를 만나 그가 주는 쪽 복음과 전도문서를 통해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상업에 종사하다가 실패하여 홧김에 놀음에 빠졌는데 이 때 한교정이라는 청년이 그에게 찾아와서 예수를 믿고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해보라 권고했습니다. 조만식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숭실학교에 입학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하루 저녁에 술 친구들을 다 불러 놓고 마지막으로 밤이 새도록 이별주를 마시었습니다. “자네들 다 좋은 친구들인데, 오늘이 마지막일세. 난 예수 믿기로 작정했네. 이제부터 나는 숭실학교에 가서 공부하기로 했네. 나라를 살리기 위함일세. 앞으로 자네들, 내 친구가 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하네.” 아침이 밝을 때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입에서는 아직 술 냄새가 나고 발걸음을 갈지자로 걷는 몽롱한 꼴을 하고 조만식은 숭실학교를 찾아가 당시 설립자요 교장이던 배위량 박사를 만나 입학을 요구했습니다. 배위량(Baird) 박사는 조만식의 주정뱅이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공부는 무엇 하려 하려나’ 라고 말하면서 입학할 자격이 없다는 표시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가 막힌 대답을 했습니다.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소” 라고 꼬부라진 혀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 말에 배위량 박사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좋소!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으로 공부하시오” 하면서 조만식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조만식은 1905년 23세 때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며 지금까지의 방탕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숭실에서 '거듭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그는 많은 기쁨을 맛보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숭실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공부하고 기도하고 또 전도하고 그러고는 학우들끼리 즐겁고 웃고 놀고 불규칙하나마 운동하고 이렇게 학우들은 친밀이 사귀며 지냈다. 여기는 반목도 질투고 시기도 파벌도 너와 나도 없는 참 사귐이었으며 참 낙원이었다." 이렇게 조만식은 1905-1908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되어가는 시기에 숭실에서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며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조만식은 숭실을 졸업하자 1908년 4월 일본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경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영어를 전공했습니다. 이 때 조만식은 인도 간디의 '자서전'을 읽고 그의 무저항주의와 평화주의에 철저히 공명하였습니다. 29세에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진학했습니다. 

조만식은 1913년 명치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평북 정주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습니다. 오산은 그가 존경하던 남강 이승훈 선생이 사재를 털어서 창립한 학교였습니다. 오산은 개교이래 선생과 학생이 함께 기거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만식 선생은 여기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학생들에게 강도 높은 신앙훈련과 인격훈련을 시켰습니다. 오산에서 조만식 선생의 지도를 받았던 김기석과 김홍일은 이렇게 스승을 회상했습니다. "그는 아침 6시에 학생들과 같이 일어나 아침체조를 같이 하고 학생들 틈에 끼어 구보도 같이 하였다. 그 때 오산학교는 사환이 없고 청소를 위시하여 난로 피우기 장작패기 같은 일은 선생과 학생들이 맡아서 하였다 고당은 여러 번 학생들을 데리고 제석산에 가서 오리나무를 베어 같이 날라왔다. 겨울에 눈 오는 날 아침이면 고당은 맨 먼저 교정에 나와 선생과 학생들이 다닐 길을 내고 운동장 눈을 쓸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생활을 지도하고 같이 장작을 패고 눈을 쓴 것뿐이 아니었다. 그는 기도회를 주관하여 기도를 올리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였다. 그는 언제나 민족을 위하여 간구하는 기도를 올렸고 설교를 듣는 사람의 마음에 맑은 물결을 일으켰다. 고당이 오산에 온지 1년이 못 넘어 오산은 놀랍게 변모되었다. 교직원과 졸업생은 다시 단결을 찾았고 학생들 사이에는 검소한 기풍이 번져나가고 학교와 교회에는 새로운 신앙이 불타 올랐다"

조만식 선생은 오산에 부임한지 2년 후에 교장의 자리를 맡아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는 교장이면서 사감이면서 사환과 교목까지를 겸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같은 돈독한 목자들이 나온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백인제가 독일로 유학을 가고 주기용과 김항복이 교육에 헌신하기로 하고 김홍일이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고 홍종인이 신문기자가 되고 이호와 임극제가 이과계통에 진학하고 한 것이 고당의 영향 아님이 없었다. 이 예언자를 겸한 교육자는 언제나 제자들에게 경건한 신앙과 높은 이상과 민족을 위하여 바치는 헌신의 감정을 불어넣었다. 스승의 고매한 모습과 맑은 목소리는 제자들을 게으른 잠에서 깨어 일으켜 그들의 혈관 속에 새로운 피를 부어넣어 주었다. 고당은 오산에 있으면서 보수를 받은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수 받는 동지들에게 보수를 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넉넉한 형편을 미안하게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고당 선생께서는 그 때 오산중학에서 수신(도의)에 해당하는 성경을 가르치시고, 또 특별예배도 주도하셨는데, 하루 아침엔 수신시간에 들어오셔서 성경을 가르치시며 예수님이 인자로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교훈은 ‘눈물과 땀과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은 눈물은 동정과 사랑을 의미하고 땀은 땀 흘려 일함을 의미하며 피는 희생을 의미하는데, 이 세가지는 우리가 본받아서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땀 흘려 일을 해야 하며 최후에 가서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침통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나라를 살리려면 사람들이 변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변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조만식 선생에게서 배운 한경직 목사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요즘 와서 제가 오산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나 생각해 보거든요. 이승훈 선생과 조만식 선생이 늘 세 가지를 강조한 것이 생각납니다. 첫째는 애국 사상을 고취했습니다. 둘째는 현대과학을 많이 가르쳐주었습니다. 셋째는 아무리 애국심이 있고 과학적 지식이 있다 해도 사람이 바로 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사람이 바로 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일본에서 나와서 양복도 다 벗어버리고 한복 입고 ‘난 한국 사람으로 살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서양 사람은 좀 웃을 것입니다. 그분은 절대로 소금으로 양치를 하지 치약으로 양치하는 법이 없었고 비누 세수하는 법이 없었어요. 그분은 ‘한국사람이 살려면 자급자족해야 한다’고 하며 ‘조선물산 장려회’를 조직하고 남의 물건 쓰지 말고 자급자족하자는 운동을 일으켰지요.” 조만식 장로는 수많은 민족의 지도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키운 지도자들의 지도자였습니다.


둘째 조만식 장로는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아마 조만식이 예수를 믿게 된 동기도 나라를 살리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청년 조만식이 예수를 믿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평양에는 망나니들도 많이 있지 않갔소. 그런 술꾼들하고 섞여 놀다 보니 술 먹고 도박하고 싸움하고… 본래 그런 분이라고요. 그러다가 한 20이나 되었을 때 한정교라는 평양 장댓재교회에 나가는 청년이 조만식 선생을 찾아가서 하는 말이 ‘지금 너 우리 나라가 어드렇게 되어가는 줄 아니? 지금 우리 나라가 점점 형평 없이 되어간다. 사방에 강한 나라들이 우리 나라를 엿보고 일본은 지금 우리 나라를 꼭 자기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온갖 장난을 다 한다. 그런데 너 같이 한문 공부도 많이 하고 머리도 좋고 재산도 그만하면 살아갈 만 한데, 너 같은 사람이 이런 생활을 해 가지고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되겠나?’ 그 말이 찔렀단 말이야요. 그게 전도지. 깨달았단 말이야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 ‘먼저 새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럴려면 예수 믿어야 해.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해.’ ‘예수 믿으면 새 사람으로 변하나?’ ‘아 고럼, 예수 믿으며 돼!’ 그 때 한정교 청년한데 그 소리를 듣고서 변했단 말이야요.”
조만식은 예수 믿고 나라 사랑하는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양복은 벗어버리고 한복만 입고 다녔습니다. 일본 물건 안 쓰고 조선 물건만 썼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나라 사랑과 예수 사랑만을 가르쳤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7년에 걸친 오산학교생활과 그 후 3.1운동으로 인한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1921년 가을 평양 YMCA 총무로 11년간 봉직했습니다. 그는 한 평생 조선물산 장려운동 즉 국산품 애용운동을 펴 나아갔습니다. 그는 또한 금주 금연 아편 축첩 매음 잡기 등의 사회악에 대한 정화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마음 속에나 내세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사회와 민족 속으로 들어가게 해서 사회와 민족을 살리게 했습니다. 그는 또한 좋은 신앙은 좋은 인격을 낳는다는 신념을 가졌고 또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졌듯이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는 옳지 않고 바르지 않은 일에는 추호도 타협이 없었으며 거짓을 싫어하고 꾸미는 것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평화를 사랑하며 사람들과의 인화와 관용을 중요시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나라를 사랑하는 정직과 진실과 검소와 희생과 화평과 관용의 삶이 한경직 목사에게 그대로 전수된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조만식 장로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지만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강탈하고 온갖 탄압정책을 자행할 때에도 그는 한 번도 ‘왜놈’이니 ‘일본 놈’이니 하는 상스러운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에도 일본 사람들에게 어떠한 보복을 가하는 것을 반대하며 ‘물러가는 일본 인들을 절대로 해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해방 후 일제보다도 악랄한 공산 치하에서 반탁투쟁에 앞장서면서도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미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나라 사랑은 하나님 신앙에서 기인했고 그의 하나님 신앙의 중심은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과 평화였습니다. 그는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되 그보다 먼저 사랑을 실천하고 평화를 실천한 박애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민족과 나라와 세계를 사랑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셋째 조만식 장로는 교회를 사랑한 봉사자였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받아 교회를 충성스럽게 봉사했습니다. 그가 지녔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굳게 믿는 보수 신앙이었고,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 신앙이었고, 올바른 인격과 삶을 강조하는 신행 일치적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계급의 평등을 강조하는 기독교 사회주의적 신앙이었고 (사유재산의 제한까지 강조) 사랑과 평화를 사랑하는 박애주의적 신앙이었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1921년에 산정현교회의 집사로 봉사하다가 1922년에는 장로로 장립을 받았습니다. 산정현교회는 장대현교회로부터 1905년 분립해서 닭골에 설립된 교회였습니다. 그는 장로로서 겸손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예배 때는 맨 앞 자리에 앉았고 당회에서는 발언을 별로 하지 않았고 꼭 필요한 것만 말했다고 합니다. 황성수씨는 장로로서의 그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조만식과 같은 장로가 있었기에 주기철과 같은 목사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언제나 맨 앞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친(황보익 목사)께서는 어린 나에게 ‘저 분이 민족의 영도자요,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요 백성의 모범이다’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선생님은 당회에서 별로 말씀하신 일이 없으셨으나 그가 앉아 계신 것만으로도 그리고 간혹 무게 있는 발언을 하심으로 그의 인격의 감화와 위력에 의하여 당회는 일치단결하며 바른 결정을 하며 교인을 감독 선도하였으며 특히 그러한 당회 후원을 받아 교계의 거성인 강규찬 목사, 박형룡 박사 송창근 박사 그리고 한국기독교 순교사상의 샛별인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1936년경부터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조만식 장로는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로 모셔와 신사참배반대의 선봉장이 되도록 격려하면서 이 순교자와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936년 산정현교회는 목회자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목회자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산정현교회는 주기철 목사를 지목했습니다. 20여년 전 주목사의 은사였던 조만식 장로를 주목사의 청빙위원으로 삼아 마산 문창교회에 파송해서 일을 성사시켰습니다. 한 때 사제 관계였던 두 사람은 이제 한 교회의 목사와 장로로서 그 관계가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나 조만식 장로는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를 잘 받들었습니다. 조만식 장로의 이러한 겸손한 자세가 온 교회로 하여금 주기철 목사를 극진히 받들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김인서 장로는 이 점을 이렇게 높이 평가했습니다. "조 장로가 오산학교 교장시대에 주 목사는 오산학교 학생이었으니 학교로는 조 장로가 선생이요 교회로는 주 목사가 선생이다. 두 분이 서로 선생으로 모시는 미덕은 참 부러웠다. 그래서 주 목사의 지도라면 일일이 순종하였고 전 교인이 효자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정성으로 받들었다. 주 목사로 하여금 주 목사 되게 함에는 오부인의 격려와 함께 조 장로와 산정현교회의 힘이 컸었다."

일제의 모진 핍박과 간섭 속에서도 산정현교회는 주 목사의 신사참배반대 투쟁을 격려하는 한편 가족들을 극진히 보살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조만식 장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옥 중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신앙의 순결과 민족의 정조를 지키는 주 목사를 격려했을 뿐 아니라 옥 밖에서 옥중 순교자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었습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 곁에는 항상 충성스러운 격려자와 협력자인 조만식 장로가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옥 중에서, 조만식 장로는 옥 밖에서, 신사참배 강요와 싸우면서 자신들의 신앙과 한국교회의 신앙을 사수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투쟁 정신사」를 쓴 안도명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평양 산정현 교회는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통치 하에서 강요한 신사참배를 반대하고서 승리한 유일무이한 교회이다. 이 역사적인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이 그 교회의 장로였고 소양 주기철 목사가 그 교회의 당회장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라는 하나님의 뜻이, 조 장로와 주 목사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조화됨으로 이루어졌다. 평양 산정현교회와 고당 조만식 장로는 우리민족 역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횃불이 될 것이다." 그 목사에 그 장로였고 그 장로에 그 목사였습니다.

조만식 장로가 걸어간 마지막 길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만열 교수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옥문 밖에서 순교자와 동행했던 고당은 해방 후 자신을 기대하는 수많은 백성들을 위해 자기의 한 목숨을 버리는 순민의 길을 걸었다. 한 몸이 살 수 있는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나 혼자만이 살기 위하여 이곳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을 버리고 떠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일천만 북한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기로 했소’ 라는 비장한 결심은 바로 일제하의 순교자의 길을 걸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전자가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존재도 숭배하지 않겠다는 '숭신 신앙'에 근거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러나 의지할 데 없는 민중들을 끝까지 봉사하겠다는 '활인 신념'에 근거한 것이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고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숭고한 신앙인의 길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 때문에 죽었고 조만식 장로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과 함께 민족에 대한 충성과 사랑 때문에 죽었습니다. 주기절 목사는 1944년 4월 21일 평양 감옥에서 순교의 죽음을 죽었고 조만식 장로는 1950년 10월 18일 평양 감옥에서 총살을 당하므로 순교의 죽음과 함께 순민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조만식 장로의 순교의 년월일을 밝히는 문헌은 없지만 어제 조만식 장로의 손자 되는 정중렬 장로로부터 1950년 10월 18일 평양 감옥에서 총살당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사실 고당 조만식 장로는 일제 때도 망명할 기회가 있었지만 조선 땅을 떠나지 않았고, 해방 후 공산주의자들의 협박과 박해를 받을 때도 월남할 기회가 있었지만 북한 땅을 떠나지 않고 순교적 신앙을 지키며 민족과 함께 살다가 순민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1945년 11월 이승만 박사는 편지를 써서 한양섭이라는 사람을 통해 평양에 있던 조만식 장로에게 전달한 일이 있었습니다. 월남해서 함께 일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만식 장로는 그 초청을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정중하게 사절했습니다. “이곳 민중들을 위해서 나라도 여기 머물러 있어야 해” 그것이 그의 답이었습니다. 그후 조만식 장로가 평양호텔에 감금되었을 때에도 그의 제자들이 탈출계획을 세웠으나 그는 여전히 거절했습니다. “나는 이땅 1천만 동포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다.” 이것이 그의 거절의 변이었습니다. 김광수 목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나라와 민족만을 위해서 일하고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그 지조, 그에게는 털끝 만큼의 야심도 명예도 집착도 없었다. 정치적 제스쳐도 화려한 외교할동도 그의 생리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는 확실히 지조 높은 애국자이며 민족의 사표였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위대한 민족의 지도였고 위대한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는 말로 살지 않았고 삶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진실했고 헌신적이었고 평화로웠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명과 몸을 순교와 순민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는 평양 하늘에 아니 한국 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귀한 선배들을 주신 하나님께 다시 부끄러운 감사를 드리며 우리도 신앙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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