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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체냐, 전무냐 / 막 12: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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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냐, 전무냐 (All or Nothing)
마가복음 12장 29~31절
김홍도 감독 (금란교회)



전에 오랫동안 불교를 믿던 할머니 한 분이 예수님을 믿고나서 기도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니까, 손을 싹싹 비비며 기도하고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그러더랍니다. “왜 그렇게 기도하느냐?”고 물었더니 “예수님이 들어주시던지 부처님이 들어주시던지 둘 중에 한 분이 기도를 들어주시라고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더랍니다.
이런 기도는 죽도 밥도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도 섬기고 마귀도 섬기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중국철학에 중용(中庸)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이 사상은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不過不及) 행동”하라는 아주 중요한 사상이며 학문입니다. 중용의 사상은 그것대로의 깊은 의미가 있고, 또 배울 점이 있다고 봅니다. 가급적이면 극단적인 것을 피하고 조화를 이루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진리, 하나님의 말씀에는 중간 상태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전체가 되든지, 전무가 되든지(all or nothing) 둘 중에 하나이여야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아닌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진리가 있습니다. 100점이든지 빵점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본문 말씀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한 말씀이 영어성경에는 “Love the Lord 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하여”란 말은 “all”, 즉 “전체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전체냐, 전무냐” 둘 중에 하나이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는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아합 왕 때에 이세벨을 통해 들어온 온갖 우상종교에 빠져 신앙이 타락한 때에 선지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누가 참 하나님인지” 대결할 때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올라가 구경을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선 것도 아니고 바알신 편에 선 것도 아니고 두 가운데 서서 어정쩡한 상태에서 구경하는 것을 보고 책망하기를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외쳤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이런 신앙은 통하지 않습니다.1. 유일신 하나님이냐, 우상숭배냐

  하나님도 믿고 우상숭배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키는 무서운 죄가 되는 것이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왜정 때에도 신사참배 하라고 할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가 되기 때문에 투옥을 당하기도 하고 고문당하다가 죽기도 하면서 끝까지 우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계 지도자들은 그것은 “국민의례”이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합리화시키면서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기도하는 많은 목사님들이 그 우상숭배 죄 때문에 한국이 6.25 전쟁의 무서운 고통을 당하고 허리가 끊겨 남북이 갈라지는 무서운 징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십계명 중에 첫째 계명이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하신 것이고 둘째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상세하게, 또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상숭배 하는 것은 영적 간음죄로, 한 아내가 남편 외에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고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 중에 하나이지 이것도 저것도 다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4장 16절부터 보면 하나님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 말씀하시기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절에 보면 일월성신에다 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4장 24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우리가 돌아가신 조상 앞에 절하지 말라는 것도 이것이 저주를 자청하는 무서운 죄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0절에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고린도전서 8장 4절에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이론이나 신학을 가지고도 변명하거나 합리화할 수 없는 가증한 죄입니다. 우리가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를 배격하고 싸워 출교시킨 것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44편 15절에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2. 십자가의 복음이냐, 율법주의냐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교리는 십자가의 교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incarnation) 우리 죄를 대 속하시고(Atonement) 구속하시려고(Redemption) 죄없는 피를 십자가 상에서 다 쏟아주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이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이 말씀이 가장 중요한 요절입니다. 예수님도 믿지만 구원받을 만한 행위도 있어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럴듯하지만 무서운 이단입니다. 그런 말하는 사람은 복음을 못 깨달았거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예수님도 믿지만 율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이단사상을 공격한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6~9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저주까지 덧붙여서 강력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받을 길이 없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값은 사망인데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 받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후손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 죄를 대속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아니고는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가 없고 십자가의 피공로가 아니고는 천국에 들어갈 길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구원받느냐, 다른 것을 믿다가 지옥가느냐 둘 중에 하나이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전체냐? 전무냐? 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오른편 강도가 죽으면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는데 그의 행위를 참고해서 구원해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물론 그 강도가 예수님 믿고 더 살았으면 생활의 열매가 나타났겠지만 행위 때문에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로마서 4장 4~8절).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서 행한 만큼 상급도 받고 영광도 누립니다.


  3. 사랑은 오직 하나. 둘은 불가

  배우자는 오직 하나만 있을 뿐, 그 이상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계율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9장 4~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셨습니다. 사람은 한 남자를 사랑하고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지, 두 여자 세 여자 혹 두 남자 세 남자를 사랑할 수 없다는 원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원칙을 벗어나면 행복할 것 같지만 괴로움이 더할 뿐입니다. 현대인이 뭐라고 변명하고 합리화시켜도 죽는 일 외에 이혼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었기 때문에 갈비뼈 둘셋을 품고 살려고 하면 좋을 것 같지만, 이리 찔리고 저리 찔려서 행복 대신 고통만 더할 뿐입니다. “사랑에는 2등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이를 미워하거나 저를 사랑하고, 이를 사랑하거나 저를 미워하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남편이 자기 아내 외에 다른 사람을 쳐다보고 탐심을 품는 것은 무서운 마귀의 시험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자꾸 쳐다보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 보여서” 결국 손이 올라가 따먹었습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했는데, 그 마귀의 생각을 쫓아버리지 않고 받아들였다가 예수님을 팔아먹고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잠언 5장 18~19절에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적으로 사랑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결혼은 못해도 ×오빠, ×누나”로 지내면 되지 않느냐 합니다. 결혼하고도 “오빠, 오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오빠하고 결혼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영국의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간음죄는 중죄라고 했습니다. ①결혼을 파괴함 ②하나님을 모독하고 거룩함을 더럽힘(고린도전서 6장 20절) ③가치를 전락시킴 ④몸을 파괴함(잠언 5장 11절, 7장 23절) ⑤재물을 소모시킴(잠언 6장 26절) ⑥명성을 파괴함(잠언 6장 32~33절) ⑦마음을 빼앗고 해롭게 함(호세아 4장 11절) ⑧현세적인 심판을 받음(예레미아 20장 10절, 신명기 22장 24절) ⑨영혼을 파멸시킴(고린도전서 6장 9절, 히브리서 13장 4절, 잠언 6장 32절, 요한계시록 21장 8절) ⑩타인의 영혼도 파멸시킴(베드로후서 2장 14절) ⑪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창세기 22장 14절) ⑫불화의 씨를 뿌림
이와 비슷한 죄를 짓고 있습니까? 뼈를 깍는 아픔이 있어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도 조심하고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4. 공산주의냐, 기독교 신앙이냐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든지, 공산주의자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는 선택해야지 예수님도 믿고 공산주의도 신봉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전에 북한의 부수상이었던 당량욱은 목사였습니다. 부흥되고 제법 잘 인도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북한에서 목회하다가 끌려가 순교한 저의 고종사촌 형님의 전임자였다고 합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는 젊은 목사, 신학생들 중에 공산주의도 찬양하고 예수님도 믿는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통탄합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전혀 반대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무신론이며 종교말살론입니다. 북한에 교회가 있습니까? 다 파괴하고 없습니다. 크리스찬들은 다 죽이고 옥에 가두고 핍박합니다.
  공산주의는 유물론이고 기독교는 유심론입니다. 공산주의는 정신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고 영혼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활도 없고 천국 지옥도 없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폭력주의이고 기독교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평화주의입니다. 그러나 국방을 위해 사탄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공산주의는 살인만행을 일삼습니다.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자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골고루 나누어 갖자는 주의이지만, 기독교는 사유재산을 인정합니다. 부자되는 것을 금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차원에서 자원하여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김정일을 지지하고 공산화 통일이라도 우선 통일하고 보자는 말을 합니까?
  선민 이스라엘 편을 들어야지, 어떻게 이방신을 믿는 팔레스타인 편을 듭니까? 기독교 신앙이 기본이 된 미국 편을 들지 않고 이라크 편을 듭니까?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선택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2003년 3월 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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