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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길목에서 빛을 남긴 사람들 / 막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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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십자가의 길목에서 빛을 남긴 사람들 (막 11:1-6)
설 교 : 박희민 목사 (나성영락교회)



일본 영화 중에 '호타루'라는 영화가 있다. 그 내용에 보면 2차 대전 때 젊은 학도병들이 특공대로서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날아가 적함에 부딪쳐 침몰시키고 자기도 죽는 그러한 장면이 나온다. 그 중에는 한국청년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살아 남은 한 특공대원이었던 사람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 젊은이들의 죽음을 되새겨 보는 장면이 나온다. 비행기를 타고 적함을 향해 비행하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 착잡하게 떠오른다는 것이다. 대개 20살 안팎의 특공대원은 비행하면서 울다가 웃다가 20년 동안의 지나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죽기가 싫다는 생각도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진다는 것이다.

인류를 구속하러 오셨던 예수의 육신적인 생애의 마지막 길도 몹시 외롭고 고달팠다. 요단 강변에서 세례 요한의 소개가 있은 후 천국복음을 전하기 시작해서 3년, 그 동안 예수를 따르던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한 때 벳세다 벌판에서는 한꺼번에 무려 수만 명이 그의 진귀한 가르침에 해가 지는 줄 모르고 귀를 기울였다.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어 지붕을 뚫고 병자를 달아 내리는 소동까지 일어났다.

<5병이어>로 남자만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푼 후엔 가지각색의 추종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르겠다고 결의를 표명했고 주야로 밀려드는 무리들로 인하여 먹고 잘 시간마저 가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많던 무리들이 다 마지막까지 예수를 따르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으셨지만 예수의 마지막 길엔 그 무리 중 한 사람도 그 뒤를 따른 자가 없었다. 예수의 12제자, 그들은 어디서나 예수와 침식을 함께 하였고 누구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깊은 교훈에 접했으며, 그 중에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는 용모를 변하신 변화산과 겟세마네 동산까지도 그림자처럼 따랐던 제자들이다.

그러나 그 열 두 제자도, 그리고 그림자처럼 따르던 세 제자도 예수의 마지막 길엔 동행하지 못하고 다 달아나고 말았다. 그들 중 하나는 선생 예수를 원수에게 팔았고 예수와 같이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장담하던 수제자 베드로마저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잡히실 때는 멀찍이 뒤를 따라서 예수님이 심문 당하는 가야바의 뜰까지 갔으나 그의 신분을 묻는 한 비자(여종) 앞에서 맹세코 예수를 모른다고 잡아 뗀 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 의외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사람 중에 또 전연 이름이 없는 사람들 중에서 주님의 마지막 길에 정성어린 봉사를 한 사람들이 있어서 후대 사람들에게 큰 감명과 감화를 주고 있다. 이들은 어두운 밤에 빛나는 별과도 같이 예수의 십자가 길목에 나타난 기억할만한 인물들이었다.

오늘은 마가복음에 나타난 인물들을 찾아 묵상해 보고자 한다.

1. 나귀새끼를 제공한 무명의 봉사자를 찾아 볼 수 있다(막 11:1-6).

예수님에게 최후의 수난 주간이 왔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고 모의에 모의를 거듭하는 원수들이 최후의 전략을 짜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장한 각오로 입성을 결심하시고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란 동리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건너 마을로 보내어 나귀새끼 한 마리를 데려오도록 명령하셨다.

이 나귀새끼의 주인은 누구인지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의 마지막 길에 나귀를 순순히 바쳤다. 그가 나귀를 바친 것은 왕 중에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입성을 위해서였다. 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실 때 교만하고 악의에 찬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다.
그러나 순박한 서민과 어린 아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옷을 길에 펴며 호산나 만세를 불러 환영했다. 비록 그리스도는 마지막 수난의 길에 오르시지만 만왕의 왕으로서 영원한 권세의 주재가 되시는 것을 일순간이나마 인간들에게 보여주셨다.
이 나귀의 주인은 숨은 예수의 제자였다고 생각된다. 그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혹은 왕으로서 등극하실 예수만 생각했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라면 자기 소유를 아낌 없이 바치겠다는 생각에서 나귀새끼를 아무 이의없이 제공한 것이다.

이렇게 아낌없이 바친 나귀새끼는 만왕의 왕 되신 예수를 태우고 예루살렘을 입성하게 됐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생각할 때 참으로 주님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오르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난과 죽음은 원수에 대한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으며,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고난과 희생의 길이었지만 승리에 찬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당당히 나귀를 타시고 오르셨다.
나귀새끼의 주인은 예수님의 수난주간에 맨 먼저 산 봉헌자로 나타난 산 별이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


2. 안식처를 제공한 베다니 가정을 찾아 볼 수 있다(막 11:11).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첫날에 성전을 더럽히는 무리들을 쫓아내시고 성전의 주인으로서의 그의 권위를 행사 하신 후에 해가 저물 때 예루살렘에서 5리 밖에 떨어져 있는 베다니라는 촌으로 내려가셨다.
베다니에는 항상 기쁨으로 예수를 영접해 주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세 남매의 가정이 있었다. 그들은 힘들어하시고 괴로워하시는 수난주간의 주님을 영접하여 그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해 드렸다.
예수님이 이 주간에 해야 할 일은 참으로 많았다. 그가 죽기 전에 바로 가르쳐야 할 일들, 바로 고쳐야 할 일 등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분주하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을 맞이해서 쉬게 할만한 가정이 별로 없었다.

예루살렘에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명성이 높을 때 그 뒤를 따르던 무리 중에는 예루살렘 주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는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살해될 계획이 바로 그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진행되고 이 새 종교를 박해하는 기세가 충청해서 자칫 그리스도를 동정했다가는 그와 함께 난을 면치 못하리라는 생각 때문에 예루살렘 신자들은 의식적으로 그리스도를 경원했는지도 모른다.

당대 유대의 수도요, 종교의 도성인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길에 그 피로를 풀어 줄만한 집은 없었다. 그 화려한 돌집들이 돈 있는 사람, 세력 있는 사람들을 맞이해서 성찬을 베풀기에는 인색치 않았지만 자기들을 구원하려 오신 메시아를 영접할 만큼 신앙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지막 길에 그의 사역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도록 따뜻한 사랑으로 맞이해 준 가정이 있었다. 그가 바로 베다니의 나사로 가정이었다. 그들은 세상의 지혜있고 세력있는 자들이 푸대접하고 괄시한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마음으로 존경하고 대접했다. 그들은 멸시받는 예수를 맞아 친구로 삼고 그들의 낙을 그리스도에게서 찾았다.
이처럼 예수의 마지막 길에 나타난 두 번째 혜성은 예수님에게 안식처를 제공한 베다니 가정의 식구들이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제공하고 있는가?


3. 나드 향유를 바쳐 예수의 장사를 준비한 한 여인의 헌신을 읽을 수 있다(막14:1-9).

예수님께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실 때였다. 한 여인이 순전한 나드 향유 옥합을 가지고 나와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다.
이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분내어서 왜 그렇게 값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도 있는데 책망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히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노라"고 높이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리라"고 칭찬하였다. 무엇을 말하는가? 참된 사랑이 있는 곳에는 이런 낭비나 헌신도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가?

① 사랑하는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라면 어떠한 물건도 지나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들에게 또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주고 받는 선물은 아니,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결혼식장에서 신랑신부가 서로 주고 받는 선물은 아깝지를 않은 것이다.
사랑은 계산을 초월한다. 이렇게 계산을 초월해서 아낌없이 바치는 사랑의 봉헌이 있는 곳에 인생의 아름다움이 있고 향기가 풍기는 것이다.
사랑이 없이 드리는 것은 적은 것이라도 낭비일지 모르나 사랑으로 바치는 것은 아무리 많을지라도 그것은 낭비가 아니다.

② 어떤 사람이 말한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런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보다 한 번밖에 봉사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먼저 택한 그녀의 행동은 아름답고 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녀의 섬김과 헌신을 높이 평가했다.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 인생을 실패하는 사람과 인생을 성공하는 사람의 차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절호의 봉사의 기회를 유용하게 포착하느냐 못하느냐? 그 봉사를 필요로 하는 일에 뛰어드느냐? 못 뛰어드느냐에 있다.

③ 그녀의 봉헌의 아름다움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체면을 지키기 위해 하는 체한 것이 아니라 자기 형편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데 있다.
봉사의 아름다움은 일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질에 있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자기로서의 최선을 다 했느냐 하는 충성이 언제나 문제가 된다. 그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가 힘껏 하였느니라" 했다.
이러한 희생적인 봉사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것 같을지는 모르지만 역사 속에서 언제나 영원히 빛나는 것이다.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감화를 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좀 살아야 한다.


4. 만찬석을 준비한 한 어머니를 잊을 수가 없다(막 14:12-16).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전날은 유월절 예비일이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유를 얻은 해방절로써 온 백성이 가장 뜻있게 지키는 명절이다.
유월절 예비일, 해가 지면 유월절 잔치를 먹게 된다. 이 날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유월절 음식을 나눌 장소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다. 이 날 예루살렘 전 성 안은 대명절 기분에 잠기고 집집마다 떡과 고기와 술이 넘쳤으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절기를 지킬 장소는 없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 중 두 사람을 성내로 들여보내시면서 물동이를 들고 가는 사람을 따라 가서 그 집 주인에게 "우리 선생님이 제자들과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일 터이니 거기서 만찬을 먹을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잡아 사형할 하루 전의 예루살렘 공기는 매우 험악했다. 유월절을 위해 떡을 만들고 요리를 장만하는 사람마다 대부분 화제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다. 곧 무엇이 터질 것만 같은 예감과 불안이 온 장안을 덮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위해 만찬석을 준비하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행히 두 제자의 요청에 한 어머니는 쾌히 허락한다. 대부분의 성경 해석자는 그 집이 마가의 어머니 집이라고 말한다.
마가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제자였고 그 어머니는 물론 독실한 신자였다. 마가는 후에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전도 여행에 참여했지만 이 때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이렇게 마가의 어머니가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므로 성만찬을 거행할 때마다 영원히 그녀를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놀랍고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가 감히 여성을 약한 자라고 말하며 결단성이 부족한 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목에서는 남자들 못지 않게 많은 여성들이 숨은 봉사와 사랑에 넘치는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접하게 된다.


5.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간 구레네 시몬(막 15:21).

예수님은 마침내 원수들에게 잡히어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신 후 사형을 언도 받았다. 군병들이 총독의 뜰에 그리스도를 끌고 가서 희롱하느라고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갈대로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가진 희롱을 다한 후에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다.
극형의 죄수에게만 지우는 큰 십자가를 예수님에게 지우고 해골의 언덕 골고다를 향하여 채찍으로 그 길을 재촉했다. 주님의 마지막 길은 너무도 힘들고 고독했다. 그 평소의 제자들이라도 따라와 좀 그 무거운 십자가를 거들어 주고 도와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제자들은 감히 그런 용기가 없었다. 심신이 몹시 피곤해지신 주님은 그 십자가를 메고 여러 번 지쳐 쓰러졌다. 군인들은 무자비한 채찍과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기운이 빠진 주님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사형이 집행 될 골고다 언덕까지 끌고 올라 갈 수 없었다.
때 마침 지나가는 시골사람 구레네 시몬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명절에 볼일을 보러 예루살렘에 올라 왔다가 이런 변을 당한 것이다. 그는 할 수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다. 처음엔 그가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골고다를 오르는 동안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가 보여 준 위대한 삶의 몇 장면을 보는 순간 그가 참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난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억울한 생각 같은 것은 사라지고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과 경배의 영으로 가득 차게 됐다.

로마서 16장 13절에 보면 후에 그의 가정은 초대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신앙의 가정이 되었다. 이 얼마나 엉뚱한 일인가? 주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 다니던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가고 주님의 마지막 길에서 엉뚱한 시골 사람 구레네 시몬이 나타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로 인한 영광에 동참했으니 이 얼마나 엉뚱한 일인가?

구레네 시몬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목에 나타난 가장 빛나는 샛별이었다. 여러분은 주님의 십자가 길목에서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때로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한다. 그 때 그것이 큰 축복이 된다.
마지막으로 새 무덤을 제공하여 장사 지낸 아리마대 요셉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막 15:42-47).

예수님은 성금요일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려 6시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다가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주님은 이 십자가 상에서 다음과 같은 7마디를 남기셨다.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낙원에 있으리라.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5) 내가 목마르다.
(6) 다 이루었다.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리고 운명하셨다.

그런데 주님의 시체를 건사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 많은 추종자들도 주님의 죽음 길에서는 모두 자기 일에만 바빴다. 그러나 여기 의외로 한 사람이 나타나서 그리스도의 시체를 받아 장사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닌 아리마대 요셉이다. 그는 부와 지위를 가진 사람이요 공회의 의원이었다. 또한 메시아를 기다리던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평소에 그리스도의 교훈을 옳게 여겨 숨어서 제자 노릇을 했으나 그리스도의 억울한 죽음에는 더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주님의 시체를 인수받아 값진 세마포로 싼 후 자기를 위하여 예비한 바위 속에 판 새 무덤에 주님을 고이 안장했다.

이것은 그의 용기와 경건한 믿음에서 나온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목에서 행한 가장 아름다운 영원히 기억할 만한 봉사 헌신이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마지막 길에 나타난 여섯 번째 별은 자기의 새 무덤을 그리스도에게 기쁨으로 바친 아리마대 요셉이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십자가 길목에서 봉사를 아끼지 않은 무명의 봉사자들을 생각해 보았다. 마치 초저녁에 떴던 별들이 다 산마루를 넘고 뒤를 따라 올라 온 샛별들이 더욱 빛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처음 따르던 봉사자들은 다 숨고 그의 마지막 길목에서는 별로 이름없던 무명의 봉사자들이 나타나 오히려 빛나고 있다.

우리가 알기로는 환성과 대접과 인기의 시절에 봉사자보다 멸시와 냉대와 핍박과 죽음의 길에 나타나는 봉사자가 더 귀한 것이다.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는 자보다 수치와 고난의 자리에 동참하는 자가 더 위대하다. 기쁨의 날에 봉사하는 자보다 슬픔의 날에 봉사하는 자가 더 훌륭하다. 함께 놀아주는 사람도 귀하지만 함께 짐을 져주는 사람은 더 귀하다. 함께 웃어 주는 사람도 귀하지만 함께 울어 주는 사람은 더 귀하다. 함께 면류관을 나누려는 사람보다 함께 십자가를 져주려는 사람은 더 귀한 것이다.

오늘 임직식과 은퇴식이 있지만 오늘 임직 받는 분들은 이러한 숨은 봉사자들로 빛을 발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은퇴하시는 분들은 은퇴한다고 섬김을 끝내는 것이 아니다. 영어로retire는 타어어를 바꿔 단다는 말이다. 새 타이어로 바꿔 달고 더 열심히 남은 생에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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