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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안식 / 히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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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준식 목사 (신림교회)
믿음의 안식 히브리서 4장 1~3절


우리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중학교 때에는 학교가 아주 가깝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늦지 않고 학교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배정된 고등학교는 아주 일찍 수업이 시작되는 학교라서 일찍 나야만 합니다. 우리 부부는 이 아이들이 과연 투정하지 않고 잘 다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학교 가는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준비해서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기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스스로가 밤늦도록 공부를 하는 거예요. 배정된 학교가 마음에 드는지 집에 와서 학교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할 때에는 언제나 굳은 각오와 불타는 정열, 그리고 헌신과 사랑을 아낌없이 쏟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안심하고 긴장을 풀고 맙니다. 감사하고 감격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마련입니다. 먹는 것이 부족했을 때에는 라면 한 개, 밥 한 그릇에 눈물 흘리며 감사하지만 먹고 남을 정도가 되거나 이 음식 저 음식 골라 먹게 될 때에는 감사가 사라지고 오히려 불평과 원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4장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유대교에서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기쁘고 신나서 광야로 나온 것처럼 유대교를 신봉하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열정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에 가졌던 신앙 생활의 기쁨을 유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옛 습관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3:19절에서 말씀합니다. -3:19절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로 말씀이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3:19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너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니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믿지 아니하므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믿지 아니하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이렇게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죄를 인하여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죄의 본질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죄가 만연한 현대 사회는 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연약한 부분이요 전적으로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어려운 상황이라든지 성숙하지 못한 문화에서 온 것으로 오해하거나 착각합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좋은 도덕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통하거나 아니면 성숙된 문화를 조성하거나 복지 사회를 이루면 죄가 없어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도 이런 생각에 동의하십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는 여러분에게 저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병원을 보십시오. 옛날보다 병원도 병실도 많아졌습니다. 의사도 많아 졌습니다. 의술도 발달되었습니다. 사전에 병을 예방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병원에 환자가 줄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병원의 병실은 줄어 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원에 입원하기가 어려운 지경입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배고픔을 면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교도소에 죄인들이 줄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교도소는 줄어 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죄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입니다. 죄는 단순한 약점이 압니다. 죄는 힘없는 세력이 아닙니다. 죄는 힘이 있습니다. 죄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합니다. 죄는 나의 강인한 의지를 꺾는 하나의 힘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정말 완벽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사울에 의하여 모욕을 당하고 무시당하고 쫒김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에 대해 항상 존경과 사랑의 태도로 사울을 섬겼습니다. 또한 다윗은 사울을 두 번씩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소행에 비추어 볼 때 사울을 죽여도 무방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다윗이 왕이 될텐데 설사 다윗이 사울을 죽인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죽이라고 부추겼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나중에 사울이 죽었다는 소리를 누가 와서 다윗에게 해주자 다윗은 기뻐하기는커녕 애통해하며 사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후손들에게도 관대하고 대하고 사울의 후손들이 잘되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악하고 비겁한 사람으로 살인자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항상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어떤 모욕이든지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다윗이 살인자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죄입니다. 이 힘은 우리 안에 모두가 있습니다. 죄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죄는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라면 죄에 대한 해결 방법 역시 간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복지 프로그램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훈련 프로그램을 통하여 죄를 없앨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뼈아픈 대안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결승점에 도달하려는 운동 선수처럼 승리가 눈에 보이는 곳까지 왔습니다. 결승점이 가까웠을 때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경주를 해야만 승리의 면류관을 차지 할 수 있듯이 지금이야말로 정신을 차리고 신앙생활 할 때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복권이 나를 유혹합니다. 증권이 나를 유혹합니다. 부동산 투기가 나를 유혹합니다. 돈 때문에 상처받고 돈이 나를 버려서 우리가 신앙 생활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새 다시 돈의 힘에 굴복하고 싶어하고 돈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가 설교 시간에 심심풀이로 로또 복권을 한 장정도 사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나도 한 장 사본 적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담겨진 죄의 기만을 보십시오. 심심풀이로 복권을 사면 당첨되어도 심심풀이로 장난삼아 한 것이니 당첨금을 소홀히 하거나 수령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죄라는 것은 이렇게 사람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깊이 하나님을 묵상하십시오. 세상의 복권 소리와 증권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너무나 복잡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조용하십시오. 나의 목소리와 나의 생각을 중지하십시오. 새벽 기도에 나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잠을 주시는데 우리가 그 잠을 자는 동안 조용해진 나의 내면의 세계를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옛 습관으로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힘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관찰해보면서 우리는 하나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3:19절과 4:1절을 비교 해 보면 저희와 우리라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합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공동체 의식입니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공동체가 어디에 있습니까? 먼저 여러분 가정입니다. 우리는 아들이 직장이 시원챦고 어렵게 살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저 아들이 어떻게 되려나 두려운 마음을 갖습니다. 남편이 실직을 하면 그토록 마음이 아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도와 주려고 하고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믿음 없는 내 남편 내 아들을 보고 두려워하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로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열심히 드나들지만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을 볼 때입니다. 구약 성경 사무엘상 4-5장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럽게 블레셋의 지배 하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을 차리면서 이제 우리가 블레셋의 지배에서 벗어나자고 결의하고 군대를 일으켜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패배로 전쟁이 끝이 납니다. 전쟁에 패배한 원인이 무엇인지 회의를 하던 중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패배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지 않은 채 블레셋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다시 언약궤를 앞세우고 블레셋과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도 여지없이 패하고 어이없게도 하나님의 언약궤 마져 빼앗기고 맙니다. 블레셋 군인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기들 나라로 가져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궤를 전리품으로 얻은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부수지 않습니다. 내다 버리지 않습니다. 그 언약궤를 자기들이 믿는 다곤 신전에 갖다 두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에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를 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블레셋 군인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힘으로 전쟁을 해 보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겨우 생각해 낸 것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수호신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블레셋 사람들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리품으로 얻고 나서 이 언약궤가 자기들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치로 다곤 신전에 가져다 두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사람이 아닙니까? 내 힘으로 살아 보다가 안되니까 혹시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실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처럼 다곤 신도 섬기면서 동시에 그 옆에 악세사리로 십자가 하나를 세워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보면 분명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주변에 이런 사람을 보고 내 자신이 두려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남편을 보고 내 아들 며느리를 보고 두려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참된 공동체가 지닌 아픔입니다.
두 번 째는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2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행동하는 것도 문제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행동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들어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음성을 들으면 자신의 인생을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타인의 음성에 귀 기울이면 좋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회나 백성들의 소리를 잘 들으면 좋은 사회와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다 들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우리는 귀먹은 사람에 불과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고 인간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한결 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의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사람과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가 들은 것은 combine 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우리의 삶에 그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생각과 내 주장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 할 수 없습니다. 내 음성을 낮출 때 다른 사람의 음성이 들리는 것처럼 내 생각과 내 주장을 버릴 때 순수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책을 읽으면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어느 젊고 실력있는 목사가 선배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가는 것은 확신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누가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까? 이사야가 말했습니까? 예레미야가 말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까? 마틴 루터가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 되시고 주 되시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편한대로 적용하지 마십시오. 힘들어도 말씀을 나의 삶에 온전히 적용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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