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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은혜 / 사 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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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은혜 
사53:1-6
김태복 목사 (홍익교회)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
수님의 그 희생적인 사랑을 기억하면서 경건과 절제, 사랑의 실천에 힘쓰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귀한 기간에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국가라는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매일같이 가공할 만한 최첨단 무기를 쏟
아 붐으로 온 세계를 불안하게 만들고 세계 경제를 휘청거리게 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기가 막힙니다.

어제 전쟁반대에 참석했던 우리 나라 어느 교수의 말이 "부시가 제발 하나
님의 이름을 거들먹거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
면서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느냐?"
고 합니다. 이번 전쟁에 쓰여지는 전비(戰費)만 해도 거의 120억 조가 된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사용한 비용이 3조 5천억 달라라고 합니다. 3조 5천
억 달라가 얼마나 큰가 계산해 보면 150만 명의 선교사를 100년간 파송할 수
있는 비용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번 전쟁에 쓰이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 금액입니다. 이 돈으로
온 세계 굶주린 난민을 돕는다면 미국은 이런 무기자랑을 하지 않고도 온
세계를 가장 존경받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한편 10여 년 전에 공산권이 무
너짐으로 공산권에 선교의 문이 열린 것처럼, 이제는 세계선교의 마지막 장
벽인 회교권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마지막 때를 향
해 역사는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여하튼 사순절 기간에, 온 세계의 많은 나라와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이런 엄청난 전쟁이 미국과 영국에 의해 벌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나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가 쓴
예언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메시야의 모
습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관과는 아무 다르다는 점입니
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관은 다윗왕처럼 화려하고 빛나
는 승리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십시오. 너무나 유약하고 초라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언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 하신 것임을 숙연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
문은 '이사야의 복음'이라는 별명을 부칠 정도로 예수님의 근본과 모습을 잘
그려지고 있는데, 한 마디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서 오
셨다는 것을 예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
랑하셨습니까? 그것을 깨닫는 것은 바로 은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가장 비천한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1-3절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
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
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
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
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
로 여기기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완전히 비시고 비천한 위치로 내려가
셔서 종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가장
비천한 인간 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놀랍게도 그에게 주어진 첫 번 자리는 짐승의 냄새와 분뇨냄새가 가득 찬
마구간이었습니다. 이것은 큰 비극 중의 하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수천 년 동안 목마르게 대망하여 오던 메시아였는데, 그
에게 베푼 자리는 고작해야 마구간이었고, 그에게 베푼 최후의 대접은 십자
가에 잔인하게 못 박은 것이니 이처럼 한심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
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가장 천한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는 이미 마리아
몸에서 잉태하실 때부터 큰 비난에 싸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결혼을 하
지 않은 동정녀 마리아, 동네 사람들은 너무나 정결하게 믿었던 마리아가 갑
자기 배가 불러오자, 너나 없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특이나 약혼자 요셉이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할 때는 가슴이 무너지
는 아픔을 느끼게도 했을 것이요, 마침내 아기를 나은 곳이 마구간이라는 사
실도 너무나 기가 막힌 데 난지 얼마 안되어 멀리 애굽까지 피난가야 하는
유랑의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을 데다가 어린 날에도 계속 가난과 궁핍에 시
달리어야 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서 잉태하는 순간부터 십자가
고난의 행진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비극적인 삶 속에서도 오직 겸손과 온유로
인내하면서 가장 천한 곳으로 내려가기를 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 낮은
자리, 그 천한 자리는 멸시와 천대, 그리고 잔인한 죽임이 기다리고 있는 곳
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는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까? 유대
인들은 자기들의 바라던 메시야관과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입
니다. 그러면 그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어떠했습니까?

(1)유대인들은 메시야의 혈통은 매우 고귀하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북쪽 갈릴리에 있는 초라하고 비천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요, 그를 따르는 무리도 모두 비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사야가 예언한 "마른땅에서 나오는 줄기"의 표현대로 오신 예수님이
십니다.

(2)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모습은 풍채가 준수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등장하리
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보면 연한 순처럼 유약해 보일
뿐만 아니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즉 특출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3)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등장하면 큰 행복과 부유와 번영이 따라올 것이라
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3절에 보면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했으니,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너무나 실망했고 그를 멸시하고 천대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뻔히 알고 계시면서도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던
것이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비난과 천대와 멸시가 있는 골고다를
향해 낮아지고 낮아지셨던 것입니다. 왜 그리셨습니까? 여러분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선 나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큰 능력, 큰 권세를 가지셨으
면서도 다만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탄으로부터 구하시기 위해 친히 비천의
자리, 멸시천대의 자리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누가 조금만 업신여기는 느낌이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만 하면 펄펄 뛰면서 못 참아 합니다. 그래가지고는 주
님을 따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순절 기간동안 진정 주님의 십자
가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때문에 낮고 천한 자리라도 온유와
겸손으로 내려가서 아픔의 십자가를 메어 보십시오, 그 때 십자가의 능력을
깊이 체험하며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은 1939년 27세의 청년으
로 장로 장립을 받을 때, 일본 경찰은 장립식 식순에다가 동방요배, 즉 천황
에게 절하는 순서를 넣게 했습니다. 그러나 김장로님은 단연코 거절했습니
다. 그러자 일본 고등계 다다찌와 조선인 홍상혁 형사는 그들을 붙들어다가
얼마나 고문을 하는 지,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으며, 또 8년이나 홍상혁 형
사는 따라 다니며 못 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홍상혁만 보아도 깜짝깜짝 놀
랄 정도가 되었고 밤에 자다가도 놀라서 일어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드디어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8년이나 괴롭히던 홍상혁이 장로님을 찾아와서 허리에 차고 있던
긴칼을 뽑아들고 "이 칼로 나를 죽여주십시오. 그 동안 죽을죄를 지었습니
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는 당장에 죽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으나, 기도 중
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떠올라서 조용한 어조를 말하기를 "미안할
것 없소. 다 나라 없는 불행 때문이지오. 어서 강원도에 들어가서 몸을 숨기
시고 이름을 가명을 쓰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럴 때 그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차 올랐다고 하며 그런 장로님을 하나님은 크게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도 주님이 명하시는 곳이라면 저 낮고
천한 자리, 멸시받는 자리라도 온유와 겸손으로 내려가는 삶을 사시기를 간
절히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모든 굴욕을 참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세 가지 면에서 큰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1)예수님은 육체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라고 했습
니다. 또한 우리의 죄 때문에 매를 맞아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인의 무서운 채찍으로 40대 가량의 매를 맞아서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었고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그의 이마는 가시관으로 찔리
어 피가 낭자했습니다.

짐 비숍이 쓴 「예수 최후의 날」이라는 책에서 보면 그가 십자가를 졌을
때 로마군인이 보니 그의 얼굴은 얼굴이 아니었고, 코도 눈도 다 비틀리었었
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 도상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 뵙지 못한 이유가, 가시관과 매, 또, 물과 피를 다 흘리시는 등, 너무
극심한 고난을 겪은 탓에 얼굴이 완전히 달라진 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예수님은 정신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
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시고 계신데, 사람들은 너무
나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
다. 가장 선한 그를 가장 악한 자로 비방하고 취급당할 때처럼 곤욕스러운
것이 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차라리 옳은 일을 위해서 매를 맞고 투옥되는 것은 보람이라도 있
으나 우리가 오해를 받아서 도둑 누명이나 간음 누명을 쓰는 것은 죽기보다
더한 고통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바로 가장 선한 자를 가장
악한 죄로 처형하는 치욕적인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그
런 취급을 받는 것이 너무 싫으셔서 감람산에서 세 번씩이나 이 잔을 지나
가게 해달라고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을 정도로 정신적인 고난을 당하셨
던 것입니다. 

(3)예수님은 영적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갑자기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
리시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버리셨다니 우리 주님이 어
떻게 이런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까? 여기 깊은 의미가 담기어 있습니다. 십
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 순간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를 그의 어깨에 지신 가장 큰 죄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
기에 우리 죄를 그냥 용서하신다면, 그것은 공의 법을 어기는 것이요, 공의
의 질서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의의 법을 나타내기 위해 흠 없는 자가 대신 죄를 지고 형벌과
저주를 받은 후에 죄를 용서하시려는 뜻이 십자가에는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 순간
만은 저주의 대상일 뿐이기에, 하나님은 고개를 돌리시고 외면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순간만은 영적인 참담함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표현한 것
이었습니다.

십자가 설교 때마다 자주 인용하는 예화가 있습니다. 로구리양이라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너무나 풍기가 문란에 빠졌습니다.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음란이 극에 달했습니다. 왕은 온 나라에 칙령을 내리기를 "만약 지금까지
간음을 범하는 자는 두 눈을 뽑아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범하여 붙잡힌 자가 자기 아들, 왕자였습니다. 신하들이 왕자를 끌고 와서
"어찌 하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왕은 심한 갈등에 빠졌습니다.

왕의 공의의 법대로 라면 아들의 두 눈을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의 법대로 라면 자기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외아들의 두 눈을 뽑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왕은 나라의 공의를 위해서 소를 버리고 대를 택했습니다.
아들의 눈을 뽑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나를 용서해 주
세요. 나를 버리지 마세요."라고 눈을 펑펑 흘리며 애원합니다. 그러나 왕은
외면합니다. 신하들은 냉정하게 한 눈을 뽑았습니다.

다시 형리가 다른 눈을 뽑으려고 하자, 왕은 "잠깐, 그 칼을 이리 내라. 내
가 뽑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칼을 받아 아들의 눈을 뽑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눈을 뽑았습니다. 땅 위에는 붉은 피에 물들인 두 개의 눈알이 구르
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공의의 눈알이요, 하나는 사랑의 눈알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온 나라 백성들은 감격하며 그 다음부터는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왕은 공의와 사랑, 이 두 가지를 다 이룬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공존되어 있는 곳이 예수님의 십
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런 육신적, 정신적, 영적인 극심한 고난을 당하심으
로 우리에게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무슨 은혜가 임했습니까? 그가 찔리고
매 맞음으로 우리의 육신적, 정신적 죄와 저주로부터 나음을 받게된 것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영적으로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오늘 여러분은 무슨 죄를 안고 나오셨습니까? 이
시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모든 죄를 회개하심으로 십자가 보혈로
죄를 씻음을 뿐 아니라 병 고침 받고 영적인 평안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
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기의 전부를 주셨습니다.
좀 전에 소개했던 짐 비숍의 글에는 십자가 처형 장면을 다음과 같이 표현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못 박는 집행인은 5인치의 못 두 개를 입에 물고 손
에 쇠망치를 들고서 오른 손으로 예수의 손목을 더듬어 뼈가 없는 작은 부
분을 찾아내 못을 대고 쇠망치를 쳐들고 힘껏 못대가리를 내리쳤다. 대부분
의 사람들은 얼굴을 돌려 외면했다. 어떤 사람은 울었다. 다른 손목도 그리
하였다. 그리고 두 병사가 가로대의 양쪽 끝을 잡아끌고 가기 시작했다. 예
수의 몸은 손목에 매달린 채 질질 끌렸다. 숨쉴 때마다 그는 신음하고 있었
다.>

오, 여러분들이여, 더 이상 어찌 표현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
나님의 그 높고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가장 비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후,
2살 때 길고 긴 피난의 설음을 맛보시고 가장 극심한 가난 속에서 성장하시
고 10대 후반에 아버지 요셉이 돌아가신 후, 가정의 제반 일을 돌보시는 등,
생활고를 겪으셔야 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에 나서신 이후부터 일생동안
모든 유리하며 고난 당하는 사람들과 각색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시
달리시며 주무실 겨를,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모든 인간들을 위해 희생하셨
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자 중 한 사람의 손에 의해 팔리고 인간들의 손에 십자가
에 못 박히시고 목숨을 물론이고 물과 피까지 다 주시고 가셨습니다. 예수님
의 삶은 한 마디로 줌의 삶이었습니다. 라셀 로웰의 시 가운데 '라운폴공의
꿈'이란 작품이 있는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중세기의 청년 명사 라운폴
공은 큰 부자, 큰 명성을 가진 자였는데, 일생 큰 사업을 계획하기를 예수님
이 최후의 만찬 시 사용하셨던 금잔을 찾아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은 다 밑의 사람들에게 맡기고 여행을 출발했습니다.

그 때 어떤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가 구걸을 했습니다. 라운폴공은 대단히
불쾌해서 "참 더러운 거지가 이제 큰 뜻을 품고 떠나는 이 귀한 시간에 재
수 없게 한다"고 하면서 "이거나 가지고 가"하면서 금화 한 푼을  내던졌습
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헤매었지만, 금잔을 찾지
못하고 심신만 병들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머리는 다 희어버린 모습으로 고
국에 자기 몸을 묻으려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런데 성문에 이르렀을 때, 한 문둥이가
손을 내밀어 구걸하는 데 보니, 자기가 떠날 때에 구걸하던 거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라운폴공은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몸에 지닌 한 개의 빵을
반을 잘라서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형제여, 내게 있는 것이
이것뿐이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개울가에
내려가 얼음을 깨고 허리에 찼던 표주박으로 물을 떠다가 그 거지를 마시게
했습니다.

그 순간, 거지가 홀연히 변하여 흰옷을 입은 예수님으로 나타나 라운폴공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기를 "보아라. 나니 두려워 말라. 금잔을 찾으러 여
러 나라를 헤매면 무엇 하는가? 네가 찾는 금잔은 네게 있으니 그것은 거지
를 떠 먹이던 네 표주박이라"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기를 "반
을 짤라준 빵은 찢긴 내 몸이요, 시원한 냉수는 흘린 내 피다. 가난한 사람
들과 같이 먹는 것. 그것이 곧 참된 만찬이거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깜
짝 깨어나 보니 꿈이었습니다. 깊이 깨달은 그는 자기 집의 큰 창고의 문을
열고 즐거움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다고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세계 여기를 보나 저기를 보나 불안하기 짝
이 없습니다. 이번 이라크 전쟁 이후 과연 세계가 어떻게 재편될지,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로 나올지, 시계(視界)가 불투명합니다. 그러나 분
명한 것은 지금은 마지막 때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일수록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더욱 깨어서 근신하
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사시려는 제자들이여,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다시금 결심을 합시다. 우리도 주님이 명하시는 곳이라면 어떠
한 멸시천대의 자리라도 온유와 겸손으로 내려가십시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육적, 정신적, 영적인 고난을 받으신 그 은혜 고마워
우리도 주님을 위해 맡겨주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참고 견딥시다. 주
님의 일생이 모든 것을 나누어주신 삶이었다면, 우리도 비록 부족하지만, 사
랑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고 원수까지라도 용서하기 위해
화해의 손을 내미는 자가 되기를 결단하십시다. 그 때 우리 주님은 우리 삶
속에서 함께 하시며 더 큰 은혜를 부어주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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